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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관과 블록버스터 전시회

하계훈

토마스 호빙(Thomas Hoving)은 1967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장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미술관의 역사상 처음으로 소위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관장직을 넘겨받을 당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침체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관람객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호빙은 이러한 미술관의 침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서 좀 더 열린, 그리고 좀 더 밝고 활성화된 미술관 운영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호빙은 관장에 임명되자마자 대대적으로 시설을 확장하고 리노베이션을 감행하였으며 수준 높은 소장품을 공격적으로 사들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적극적인 홍보와 대형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기획한 블록버스터형 전시는 1976년 11월에 시작하여 2년여간 미국의 18개 도시와 카나다의 6개 도시를 순회하며 800만 명의 관람객들을 끌어들인 <투탕카먼의 보물전(The Treasures of Tuthankamun)>이었다. 


우리나라의 공공미술관에서 미술관 전시문화가 제법 활발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1988년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블록버스터 전시 행사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급히 개관한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예술진흥원의 미술회관, 그리고 서초동의 예술의전당(당시에는 서예관만 완공되었음) 등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블록버스터 형태의 전시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전시 공간 이외에도 미술관 사업의 예산 면에서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이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미술관이 없었으며 수익 면에서 이러한 투자에 대한 흥행을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공공미술관들이 정부의 관료주의적 행정 방식에 의해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수년간의 준비기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블록버스터전시를 수행하는데 따르는 위험성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주체가 없었으며 관람객 측면에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전시에 대한 문화적 수요를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이러던 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는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라는 이름으로 외국 대형 미술관의 중요한 소장품들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한 발 앞서서 이러한 대형 블록버스터 전시가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그 이전부터 상당수가 개최되어 비교적 성공을 거두어왔다. 특히 일본에서는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신문사나 방송사가 주축이 되어 기업체의 후원을 유도하면서 다양한 블록버스터 전시를 개최해왔는데 이러한 형식의 전시는 자체 홍보 매체를 가진 주최측의 사업인 만큼 대규모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으며 일본 특유의 외국문화에 대한 호감(xenomania)을 갖는 성향도 이러한 전시를 성공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앞서 살펴본 몇 가지 사정으로 아직 공공미술관들이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왔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이런 대형전시를 기획하는 외부 기획사들이 등장하면서 이제 예산 면에서나 다른 측면을 고려해볼 때 한 번쯤 이러한 대형 전시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에 공공미술관에서 개최되던 블록버스터형 전시는 이처럼 작품을 빌려주는 외국 미술관 측과 전시를 개최하는 국내 미술관 사이에 실제적으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기획회사가 개입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블록버스터 전시는 일본의 그것과도 성격이 다르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개최되는 대형 전시들과도 달랐으며 출발부터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공공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블록버스터형 전시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그 주도권이 전시가 개최되는 미술관에게 주어지지 않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전시들은 외부 기획사나 신문사 또는 방송사의 문화사업 부서가 수익사업의 관점에서 해당 미술관을 사실상 대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경우에 따라 대관료에 해당하는 비용을 받지 않음으로써 해당 미술관에서 공동주최라는 형식으로 부분적인 투자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직 수십억원이 소요되는 초기비용을 투입할 수 있는 공공 미술관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미술관은 대부분의 예산을 집행하는 기획사의 진행 계획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됨으로써 미술관의 공익적 성격이 훼손되게 되며,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미술관 내부의 학예인력이 비중 있는 전시에서 주변으로 밀려나서 심한 경우에는 외부 기획사의 지휘를 받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전시의 내용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공공미술관에서 개최되어온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전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시회 타이틀에서 표방하는 대표작가의 작품이 극히 일부만 포함되거나 그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태작들이 다수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미술사적으로도 전시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우며 전시회가 거듭되더라도 중복되는 이벤트에서 얻는 사업적 진행의 노하우 축적 정도의 성과 이외에 미술사적 연구의 누적이나 미술문화 전반의 질적 개선과 같은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들의 문화적 소비력이 성장하면서 초기와는 다르게 요즈음 개최되는 블록버스터형 전시들은 대부분 관람객 동원에 어려움을 많이 겪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람객 숫자의 증가는 공공미술관의 사업과 예산을 지배하는 지방 의회나 담당 부서의 정책홍보 자료나 사업실적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와형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교적 부정적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먼 외국미술관의 현장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미술품을 국내에서 다수의 관람객에게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긍정적인 의견을 표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외부 기획사의 상업성에 공공미술관들이 휘둘린 것이며 미술관의 입장에서도 잘 해야 약간의 금전적 이익 외에는 투자비용에 대비하여 미술관 측에 남는 것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미술관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작년 가을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전의 경우에는 스페인의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과 퐁피두센터가 협력하여 프라도와 파리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미국의 휘트니미술관을 비롯한 공공적 성격의 미술관들이 작품 대여에 상호 협력하고 테라 파운데이션 등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써 상업성을 배제한 공공적 성격의 미술관들 사이의 협업 위주로 전시가 이루어졌으며 소속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주도하여 전시를 준비하고 진행함으로써 모범적인 사례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전시는 개막 이후 관람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받아서 전시 후반에는 야간 개장을 하는 정도로 흥행 면에서나 학술적인 면에서나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렇게 호퍼전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처럼 공공미술관에서의 전시는 기본적으로 해당 미술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장품과 관련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학예인력의 소장품에 대한 연구가 바탕이 되어 전시회가 기획되고 교육 프로그램이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블록버스터형 전시의 경우에도 해당 전시가 미술관의 소장품과 성격이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져야만 내부의 전문 인력의 참여도 가능하고 전시회 개최 예산도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술관 소장품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다른 미술관에서 일부 작품을 빌려오는 형식으로 전시가 기획될 때 두 기관 간의 협력과 교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학예인력의 역할도 제대로 확보되는 것이다. 런던의 내셔날갤러리는 소장 작품을 빌려주거나 작품을 빌려올 때 그것이 내셔날갤러리가 담당하는 영역의 미술사나 학술적 지식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대여를 진행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럽이나 미국 등의 유명 미술관 소장품을 일방적으로 빌려오는 형식으로 전시회가 진행됨으로써 작품을 대여해주는 외국 미술관에서 요구하는 대로 대여조건을 수용하며 비싼 대여료를 지불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작품을 빌려주는 서양의 미술관의 입장에서도 우리 공공미술관으로부터 앞으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작품을 빌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대여에는 상호 협력의 기대보다는 금전적인 이익이 우선 고려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외국 미술관의 리노베이션 기간에 작품이 대여되는 경우일 것이다. 외국미술관으로서는 자기 미술관의 리노베이션 기간 동안 작품을 수장고에 보관하는 수고와 비용 대신 수익성 있는 대여사업을 할 수 있으니 이러한 대여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공공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블록버스터 전시의 학문적, 질적 내용은 차치하고 전시를 진행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으니 막대한 투자를 한 기획회사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블록버스터형 전시에서 수십만의 관람객을 동원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을 단체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런 뒷거래가 이루어지거나 주최측과 손을 잡은 언론사에서 과장된 광고를 집중적으로 내보내서 관람객을 유인하기도 한다. 


올해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몇몇 공공미술관에서 블록버스터형 전시가 열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적지 않은 수의 대형전시가 지금까지와 비슷한 형식으로 계획되고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이러한 전시를 개최해왔던 공공미술관들로서는 이러한 블록버스터 전시가 갖는 장단점의 양면성을 제대로 파악하여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블록버스터 전시가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의 내부 인력이 중심이 되어 장기적인 준비계획 아래 보다 철저한 큐레이터쉽을 바탕으로 관람객을 맞는 전시가 만들어져야 하며, 미술관 본래의 사명 가운데 하나인 공익성이 지금처럼 외부 기획사의 상업성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외국의 몇몇 성공적인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큐레이터들의 노력과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공익성은 상업성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함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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