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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미와 현대미의 성공적인 이형교배를 기원하며

하계훈

하계훈(미술평론가)


현대미술의 특징은 정해진 규범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미술을 통제할 수 있는 규범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 종교가 우리 생활과 사고를 지배하던 시대나 절대주의 시대에 창작활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작가의 창작 의지나 미학적 소신을 억제하고 주문자의 뜻을 우선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창의력보다는 기술적 역량이 주문자와 감상자가 자신들의 작품을 의뢰할 작가를 고르는 중요한 판단 요소였었다. 절대군주시대에 설립된 왕립미술원과 왕립미술학교 등의 기관들도 작가들에게 창작의 규범을 강제하였고, 이러한 규범의 수용 여부에 따라 살롱(Le Salon)전과 같은 공모전에 출품할 기회가 주어지는지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유명한 1863년 낙선자전람회(Salon des Refuses)와 무심사 전시회인 앙데팡당전(Salon des Artistes Independant) 등에 의해 전환기를 맞으며 점진적으로 진화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규범주의적 미술 생태계가 최근까지 주도적으로 작가들의 창작세계를 형성하였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미술대학에서 스승을 통해 훈련된 기량을 공모전에서 평가받는 경로를 거쳐 창작활동을 전개해나가는 작가들의 활동 궤적이 모범답안처럼 받아들여지던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예술가들의 수련 방식이 다양해지고 향후 그들의 활동경로가 다원화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작가 채림은 원래 보석 디자인과 금속공예를 전공 영역으로 활동하던 작가다. 본격적으로 작가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채림은 불문학 학사 및 석사과정을 통해 예술적 창작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경력이 오늘날 작가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숙성된 주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같은 타블로 형태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채림은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전문 교육기관을 거쳤으며 다년간 생활에 적용될 수 있게 착용 가능한(wearable) 보석 장신구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채림의 이력은 작가에게 국제적인 시각에서 예술을 사유하는 능력을 부여하였고 그 결과로 국제 앙드레 말로 협회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하였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작가가 외국에서 조형 훈련을 받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전통과 미감에 대해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채림의 최근 작품은 이러한 국제적 경험 위에 자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 예술에서 포착되는 미감을 융합하는 것에서 착안되었다.


작가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공예와 우리 전통예술의 대표적인 분야 가운데 옻칠과 자개를 결합하는 나전칠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본격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급속하게 현대화(또는 서구화)되는 우리의 생활환경이 전통에 대한 관심을 점차 감소시키고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울 수 있는 토대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낸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이야기한 것처럼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러한 논리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준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민족 미학과 전통의 특징을 현대화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일부 작가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시원스럽게 해소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의식과 환경이 현대화된 상황에서 전통을 현재화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며 구체적 작업보다 관념을 앞세우다보면 자칫 이도저도 아닌 실패작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채림의 선택은 전통예술을 탐구하되 서두르지 않으며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자신이 오랫동안 연마해 온 보석공예 작업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무려 40회에 가까운 옻칠과 연마로 바탕 화면을 마련하는 작업에서 작가는 밑칠이 마르면 다시 그 표면을 연마하고 칠을 더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교감하면서 느리게 호흡하고 기다림으로써 아름다운 표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표면 위에 아교로 자개를 붙이는 전통적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해온 나전칠기 작품의 자개들은 채림의 작업에서 장신구를 제작할 때 보석을 잡아주는 세팅 작업에 의해 보석의 자리에 얹힌다. 다시 말해서 테두리를 이루는 금속은 보석 대신 십장생 문양의 자개를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며 동양과 서양의 결합이기도 하고 금속과 전복 껍데기라는 서로 다른 물질의 결합이면서도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표현으로 탄생한다. 


우리 전통 미술사에서 금속과 칠기의 결합은 드물긴 하지만 국보 140호 나전단화금수문(螺鈿團花禽獸文) 거울에서 볼 수 있는 평탈(平脫) 기법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금속은 옻칠면 위에 자개 대신 오려붙여지고 다시 그 위에 옻칠이 가해지는 방식으로서 회화적 평면의 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채림의 작품에서 자개를 잡고 있는 금속은 옻칠면에 부착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떨어져 수직으로 나무처럼 심어지는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작품은 평면이면서 부조적 입체성을 갖기도 하며, 바탕을 이루는 옻칠과 부유하듯 표면으로부터 떠있는 자개의 이미지들이 조명 효과에 의해서 오묘한 빛의 스펙트럼을 펼치기도 하며 이와 동시에 부유하는 이미지의 그림자를 옻칠면 위에 투사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이러한 작품을 ‘빛과 그림자’의 대조나 호수 위에 산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그림처럼 느끼는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채림은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을 하나의 독창적인 유닛으로 설정하고 상하좌우로 동일 규격의 작품들을 확장시킴으로써 집합적인 거대한 설치작업으로 발전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으며, 일부 작품에서는 병풍이나 서양의 두 폭 혹은 세 폭 제단화와 같은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옻칠면의 맑은 색채와 광택을 배경으로 반짝거리는 자개와 은의 빛나는 조합은 자연스럽게 생동감 있고 우아한 입체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작품에서 숲속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면서 관람자들에게 심신의 치유의 경험을 불러일으키게 해준다. 비록 세밀하고 반복적인 노동의 결과물로서 어렵게 태어난 작품이지만 작가는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현대인들의 눈을 사로잡지 못해온 전통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방법으로서 옻칠과 나전 그리고 보석공예의 금속 가공기법을 순조롭게 융합시켜오고 있다. 어려운 길이지만 부디 채림이 작업을 통해 우리의 전통예술이 현대인의 생활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면서 더 나아가 나라 밖에서도 관람자들에게 우리의 미감을 전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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