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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의 부활을 위한 순례 의식(儀式)

하계훈


하계훈(미술평론가)


강정헌은 아쿠아틴트(Aquatint) 기법의 특성을 살려 한 화면 안에서 10여 단계 이상의 상이한 톤을 조절하며 비록 단색이지만 조형성이 풍부한 화면을 구성해왔다. 대부분의 경우 아쿠아틴트는 단색으로 제작되므로 화면에서 명암과 톤의 조절이나 미세한 선의 표현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테크닉과 부식 방지액의 사용에 따라 형성되는 명암의 콘트라스트가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렇게 제작된 아쿠아틴트 판화는 사진의 맛과 회화의 맛을 절묘하게 절충하는 놀라운 판화의 맛을 보여준다. 아쿠아틴트 기법을 이용하여 판화작업을 해온 강정헌이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작업의 완성물인 판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판화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전후 맥락을 크게 확대하여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완성까지 직접 관여해보는 일종의 시간적 진행과정을 기록하는 장기 프로젝트로서 도큐멘타리 퍼포먼스적 요소를 포함시키고 있다. 


학업을 마친 후 판화 작업에 몰입해 온 강정헌은 영국 유학을 떠났었다. 이곳에서 그는  범위를 확장하여 미디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게된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이번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의 단초가 떠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정헌은 판화지의 재료가 목화를 원료로 만들어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직접 목화씨를 발아시키고 수확하여 판화지를 만드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그 판화지로 작품을 제작하는 약 1년간의 장기 프로젝트를 계획한 것이다. 사실 수백년 전 판화작가들은 아마도 이와 비슷한 작업들을 몸소 진행하면서 작업을 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산업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용지를 보급하는 직업과 물감을 제조, 판매하는 직업 등이 분화되도 판화 작가는 이러한 재료들을 구입하는 형식으로 작업을 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정헌은 왜 이러한 (보기에 따라서는 시간 낭비라고도 볼 수 있는) 어려운 작업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수행하려는 것일까? 여기에는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판화 작가로서 최종 결과물인 판화지 위의 이미지를 얻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과정의 여러 작업 단계를 직접 체험해보는 것은 작가의 작업에 도움이 되며 창작의 영감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매번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이러한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작업 의도 이외에도 강정헌은 현재의 미술계에서 장르간의 불균형이 심각해져서 판화 분야의 상대적인 침체가 심화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판화작가로서 고군분투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하고 있다. 작업실 안(과 밖)에 발아시킨 목화 씨앗을 심어서 인공조명을 이용하여 싹을 틔우고, 목화를 수확하여 궁극적으로 판화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어쩌면 강정헌이 판화예술에 대한 정신적 순례이며 판화의 부활을 위한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식은 작가의 재배기록과 사진 및 영상기록 등으로 보존되어 판화예술의 제전(祭典)처럼 제시될 것이다. 이러한 강정헌의 작업은 설치예술 형태로 나타난다. 실내에서 재배되는 목화의 새싹에 빛을 쪼여주기 위하여 작가는 빔프로젝터의 빛을 비춰주는데, 작가는 이때에 전쟁, 폭격, 파괴된 건물 등을 보도하는 BBC뉴스를 비춰준다. 이러한 영상을 자라나는 새싹위에 비추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풍경에서 삭막하고 메마른 도시와 인간생활의 명암을 지적하며, 그 안에서 발견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사라져 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의 결핍을 아쉬워하는 작가의 제작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올 해 봄에 시작하여 1년의 작업과정을 예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스스로 재배한 목화씨로부터 궁극적으로 판화지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작업을 진행하지는 못하였지만 새싹이 튼 목화는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빛, 물, 바람을 공급해줄 수 있게 조명과 환풍장치를 단 인큐베이터에 보관되게 된다. 이렇게 자라나게 되는 목화에 대해서 작가는 자연에서 생장하는 목화보다 생장속도나 상태, 목화 수확률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일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서 식물이 성장해가는(꽃피는) 과정을 관찰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강정헌이 이전의 판화에서 과잉(overflow)을 키워드로 제작한 거대 도시의 인물들과 풍경 연작들을 생각해보면 조그만 싹이 힘겹게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궁극적으로 판화의 재료인 종이로 탄생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 과정은 작가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과정일 것이다.


자연에서 생장하는 목화꽃이 만들어내는 목화솜과 같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강정헌이 이제까지 진행해 온 작업은 진정성과 집중력을 다한 것이었기에 결과의 성패에 관계없이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연구해 온 식물과 자연에 대한 생장의 원리 등은 앞으로 작가의 창작 작업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앞으로 목화로 만든 판화지가 완성되면 그 다음으로 판화 프레스를 손수 제작하고, 판화 잉크도 암석과 같은 자연물을 채취하여 마지막으로 판화작품을 완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판화는 제작 과정이나 제작 방식과는 별도로 이제까지 강정헌이 관심을 갖는 주제인 삶의 진실과 일상 속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 등을 표현할 것이다. 이번에 제작되는 판화에서 관람자가 느끼는 서정적인 공감대는 이전의 작품에서 느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작가가 판화작업에 대해 갖고 있는 열정과 진정성을 보다 심층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이끌어낸 재료와 주제를 동판화의 한 종류인 아쿠아틴트 기법으로 완성도 높게 전달해주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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