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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공포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한 숲

하계훈

하계훈(미술평론가)


녹색의 숲을 묘사한 유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보통의 일반적인 감성은 시각적 편안함과 휴식, 그리고 치유와 생명에 대한 희망 등의 정서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녹색, 게다가 녹색의 숲은 건강을 떠올리게 하고 물질적, 정신적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어떤 것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 김건일은 주로 이러한 숲이라는 소재를 화면에 도입하여 주로 초록색의 변주로 작품을 제작한다. 김건일이 화면을 구성해내는 방식은 마치 땅이 오랜 시간을 두고 퇴적하여 여러 겹의 지층을 이루거나 나이테가 한해한해 그 두께를 더하여 나무기둥이 굵어지는 것처럼 물감을 여러 차례 덧칠한다. 그런데 작가는 물감을 반복해서 쌓아가는 과정마다 다시 그 물감을 부분적으로 벗겨내는 이미징 작업을 시도하고, 결국 붓작업의 첨가와 기존의 물감 층 일부의 벗겨냄이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프로세스를 동시적으로 반복한다. 물론 벗겨내기는 무원칙적인 작업이 아니라 계산된 이미지의 발현을 전제로 하며 풀잎과 줄기 등의 이미지들은 작가의 전공에서 유래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한국화적 필선을 느끼게 해주는 날카롭고 세련된 획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초록의 숲에 겹겹이 표현되는 식물의 표정이 여러 층으로 겹쳐져서 입체적 공간감을 주는 하나의 커다랗고 울창한 식생(植生)의 풍경이 된다. 


김건일은 이러한 방법으로 숲을 그리고 그러한 작품에 개인의 기억과 망각, 갈등과 욕망의 경험을 은유적으로 투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정신작용 가운데에는 다시 떠올려 즐거움을 반추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그와 반대로 애써서라도 외면하고 잊으려는 안타깝고 후회스런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기억의 반향작용이 화가 김건일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으로 전개되게 되는데 이러한 손의 노동이 유도하는 의식의 진행과정을 작가는 욕망이라는 정신작용과 연관시켜 해석한다. 화면에서 덧칠해가는 행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는 기억의 두께라면 중간중간 걷어내는 물감의 획은 축적되어가는 기억의 이러저러한 단편들을 과거 언젠가로부터 현재로 불러 떠올리는 현상의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떠올려진 기억은 다시 칠해지는 과정을 통해 덮어지거나 이와 반대로 노출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덮인 부분과의 대비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화면의 최상층 외피로까지 부상하여 기억을 유도하는 기표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김건일의 작업은 곧 회화가 재현성에 머무르지 않고 시각을 넘어서는 사유와 다양한 감정에 연결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성과 본능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다섯 가지 감각 가운데 대표적인 수단의 하나로서 작가가 시각의 작용을 선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풍경을 ‘기억과 망각의 거대한 집합체’로 보고 있으며 풍경을 표현하는 것은 곧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하는 기억의 작용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관념적 사고가 시각적 재현을 능가할 가능성이 높아서, 만일 김건일이 자신의 작품 속의 풍경을 쉽게 추상 또는 반추상으로 전환시킨다면 문명상태에 대한 염세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기도 했던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이 주장하는 대로 현상학을 넘어 형이상학으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있다. 복잡한 도시의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심신의 치유와 영혼의 정화를 통해 초월적 경지를 꿈꿔볼 수 있는 자연의 상태, 즉 숲의 존재는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는 무의식적 우울증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도시화된 환경이 강요하는 시행착오와 부도덕한 과오를 보상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선행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전단계에서 자기부정의 고해성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려진 이미지 위에 다시 물감을 덧칠하거나 이미 형성된 물감의 궤적에 벗겨내기의 작업이 수행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이처럼 지나간 일에 대한 반성이나 수정의 의지가 조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과 과오를 인정하기보다 회피하려한다. 따라서 김건일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숲이라는 풍경을 통해 기억과 망각의 집합체를 떠올린다면 작가는 그 실체를 바로 마주하기보다는 비껴가는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서려고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대상을 일부러 모호한 모습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건일은 자신의 작품에 내포된 정신성과 심리적 추상화의 유혹을 버리고 자신이 꾸준히 수련해 온 재현적 조형 언어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김건일이 기억의 구현으로서 숲을 표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숲은 기본적으로 복합적인 기억과 감정이 얽혀져서 형성되는 공간이자 물질인데, 그것은 작가를 포함한 관람자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거나 혹은 희망으로 다가오는 야누스적인 표정을 갖는다. 따라서 숲과 대면하는 작가와 그 작가가 보여주고 해석해주는 숲을 대면하는 우리들 관람객들은 숲이라는 중의적 상징성을 가진 공간을 통해 자기 안의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대면하게 될 것이며 그 가운데 어느 숲에서 자신의 감성을 펴나가고 의지와 이성을 발휘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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