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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선 / 가역적 시간의 기억과 상상

하계훈

가역적 시간의 기억과 상상


하계훈(미술평론가)


김정선은 회화 작품을 통해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탐구한다. 작가는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작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해 온 추억과 회상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해왔다. 일반적으로 시간이란 물리적 전후관계를 이어 흐르는 어떤 것으로 가정되고 그 선상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위적으로 경계지어 신화와 문학, 역사와 종교 등 우리들의 삶의 정신적인 부분에서 내러티브와 환상(illusion)을 생산해왔다.


김정선 역시 작가이기 이전에 남들과 어울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시간의 물리적 속성과 사회적 정의(定議)를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작업실 안에서 창작의 과정에 몰입하는 작가로서의 김정선에게는 이러한 시간의 물리적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의 특권이 부여된다.



Shooting Maman, 130.5x130.5cm, oil on linen, 2013

한국에서 미술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미국 서부에서 미술 석사과정을 위해 몇 년간 유학한 작가가 귀국하여 1999년 처음으로 전시를 가진 시점은 지금까지의 김정선의 작품의 흐름을 추적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1999년 덕원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을 작품에 담아내는 시도의 첫 단추를 꿰었다. 작가는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인용하여 ‘과거-현재-미래’를 ‘기억-직관-기대’라는 개념으로 풀어내보았다. 그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식기를 보내고 2005년에 다시 가진 개인전에서 이러한 시간성의 개념은 작가의 주변 인물들에게 일어난 사건들과 결합한다. 


부모의 결혼, 어린 시절의 나들이, 집안 어른의 장례식, 친구 생일 파티 등의 사건에 작가의 희미한 기억을 더해 시각화된 이미지들은 고전적인 화화의 원리와 규범을 양가(兩價)적으로 반영한다. 교육과정을 통해 습득한 묘사력과 개인적 기억을 시각화하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모티브의 선택 사이에서 김정선은 특정성을 일반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서 대상에 대한 묘사력을 유지하지만 부분을 전체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특정성을 배제하는 시각적 전략을 도모한다. 


김정선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단선적으로 관통하는 물리적인 현상이라는 인식을 회피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이미지의 표현에 있어서 형태는 사실성을 유지하되 대상의 윤곽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만들고 채색에 있어서 유채색과 무채색의 중간지대를 넘나들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인식을 교란받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지닌 물건들은 예전의 사진이나 작가의 오랜 기억으로부터 작품을 제작하는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온 것들이지만 시간의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이탈하여 중성적 혹은 가역적(可逆的) 시간의 장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김정선의 작품에서 인물과 공간이 얇게 중첩되거나 인물의 윤곽선 일부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든지, 인물과 주변 사물 사이의 형태상의 침범이 이루어지는 것은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우리 삶의 순간성(ephemerality)과 연관된다. 과거에 그 곳에 일어났던 일들, 그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현재에 부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련한 추억과 아쉬운 미련을 감추기 어려우며 이러한 상황이 작가를 우리 삶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명상이라는 주제에 침잠하게 해준다.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집중하는 주제는 시간성과 역사성이다. 김정선 역시 이러한 주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회화적 묘사와 일상적인 것의 재맥락화를 통하여 작가 특유의 감수성을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반인들이 무심코 지나치며 읽어내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과 회상을 현재화하기도 하고 추억의 대상-그것이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물, 혹은 그 모두가 포함되는 상황이거나-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발생하는 정서적 허기(虛飢)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Shooting giacometti, 130x194cm, oil on linen, 2014

김정선에게 과거라는 시간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순간이다. 따라서 추억은 현재의 감정이나 상황에 합류할 자격이 있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기록함으로써 때로는 애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러한 추억의 되새김 행위를 통해 단순한 노스탤지어에 빠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곳으로부터 지금 여기 관람객이 서있는 곳으로 유입되는 신비한 시각적 영향력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정선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기억의 시각화 전략을 유지한 채 좀 더 관람객 친화적인 작품들을 선보인다. 최근작에서 작가는 사건의 기억을 화면에 도입하는 데 있어서 이전보다 객관성을 유지하며 관람객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확대시킬 수 있는 접점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앞에서 사진 촬영에 몰두하는 아이나 풍선과 강아지를 가지고노는 아이의 모습이 배경의 공간과 조우하는 방식에 있어서 김정선은 이전보다 개인의 사적인 기억과 감정을 좀 더 객관화하려는 듯이 화면 안에 들어있는 사적(私的) 우울의 느낌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러한 느낌은 공간과 인물 사이의 물리적 관계를 이전보다 명확하게 정리하고 색채면에서도 빛바랜 듯한 무채색의 영역을 감소시킴으로써 전반적으로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주제를 유지하면서도 좀 더 보편화된 기억일 수 있는 상황의 연출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유일한 입체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장한 소녀>의 경우 작가의 작업을 동반해 온 독서의 기록과 기억을 회화 이미지와 결합하는 방식에 있어서 개성적이고 흥미로운 매력을 보여준다. 작가가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권 한권 쌓아올린 책의 모서리 표지들이 형성하는 공간을 한 아이의 성장하는 키높이와도 연관해 볼 수 있게 제시하는 화면의 제시 방식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유쾌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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