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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식의 고양과 정서적 치유를 위한 가을의 한옥 공간

하계훈

하계훈(미술평론가)


일장추몽(一場秋夢)전은 남산골한옥마을에 위치한 다섯 채의 한옥과 그 사이의 마당 공간에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예술, 한옥을 품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어 오는 일련의 전시 가운데 두 번째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 공간이라고 할 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형화된 공간에 조명과 온습도를 조절하면서 작품이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게 위치함으로써 관람객과 최적의 상태에서 만나는 공간을 연상하겠지만, 현대미술에 있어서 일부 전시들은 이러한 절대적이고 중성적인 공간을 넘어서서 주어진 특정 공간에 맞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공조명의 도움 없이 자연광에만 의존하면서 자연 순응적이고 장소 특정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사례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공간의 진화 면에서 보면,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공간들도 시간에 따라 일정한 순환의 과정을 밟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공공 미술공간을 가졌었던 유럽의 경우 초기의 미술 전시 공간들이 지향하는 모습은 해당 작품들이 원래 위치했던 공간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로서 우리는 많은 전시 공간이 무슨무슨 저택이나 궁전 등에서 화려한 실내를 배경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작품 이외의 곳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백색의 벽과 천장으로 둘러싸인 중성적 공간에 오직 작품만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공간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의 맥락(context)을 파악할 수 있는 전시의 기법이 강조되면서 흰벽의 공간(white cube)을 넘어 실내와 실외의 다양한 공간에서 전시가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면에서 살펴보면 이번 남산골한옥마을의 전시는 새롭고 트렌디한 전시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개의 한옥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에는 6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배치하였는데, 작품 하나하나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주제에 수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우선 김현수 작가의 대형 연꽃 작품인 <백련(White Lotus)>은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마당을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의 정신과 종교, 그리고 생활과 미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연꽃이라는 소재를 흰색의 대형 작품으로 담담하게 제시함으로써 그 공간을 정화하고 침잠된 명상의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이곳 한옥을 벗어나면 곧바로 번잡한 도시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게 되지만 적어도 이 공간만은 세속의 번잡함과 소음에서 차단된 명상과 자아성찰의 공간으로 유보되어 있으며 관람객들은 잠시나마 이러한 공간에서 정서적 정화와 미학적 체험을 누리게 된다. 다음으로 박성연의 경우에는 성인 키만한 <숨쉬는 사과>라는 작품을 통해 현실 상황에서 자아와 환경의 부조화가 주는 생경함을 강조해준다. 커다란 풍선처럼 바람을 불어넣어다가 어느 정도 바람이 빠져나가면 다시 바람을 불어넣는 과정을 반복하는 숨쉬는 사과는 마치 살아있는 개체로서의 사과가 공간의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몸집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으로 표현되어 마치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서 희망과 현실의 괴리, 기대와 그를 충족해야 하는 노력의 버거움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같다. 작가가 이러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하여 녹색 사과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보편적인 오브제로서 종교적, 과학적, 예술적 모티브로서 인류의 성장과 전개를 상징해 온 대표적인 과일로서 사과를 선택한 듯하다. 그리고 아직 붉게 익지 못한 파란 사과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푸른 사과가 붉고 탐스럽게 익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상징하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박혜원의 <한 평의 집>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주거공간 면적의 기본 단위인 ‘평’을 도입함으로써 우리 삶의 최소 공간 단위이면서 그 자체로서 우리의 삶의 터전을 표현하는 것임을 암시적으로 제시해준다. 작가는 이 공간을 붉은 실을 늘어뜨린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공간의 생명, 생활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면서 실을 통해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결성을 암시해주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설치물에 동반하는 영상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사는 공간이 갖는 의미와 그 공간으로부터 얻게 되는 추억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마치 작품 전시 공간이 일종의 명상과 종교적 사유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수연과 오혜선의 <물고기의 꿈>은 수많은 푸른 색 물고기 형상들이 허공에 매달린 줄에서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설치작품으로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운동성이 강조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현실과 꿈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의 매일매일 반복되는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몸짓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주제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전반적으로 청색의 물고기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속에 간간이 드러나는 화려한 무늬를 가진 물고기들은 궤도 이탈을 시도하지는 못하지만 일상탈출의 희망을 소극적으로 반영하는 소수의 현대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정혜령의 <기억하다>는 점토로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존재해왔던 한옥의 오랜 역사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역사와 시간의 축적을 나무의 가지가 뻗어 나아가는 현상으로 표현하여 전시장 바닥에 전개되는 나뭇가지들의 성장을 표현한 작품은 이 공간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사유하게 해준다.마지막으로 조은필의 <브링 더 스페이스(bring the space)>는 실물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커다란 푸른색 깃털이 공간에 배치된 설치 작품이다. 고대사회에서 깃털은 부족 안에서 지휘자의 상징이기도 하며 깃털의 주인인 새를 연상시켜 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험한 물건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상상의 나라로 관람객들을 인도할 수 있는 깃털로 장식된 공간은 잠시나마 그들을 현실을 이탈하여 상상의 나라로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에 남산골한옥마을에 설치된 여섯 작가의 작품들은 오늘날 숨차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잠간이나마 자신을 돌아보고, 일상을 떠나 상상과 희망을 꿈꿔보게 해주는 삶의 활력소 역할을 해준다. 한옥의 공간에서 설치미술과 영상 작업을 만나는 경험은 정규 미술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만나는 경우와는 또 다른 경험을 준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미의식의 고양과 정서적 치유라면 사색의 계절인 이 가을에 개최된 이번 남산골한옥마을 전시는 어느 정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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