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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린

하계훈

요셉 보이스는 예술을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믿었으며 우리 모두에게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창조적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울 수 있다. 내게 예술가의 재능이 잠재해있다는데, 그리고 그러한 나의 재능에 의해 이 사회가 예술적으로 모종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는데, 도대체 나의 몸 어디에 이러한 예술가의 유전자가 숨어있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밖으로 끌어내서 이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의 환경에서 일상적인 사건의 반복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은 이러한 일상의 반복에 의해 익숙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일상을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일상의 반복이 익숙해진 우리는 그 속에서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길들여져 현실을 벗어난 새로움이나 현실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의 해석을 지레 그만두고 있기도 하다. 익숙함은 곧 신비감이나 호기심을 져버리게 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도전과 모험을 점점 멀리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게 된다.

 

박혜린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 함몰된 우리의 의식과 경험이 꿈과 이상을 무디게 하고 도전의식과 창의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현실을 전복시키고 싶어한다. 아니 전복이라는 말은 너무 폭력적이다. 박혜린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좀 더 의미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한다. 너무 익숙해서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 예를 들어 우리는 생명을 위하여 호흡하는 것이 필수적이건만 특별한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일상에서 공기의 중요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일상의 사물이나 상황이 특별하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아주 작은 시점의 변화와 생각의 조절에서 다가온다.

출품작 가운데 <The Moon>에는 십 여 개의 작은 돌조각들이 작은 원형의 면적 안에 엉성하게 환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돌조각 각각의 크기와 색깔이 다르고 측면에서 비추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자의 모양이 달라서 그로부터 형성되는 조형적 문맥을 읽어나가는 감상방법도 있겠으나 정작 작가가 이 작품을 제시하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작가의 유학시절 협소한 작업공간을 얻게 된 까닭에 규모가 큰 작품을 제작하기에 물리적 제한을 받고 있을 때, 수없이 밟고 다니던 미술 학교의 마당에 깔린 돌조각들이 작가의 눈에 새롭게 들어오게 되고 그것들 가운데 선별된 돌조각들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The Moon>이다.

 

달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지켜보았으며 평생을 우리로부터 38만 4천km 떨어진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며 기쁨과 슬픔, 기다림과 바람을 과묵하게 들어주며 지켜보아온 이웃 아저씨같은 든든한 존재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달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부터 동화책에서 달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정작 이렇게 친숙하고 때로는 든든하기까지 한 달에 대해서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저 거기 있으려니하는 당연한 존재,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아도 눈감고 그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존재로서 치부하고 달의 동반을 잊고 살기도 한다. 그러다가 박혜린에 의해서 우리는 달의 모습이 둥그런 노랑 쟁반같은 모습이 아니라 내가 매일 밟고 지나다니던 돌조각들로 구성되는 이러한 <The Moon>같은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찮은 돌조각에서 달을 읽어내는 것과 비슷하게 박혜린은 <Pebbles>란 작품에서도 바다나 강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조약돌들을 세라믹으로 재현하여 우리의 화석화되는 감각의 감수성을 다시 일깨우는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일상의 평범함을 뒤집어 새로운 시각을 도입하는 시도는 <Under the Table>에서도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우리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읽거나 요즘처럼 디지털 기기를 조작하는 동안 자칫 잊혀지는 책상 아래의 공간에 대해 주목하였다. 우연히 필기구를 떨어뜨리거나 발끝에 무언가가 닿을 때, 그제야 내려다보게 되는 책상 밑 공간에서 작가는 일상의 시각적 경험과 감각을 뛰어넘는 그 어떤 상황을 경험하고 그것을 우리와 공유하고 싶어 한다.

 

박혜린이 내려다 본 책상 밑의 공간은 그저 평범한 공간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작은 몸을 받아주던 은폐의 공간을 기억하기도 하고 일상을 넘어서는 우주의 공간처럼 무한하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으로 그곳을 인식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발견은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발견과 상상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대상에 대해서 일상의 의미를 뛰어넘는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그러한 발상을 조형적으로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예술적 훈련이 충분하지 않은 까닭에 박혜린과 같은 작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혜린처럼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훈련이 익숙해지면 우리의 방은 쉽게 드넓은 계곡이 될 수도 있고 푸른 정원이 될 수도 있다. <Canyon>은 용암이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면서 굳을 때 육각 기둥모양으로 굳어져 생긴 지형인 주상절리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서 작가는 카드보드지를 이용하여 작은 방을 바닷가의 광활한 풍경으로 바꿔놓는다. 그런가 하면 <My Small Garden>에서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위에 세라믹과 드로잉을 이용해서 작가 개인의 작은 정원을 조성하기도 한다. <Canyon>과 비슷하게 <Sahara>에서 박혜린은 나무판을 곡선으로 다듬은 오브제들을 겹쳐서 배치함으로써 사막의 느낌을 구성하였고 나무판을 경첩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예각으로 절단하여 검은 색을 칠함으로써 선박의 좌초를 연상시키는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연상시켜주고 있다.

 

일상의 공간에서 발견하는 사물과 상황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환하는 박혜린의 작업은 <find, in ordinary shape>, <Dialogue> 등에서도 계속된다. 작가는 어린 시절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꿈꾸었다고 한다. 기술과 문명이 상당히 진화한 오늘날에도 보통 사람들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여러 모로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가끔 요트로 이런 일을 한 사람이 TV의 세계토픽 프로그램을 장식하지만, 그것은 곧 이러한 시도가 TV의 토픽감이 될 만한 드문 일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셈인 것이다. 이처럼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만 작가의 마술봉같은 생각의 전환 방법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세계일주, 아니 우주여행도 가능할 것이다.

상상력과 꿈이라는 개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러한 사고를 격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왔다. 일상적인 사물과 풍경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혜린의 작업은 우리들과의 소통에 있어서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며 작가의 작품이 담지한 일상 뿐 아니라 조형적, 예술적 의미까지 공감하며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결코 지루하지 않은, 광활한 우주와 대지의 풍요를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을 맛볼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저 약간의 시선의 전환과 생각의 변화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을 박혜린의 작품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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