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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윤 / 보편적 기억에서 감각적 창작으로

하계훈

보편적 기억에서 감각적 창작으로


하계훈(미술평론가)


오감(五感)의 작용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기본이다. 듣고, 보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기능을 통해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이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면서 일부는 주로 언어 작용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주로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화가 김리윤은 자신의 과거 기억을 현재로 끌어올려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 작업의 출발은 작가의 기억을 촉발시키는 (그것이 후각이건 미각이건 아니면 그 어떤 다른 감각이건) 사소한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과거를 현재로 이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는 상황은 다양하다. 우리는 감상적 분위기에 잠길 때 곧잘 과거를 회상한다. 때로는 현재의 상황이 이미 일어났던 그때와 유사할 때도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갈망의 모델로서 경험적 과거가 동원되기도 한다. 이처럼 때로는 감성적으로, 또 때로는 경험과 학습의 동기로서 과거는 현재에 다시 소환되기도 한다.


김리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아카데미적인 사실성을 띠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사실적으로 우리의 시각에 다가온다. 김리윤의 작품이 우리에게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 기억의 평범성과 보편성에 있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과거의 기억에 거리낌 없이 접근하는 태도는 건강한 정신을 말해주는 것이고, 과거 기억에 대한 건전한 통제와 그러한 기억에 대한 친밀감은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불러오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조화롭게 재구성하여 현실에서 보다 친밀하고 더욱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이번에 김리윤이 선보이는 작품들은 크게 거리 풍경과 실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한 순간, 그리고 들꽃과 들풀들이 가득한 공간이나 유리병에 담긴 들꽃 다발들의 모습들이다. 거리 풍경들은 주로 작가가 러시아 유학중에 머물던 장소와 공간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구도로 그려졌고, 실내 풍경은 아마도 작가가 직접 참여한 여행이나 주변 인물들의 기념사진 가운데 인상적인 장면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오래 전에 다녀온 여행을 떠올리면서 밑그림 없이 빠르게 그려 나아가는 작가의 원숙한 붓놀림은 그 순간의 기억을 신선하게 되돌려주고, 여기서 더 나아가 그때는 미쳐 관심 깊게 보지 못했던 인물과 장소에 대해 그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그곳을 바라보게 해주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집중을 위하여 대담하게 인물과 공간을 묘사하면서 기억의 집중을 방해할 지도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한 생략을 가하고 있다.


김리윤의 풍경 작품들이 빠른 붓놀림과 과감한 묘사로 디테일이 생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과정에서도 작가는 자신의 기억에 뚜렷하게 떠오르는 대상들은 좀처럼 놓치지 않는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작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선명하게 기억해내고 이를 재현하는 능력은 화가의 덕목 가운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김리윤의 작품 속에서 창가에 앉아 있다가 푸드득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르는 새들과 자동차 타이어 옆을 지키고 있는 고양이들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작가가 그 장소의 그 순간을 기억하는 중요한 대상(primary key object)이 되며 이러한 요소들이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는 작품 속의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되기도 한다. 


색채에 있어서도 작가는 물감을 혼합하여 갈색과 녹색조의 가라앉은 색채를 화면 전체에 펼치면서 제한적으로 일부분에 선명한 색채를 도입한다. 이러한 색조는 상징적으로 시간의 경과와 감정의 침잠을 암시해줄 수 있으며, 비교적 속도감 있게 달리는 붓의 움직임을 제어하여 관람자들을 안정된 사유의 무드로 이끌어주는 균형추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풍경을 묘사한 작품들 이외에 이번에 출품한 작품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들꽃 한 묶음을 무심하게 담아놓은 병이나 풀꽃 덤불 속을 거닐거나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집 근처의 공터에서 놀던 기억을 이러한 공간과 상황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릴적 뛰놀던 숲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꽃들로부터 느낀 감성을 작가가 잊어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해오다가 그 시절의 기억이 어느 순간 우발적으로 소환되어 작품으로 이어지고, 그 꽃들이 다시 실내로 들어와 창가와 탁자 위에 놓이는 작품들은 작가의 기억과 경험이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면서 전개되는 시간의 연속성을 넘어서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러한 들꽃을 매개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김리윤의 작품은 작가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거대한 미학적 담론을 시각화하기보다는 소박한 개인의 경험에 기초를 둔 이미지들을 표현하는 친숙한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작가는 이러한 회고적 주제를 표현함에 있어서 숙련되고 자유로운 붓놀림을 통해 기억의 요체를 더욱 선명하게 불러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가는 색채와 구도를 능숙하게 통제함으로써 화면의 완성도를 높이고, 이로부터 생산되는 이미지들은 어렵지 않게 관람객과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친밀감을 높여주고 있다.


흔히 말하기를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성향이 퇴행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김리윤의 경우에는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건강하게 현재로 소환되고 그것이 작가의 창작의 중요한 원천으로 작용하는 까닭에 오히려 퇴행이라기보다는 창작의 에너지를 가득 담은 기억 창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김리윤의 과제는 이것을 얼마만큼 성숙한 예술적 결과물로 배출해내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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