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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경 / Heartland-유토피아의 입구에서

하계훈

권인경은 채색화 기법을 통해 풍경을 표현하는 작가다. 그런데 그 풍경은 전통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작품들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권인경의 작품에서는 전통산수화에서 구사되는 먹과 붓의 흐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화법에서 도입하지 않았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도 하고, 화면 구성 방식에 있어서도 오래된 책들의 낱장들이 화면에 콜라주되어 시간성을 상징하기도 하며 다시 그 위에 몽타주 기법으로 그려진 다양한 이미지들이 작가의 주변을 둘러싼 소소한 일상의 사유와 경험을 시각화하는 이중적 콜라주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권인경, 펼쳐진 집, 126x156cm,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13

권인경의 작품 속에는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한 화면 속에 혼재해있다. 작가의 생활 반경에서 발견되는 주택과 상점, 그리고 작가가 방문했거나 먼 곳에서 바라본 빌딩들이 일관된 시점과 비례에 맞지 않게 바위산이나 나무, 숲, 아스팔트 도로 등과 공존하고 있다. 종종 권인경은 작품 속에 배치시킬 건물이나 풍경을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고층 건물의 바로 앞에서 올려다 볼 때의 급격한 원근법적 묘사나 마치 하늘 위에서 불규칙한 굴곡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로 대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작품 속의 장면들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실내에 있음직한 의자나 탁자 등의 가구들이 그 풍경 안에 더해지고 때로는 이러한 장면들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렇게 구성된 권인경 작품의 화면 안에는 해자(moat)처럼 풍경을 둘러싸거나 거의 둘러싸듯이 감아돌아가는 물길이 자주 등장해왔다. 황색 계열의 화면에 남색으로 화면을 휘두르며 흐르는 물은 색상의 대비효과만큼이나 화면 속의 공간을 대비적으로 분리시킨다. 푸른색의 강물은 때로는 이편과 저편을 갈라놓는 듯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물길로 인해서 고립되는 공간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위협으로부터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창조된 공간을 Heartland로 명명한다. ‘심장부’ 또는 ‘중심지’로 해석되는 Heartland는 지리학적인 좌표상의 중심이면서 마음속에서 관심을 집중하는 정신적인 사고의 중심지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표현된 시각적 이미지들은 기억과 상상의 콜라주로서 작가의 심리적 heartland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암호해독 과정처럼 그 이미지를 읽어 나아갈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의 성심리, 불안, 무의식과 잠재의식 등을 연구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 가운데 하나로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적 불안을 외부에 표출하는 무의식적 반응 가운데 하나인 방어기제(defensive mechanisms)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 이론에 따르면 우리들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면 이성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불안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오히려 무의식에 기반을 둔 판단과 행동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방어기제는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불안과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아를 붕괴의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자기보호의 방법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권인경이 작품을 통해 구축해가는 Heartland에는 외부의 어떠한 자극과 위협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는 유토피아적 안녕을 향한 자기보호와 행복 추구의 본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의 영토에 진입하기 전단계에서 유리는 불안과 위협에 노출될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시련의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권인경의 작품 가운데 가파른 절벽 앞에 세워진 가상의 고층건물들이나 주변이 가라앉아 그 부분만 솟아오른 것처럼 좁은 땅위에 서있는 이국적인 건물들은 <기억의 심연>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작가의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심리적 불안과 시련의 단계를 시각적으로 회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권인경은 이제 Heartland를 지향한다. 작가는 그곳을 ‘그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새’라고 한다. 그러나 요새는 이제 더 이상 지형적으로 방어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여유로 무장된 정신의 요새라고 할까. 작가는 Heartland의 가능성을 조금씩 엿보듯이 작품 속에서 방어적 구도를 이룬 경계의 지형을 조금씩 열어준다. 이제 강물은 작가의 Heartland를 보호하듯 에워싸지 않고 춤추듯 굽어 흐른다.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 <흐르는 시간>으로 명명 한다. 삶의 연륜이 쌓여갈 때 시간 앞에서 대상들을 관조하는 태도처럼 이제 작가가 새롭게 구축한 풍경에는 활짝 열린 원경의 강(혹은 바다)과 그 너머의 먼 곳의 산들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화면의 구성요소로 등장한다. 색채 역시 이전보다 잘 정제되고 구도도 보다 깔끔하게 다듬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에는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가 달린 아담한 교회의 모습도 작고 수줍게 등장한다.

권인경의 최근작 <저장된 파라다이스>에서는 전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괴석이나 식물 실루엣의 틀 안에 이제까지 작가가 구사해왔던 고서 콜라주, 이미지 몽타주, 작가 주변의 풍경과 사물의 데페이즈망 형식의 배치 등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공간이 코발트색 바탕을 배경으로 마치 우뚝 솟은 바위나 싱싱하게 성장하는 화분 속의 식물의 형상으로 대치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유독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드디어 Heartland의 입구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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