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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클레스의 검 한국 전위미술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윤진섭



다모클레스의 검
한국 전위미술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현재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70s]은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2020.5.26.-7.16)의 미국 순회전이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의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주최한 이 전시는 내년 4월까지 미국 L.A에 있는 해머미술관(Hammer Museum)으로 순회할 예정이다. 
 오랜 우방인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이 역사적인 전시는 다름 아닌 ‘실험미술(experimental art)’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실험미술이란 무엇인가? 흔히 ‘전위미술(avant-garde art)’과 1) 동의어로 간주되는 이 용어는 거칠게 말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따라서 진행 중인 미술의 어떤 태도나 상태, 경향을 가리킨다. 즉, 과학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할 수는 있으나 단정할 수 없는 것처럼, 실험미술 역시 그것을 행하는 작가는 자신의 행위가 장차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실험미술 혹은 전위미술의 역사는 흔히 충격의 역사, 사건의 역사, 스캔들의 역사, 저항과 도전의 역사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 글은 근대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위미술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후(戰後)의 척박한 환경에서 태동한 ‘비정형 회화(Informel)’를 시발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 전개된 실험 내지는 전위미술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지면 사정상 부득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사건들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 책에 실린 다른 문헌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Ⅱ.
 근대 이후 한국에서 ‘전위미술’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20년대였다. 조각가 겸 미술평론가인 정관(井觀) 김복진(1901-1940)이 1926년 1월 2일 자 조선일보에 <신흥미술과 그 표적>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부르주아의 미술’을 뜻하는 이 ‘신흥미술(新興美術)’이 바로 전위미술, 즉 ‘아방가르드 아트(avant-garde art)’를 함의하고 있었던 것. 여기서 ‘신흥’은 곧 ‘새로움’을 의미하니, 이 새로움이야말로 전통에서 벗어나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는데 필요한 동력인 것이다. 물론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김복진이 신흥미술이란 용어를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단어가 근대 이후 전위미술사에 등장한 첫 발화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Ⅲ. 
 ‘아방가르드(avant-garde)’란 말 속에는 개인이나 혹은 집단이 사회에 대해 갖는 일정한 태도와 의식이 깃들어 있다. 후위(後衛)의 반대개념인 전위(前衛)는 ‘-의 앞(前)’이라고 하는 접두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특정한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2)  이 말을 원래 ‘아방가르드’의 출생지인 군사적 의미로 새기자면,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척후조(斥候組)에 해당한다. 즉, 본대(本隊)의 맨 앞에 서서 적의 동향을 탐지하는 역할을 맡은 분대(分隊)가 바로 전위부대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수인 이들은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크며, 그만큼 죽음을 맞이할 확률 또한 높다. 그러나 전쟁에 목숨을 바친 군인에게 훈장이 돌아가듯, 실험과 도전의 정신으로 생을 불사른 전위작가에게는 그 대가로 그에 걸맞는 명예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에 초대된 작가들 3) 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고 작가를 포함한 이들은 한국 화단의 원로로서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역사적이며 기념비적인 전시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Ⅳ.
 군대의 척후조가 대열의 맨 앞에서 적정을 살피듯이, 전위미술가들은 미술의 전통적 관습이나 가치에 저항, 새로움을 추구하는 가운데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러한 도전과 저항의 몸짓은 대중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하며 때로는 혼란스럽기조차 하다.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세력은 그 특유의 호전적 자세, 비타협주의, 과감성, 도전의식, 시간과 전통에 대한 승리의 확신 등을 무기로 구세대를 위협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티로부터 진보의 개념을 차용한 아방가르드는 혁명정신을 토대로 하여 정치적 문화적으로 급진적인 노선을 걸어왔다.” 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진보적 시간관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야 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발전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이 진보적 시간관의 설계가 바로 르네상스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서구의 선형적 역사관의 바탕이 됐던 것. 미술의 경우, 그처럼 일관된 ‘선형적(linear)’ 시간관이 감자 뿌리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구조를 띠게 된 것은 인상주의 이후 20세기에 들어서 나타난 근대미술(modern art)에 이르러서 이다. 뉴욕 근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MoMA)의 초대 관장을 지낸 알프레드 바(1902-1981/Alfred H. Barr, Jr.)가 많은 시행착오 끝에 작성한 근대미술 도표(chart)는 서양미술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5)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 시기를 기준으로 근대 이전과 이후를 명료하게 비교해 보여주는 이 두 장의 도표를 거칠게 요약하면 단순에서 복잡으로의 이행이거니와, 여기서 ‘복잡’은 감자 뿌리처럼 얽힌 리좀적 구조를 띠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상주의에서 다다(Dada), 다다에서 2차대전 이후의 앵포르멜에 이르는 서구미술의 진행은 다양한 미술사조의 영향 아래 나타난 복잡한 상호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Ⅴ.
 김복진이 신흥미술을 언급한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바우하우스 운동, 신조형주의, 절대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등등의 다양한 미술사조들이 명멸했다. 그 핵심에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고 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전위정신이 깔려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에 한국에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창립된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1918년에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오세창 등이 만든 서화협회전(협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두 전시회는 관제적이냐(선전) 민족주의적이냐(협전) 하는 성격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전위미술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전통에 기반을 둔 보수미술의 성격이 짙었다. 
  이 시기의 전위미술과 연관해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시 <오감도>로 유명한 이상(李箱) 김해경과 고한용(고따따)이다. 또한 192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급진적인 전위운동 ‘마보(Mavo)’ 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동명의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한 이 전위그룹의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를 위시한 다섯 명의 회원들은 같은 해에 유럽을 방문, 독일 다다 잡지인 ‘Merz’와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는 스트룸Ⅱ 갤러리(Gallerie Der Strum Ⅱ)를 방문, 방명록에 한자로 서명을 남기기도 했다(사진). 6)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다다이즘에 심취해 있던 이상 김해경은 ‘마보’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한용은 다다이즘과 관련된 다수의 글을 남겼다. 7)  

 한편, 2017년에 코엑스에서 열린 [KIAF SEOUL]의 특별전을 통해 김노암은 고한용의 존재를 대중에게 소개한 바 있다. 1920년대 경성에서 다다이즘을 최초로 소개한 고한용(1903-1983)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었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요시카와 나기의 책 <동경의 다다, 경성의 다다-다다이스트 고한용과 친구들>을 통해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져 온 고한용의 활동과 기록을 찾는 과정을 이야기한 대담이었다. 8)
   
 일제강점기에 전위미술을 그룹의 차원에서 추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일본에 유학, 당시로선 전위미술에 해당하는 추상화를 배워 창작을 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자유미술경성]전을 열어 인상주의 일변도의 아카데미시즘에 젖어있던 한국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1930년대 한국의 추상화는 집단이 아닌 소수 작가의 개별 활동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집단화와 선언문, 기관지를 요체로 하는 전위미술 운동과는 일정 부분 거리가 있었다. 9)
 
 
Ⅵ.
 ‘전위예술론’을 쓴 레나토 포기올리(Renato Poggioli)가 전위운동에 요구되는 세 가지 요건으로 든, ‘그룹’, ‘선언문’, ‘기관지’를 충족시킨 선구적 그룹으로는 <논꼴>10) 과 <AG>를 들 수 있다. 
 1969년,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모토로 출범한 <AG> 11) 는 창립 이후 1973년까지 모두 세 차례의 주제전을 가졌다. <확산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가 그것이다.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 미술평론가들과 전위미술에의 첨예한 의식을 지닌 작가들이 연대한 이 단체에 이르러 한국 화단은 드디어 본격적인 전위미술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AG>와 함께 <ST> 12), <신체제> 13), <에스쁘리> 14) 등이 70년대에 첨단의 전위적 활동을 보인 단체들이다.   
 <AG>의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1967년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열린 [청년작가연립전] 15) 과 ‘신전’동인(회원: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오리진 동인(회원: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김택화, 이상락, 함섭은 불참)
이 끝난 지 이태 뒤에 출범을 본 이 그룹은 기성 그룹의 연합체적 성격을 띠었다. ‘회화68’ 그룹의 멤버인 김구림, 곽훈, 김차섭과 ‘오리진’ 그룹의 이승조, 서승원, 최명영, 그리고 여기에 김한, 하종현(회장), 박종배, 박석원, 심문섭, 이승택, 신학철 등이 가세하였다. 16)
 
 당시 전위미술계의 엘리트 작가들로 구성된 ‘AG’는 1974년에 [서울 비엔날레](커미셔너 이일)를 열면서 장차 국제전으로 발전시킬 것을 약속했지만, 그 이듬해에 김한, 신학철, 이건용, 하종현 등 4명이 참가한 정기전을 끝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Ⅶ.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AG’의 해체는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 17) (약칭 ‘현대미협’)의 결성으로 대변되는 구세대, 즉 ‘6.25세대’와 <AG>로 대변되는 신세대, 곧 ‘4.19세대’ 간의 갈등과 반목에 연루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서술에 앞서 우선 현대미협과 그 이후 세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전후(戰後)의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국전의 권위에 저항하며 ‘반(反)국전 선언’을 한 [4인전](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청년 미술운동의 첫 신호탄 격이었다. 동방문화회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1958년 11월에 덕수궁미술관에서 가진 제4회 [현대전](‘현대미술가협회’전의 약칭)에 의해 본격화되는 앵포르멜 미술운동의 발화점과도 같았으나, 정작 작품의 내용은 반구상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현대전]에서 반추상 내지는 반구상의 한계가 극복되기 시작한 것은 제4회전에 이르러서였다. 김서봉, 김창렬, 김청관,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조동훈, 하인두 등이 참가한 이 전시에서 비로소 완전한 추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회원들에게 비평적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은 방근택은 ‘한국 최초의 소위 앵포르멜의 집단적 출현’을 맞이하였다고 썼다. 18) 1960년대 초입에 들어서면서 앵포르멜은 전시장 밖으로 나가는 ‘사건’의 시기를 맞이한다. 덕수궁 담을 따라 전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1960년 10월 5일, <60년미협>의 회원인 김대우, 유영렬, 김봉태, 최관도, 이주영, 김응찬, 박재곤, 김기동, 손찬성, 윤명로, 김종학, 송대현 등과 같은 해에 결성된 <벽동인회>의 김익수, 김정현, 김형대, 박병욱, 박상은, 유병수, 유황, 이동진, 이정수 등은 다 같이 서울미대 출신들로서 수백 호에 달하는 앵포르멜 화풍의 대형 캔버스를 벽에 걸었다. 
 <60년미협>은 화단 선배인 <현대미협> 작가들에 이어 반국전을 표방하며 출범했다. 이 무렵은 ‘보리고개’가 유행하던 절대빈곤의 궁핍한 시절이었다. 1960년 4월 19일, 자유당의 폭정에 항거하며 일어난 학생시위, 즉 ‘4.19 혁명’과 이어진 사회적 혼란, 그리고 1961년 5월 16일에 발생한 <5.16 군사정변>의 와중에서 튜브 물감이 없던 작가들은 청계천 상가에서 산 안료가루에 린시드 기름을 넣고 개서 물감을 만들어 썼다. 대형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붓듯이 그린 캔버스 작업이 그래서 가능했다. 60년대 중반이 되자 앵포르멜은 점차 열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하며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된다. 1962년 8월,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이 발전적 해체와 회원 재정비를 위해 <악뛰엘> 19) 을 조직하고 창립전을 연 지 몇 년 되지 않은 6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미술평론가 이일이 “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앵포르멜은 일종의 포화상태를 맞이한다.”고 진단한 바로 그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Ⅷ.
 ‘AG’는 1974년에 <서울 비엔날레>를 치루고 이듬해인 75년에 해체되었다. 1975년은 1972년에 창립된 [앙데팡당]전을 필두로 [에꼴드서울](1975년 창립)과 [서울현대미술제](1975년 창립)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해이다. 이 무렵은 국제전을 포함, 거의 모든 미술행정이 한국미술협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자연스럽게 실험과 전위미술의 성격을 지닌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에 작가들의 관심이 쏠릴 수 밖애 없었다. 이 시기에 국제전의 행정을 독점한 미협의 국제분과는 노른자에 해당했는데, 박서보는 국제전 참여작가 선정의 권한을 쥔 국제분과 위원장 겸 부이사장의 막강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7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비엔날레]는 “전위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강령으로 삼은 이 단체(‘AG’를 가리킴. 필자 주)가 내세운 야심 찬 기획이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이일을 선정위원으로 위촉, 국제전을 지향하겠다고 약속한 이 행사는 어찌 된 영문인지 단 한 차례에 그치고 만다. 더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 단체는 이듬해에 정기전을 열었으나 이 전시에 참가한 회원은 회장인 하종현을 포함, 김한, 신학철, 이건용 등 단 4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박서보를 비롯한 ‘전쟁세대(앵포르멜)’에 대한 ‘4.19세대(A.G)’의 투항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술의 이념이나 그룹의 입장 차이가 아니라, 국제전 참가를 비롯한 여러 이권을 둘러싼, 화단 정치에 의해서 파생된 교묘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초반, 한국 화단에서 전위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왕성한 실험을 전개했던 ‘A.G’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20) 

 70년대를 풍미한 단색화는 50-60년대의 한국 전위미술사를 점유했던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을 의미한다. 귀환이란 곧 ‘되돌아 옮’을 뜻하니, 이를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로 번역하면 군사용어로 ‘탈환’이라 해도 별 무리는 아니다. 고지의 탈환‘ 만큼 예술의 사회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도 드물다. 이것이 본디 군사용어였던 ‘아방가르드(전위)’가 문화적으로 전성된 이유이다. “삶의 치열성이 곧 예술의 치열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고지’ 점령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예술 분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어느 것이든 그것이 곧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1)
 
    
Ⅸ.
 프레이저(James George Fraser)가 쓴 <황금의 가지(The Golden Bough: A Study in Comparative Religion)>란 책에 ‘다모클레스의 검’이 나오는데, 이 만큼 아방가르드의 속성을 잘 설명해 주는 일화도 없다. 권력을 상징하는 권좌에 앉은 왕(권력자)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칼이 위협하는 위기적 상황이 곧 아방가르드(전위)가 처한 상황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전위가 다음 세대의 전위에 자리를 내주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움과 도전, 그리고 저항을 생명으로 하는 전위미술의 숙명인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5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한국 전위미술의 전개에 대해 간략히 기술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가지치기의 결과일 뿐, 이외에도 저항과 도전을 속성으로 하는 전위미술의 숱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다른 책이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22)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는 점차 경제적 번영의 기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23)
 1987년, 대통령 후보인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에 의한 ‘6.29 민주화 선언’은 60년대 초반 이후 근 30여 년간 지속한 군부 통치의 종식을 의미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정치적 사건은 90년대 들어서면서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한국은 점차 성숙한 민주사회, 번영된 대중소비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이 무렵 <계간미술> 1988년 여름호에 흥미로운 특집기사가 하나가 실렸다. ‘80년대 그룹미술운동을 말한다’라는 제하의 이 특집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편집자 주(注)였다. 이를 인용하면, “70년대의 한국미술이 초기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추상미술과 구상미술,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postmodrnism), 사회정치적 미술(‘민중미술’을 가리킴. 필자 주)’이었다. 특히 ‘탈모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시기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쟁점이었다. ‘탈모던’은 주로 메타복스(Meta-Vox) 그룹(창립회원: 김찬동, 안원찬, 오상길, 하민수, 홍승일)이 주장했으며, 24) 포스트모더니즘은 미술평론가 서성록이 도입하여 주된 비평적 근거로 삼았는데, 서성록은 박모를 비롯하여 엄혁, 심광현 등 민중미술 진영의 논객들과 첨예한 논쟁을 벌였다. 
 1987년, 인사동의 복판에 있는 관훈미술관 전관에서 <뮤지엄> 창립 전이 열렸다. 이는 한국 전위미술사에서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감각을 지닌 신세대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소비산업사회의 특징인 이미지 시대의 아이들이자,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점유한 ‘발전 이데올로기’의 수혜자들이었다. 25)
 최정화, 이불, 노경애, 정승(샌정), 홍성민, 명혜경 등 <뮤지엄> 멤버들은 박물관에 대한 부정을 통해 기존의 미학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길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 나갔다. 신세대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특징은 ‘선언문(manifesto)’의 폭주를 이루었던 과거의 기성 그룹들과는 달리, ‘탈이념’, ‘진리의 부재에 대한 확신’, ‘미학적 대중주의’는 물론, 그룹의 이름마저 전시의 개념과 성격에 따라 매번 달리 정하는 등 기존 노선에서 벗어나는 ‘탈주와 해체의 노선’을 취했다. 가령, <뮤지엄> 그룹은 [선데이서울]전을 자체 기획, 매체와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켰으며, <Sub Club>은 [Under Ground](1991), [Natura Naturance](1991), [Made in Korea](1991)전을 기획, 전시회와 행위예술, 공연예술, 실험음악, 이미지 콘서트 등이 혼합된 유연한 개념의 유회를 즐겼다. 26)     
  

Ⅹ.
 전위미술은 어찌 보면 피아(彼我)의 명확한 구분이 없을 뿐, 유사한 이념과 활동반경을 지닌 다른 미술그룹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전투일는지도 모른다. 전위미술가들은 도널드 커스핏(Donald Kuspit)이 적절히 비유한 것처럼 ‘양떼를 모는 목자’일 수도 있고, 민중을 이끄는 ‘선택된 소수’일 수도 있다. 27)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전위미술사에서 80년대 초반에 벌어진 모더니즘 대(對) 민중미술의 충돌은 어쩌면 역사적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28)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예전에는 친하게 지내던 대학 동기들조차 서로 왕래를 꺼리던 80년대 초반의 상황은 어쩌면 남북분단의 고착된 상황이 낳은 후유증일지도 모르며,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의 차이가 빚은 불행한 우리의 초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은 상처를 치유하는 법이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처음으로 만난 지도 어느덧 40여 년이 지났다. 그사이 좌우의 이념대립에 따른 정치적 소요가 사나운 물결처럼 우리 사회를 여러 차례 훑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상처는 아물었는가?  
 이 지점에서 한국의 전위미술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에게 전위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의 민중미술과, 실험을 앞세워 미술의 내재적 원리를 추동한 ‘도전과 저항의 이단아들’29) 이 벌인 한판의 축제였는가, 아니면 건질 것 없는 단지 소모전에 불과했는가? 시간이 지나 수십 년 후에 후손들이 바라보는 한국 전위미술의 모습은 또 어떻게 해석될지, 그것이 궁금하다. 

1차 출처: 한국 전위미술사: 영원한 탈주를 꿈꾸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23


ㅡㅡㅡㅡㅡ

1) 옥스퍼드 20세기 미술사전, 해럴드 오즈본 편 김영나‧오진경 감수, 한국미술연구소 옮김, 시공사, 2001, 362쪽 ‘실험미술’ 항목과 365-7쪽 ‘아방가르드’ 항목 참조. 

2)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20쪽. 

3) 도록에 표기된 초대 작가 및 동인은 다음과 같다. 
   강국진, 김구림, 김영진, 김차섭, 김한용, 남상균, 문복철, 박현기, 송번수, 서승원, 성능경, 신학철, 심문섭, 여운,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이태현, 이향미, 이현재, 임응식, 정강자, 정찬승, 최명영, 최붕현, 최병소, 하종현, 한영섭, 무동인, 오리진, 논꼴, 신전동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신체제, 제4집단, Space and Time 조형미술학회(ST), 35/128 

4) Matei Calinescu, <The Faces of Modernity>, Duke University Press 1987, 윤진섭, 앞의 책, 95쪽에서 인용.  

5) <Defining Modern Art Selected Writings of Alfred H. Barr, Jr. edited by Irving Sandler and Amy Newman with an introduction by Irving Sandler,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New York, 1986, 92, 177쪽 참조. 

6) 2018년, 독일 베를린 소재 함부르거 반 호프 미술관이 기획한 [HELLO]전에 전시된 아카이브에서 필자가 확인한 내용임. 

7) 이 시기의 전위미술을 다룬 전시로는 아르코미술관 주최의 ‘이상탄생 100주년기념 특별기획전 [木3氏의 出發]’(기획 오세원 학예연구실장)이 있다. 이 전시 도록의 서문에서 김찬동 관장은 20-30년대의 전위미술 상황을 서술하면서 한국 전위미술의 상한선을 기존의 1957년 <현대미협>의 창립 시점에서 1920-30년대로 상향 조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상당히 흥미 있는 발상이다. 
   2017년에 코엑스에서 열린 [KIAF SEOUL]의 특별전에서 김노암은 고한용의 존재를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1920년대 경성에서 다다이즘을 최초로 소개한다.     

8) 대담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배윤호(중앙대 공간연출과 교수), 신범순(서울대 국문과 교수), 요시카와 나기(문학평론가), 사회: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9) 조오장(趙吳將)과 김승일(金承一), 임화(林和) 등이 펼친 1930년대 전위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서유리, <전위의식과 한국의 미술운동-1920-3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미술사학, 2007. 

10) 1964년에 창립한 전위단체로 ‘논꼴’이란 이름은 당시 무악재 너머에 있던 지명에서 유래한다. 회원은 강국진, 정찬승, 한영섭, 김인환, 최태신, 양철모, 남영희이며, <논꼴아트>라는 회지를 발간하고 세 차례의 그룹전을 가졌다. 조직에 한계를 보여 정찬승, 김인환, 강국진 등 기존의 논꼴 멤버에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가 가세하여 <신전> 그룹이 태동되었다. 논꼴은 전위 의식을 표명한 4개항으로 이루어진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은 윤진섭, 앞의 책 98쪽, 각주 78을 참조할 것.

11) ‘전위’를 뜻하는 ‘Avant-garde’의 약칭임. 

12) 개념미술과 이벤트 중심의 전위그룹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것. 
    이은주, <1970년대 한국에 나타난 개념미술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1994.
    <ST> 그룹의 회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창립동인: 김문자, 여운, 박원준, 이건용, 이일, 이재건. 2회전: 김홍주, 남상균, 성능경, 이재건, 장화진, 조영희, 최원근, 황현욱, 3회전: 김용민, 송정기, 최효주, 5회전: 강창열, 김선, 김용철, 김장섭, 안병석, 장석원, 6회: 강용대, 강호은, 김용익, 박성남, 신학철, 윤진섭, 장경호, 제7회(1980년): 정혜란, 최철환 등이 새로 가입, 참가하였다.    

13) 서울미대 출신 작가들의 모임으로 창립회원은 다음과 같다. 김창진, 윤건철, 이강소, 전창운. 1970년 에 창립하여 1976년 해체됨. 

14)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와 조소과 출신의 모임으로 전위를 표방한 그룹. 창립회원: 김광진, 김명수, 김태호, 노재승. 양승욱, 이병용, 이일호, 전국광, 황효창. 

15)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출신의 ‘무’동인(회원: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과 ‘신전’동인(회원: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오리진 동인(회원: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김택화, 이상락, 함섭은 불참)

16) 1971년에 발행한 <AG> 4호에 기록된 회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구림, 김동규, 김청정,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송번수,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조성묵, 최명영, 하종현

17) 국전의 제도적 권위와 아카데미시즘에 반발하여 결성된 재야단체로 참여작가는 다음과 같다. 
    김서봉, 김영환, 김창렬, 김청관, 김충선,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이수헌,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정건모, 조동훈, 하인두 등이며, 창립회원은 김영환, 이철, 문우식, 조동훈, 김종휘, 조용민, 김청관, 하인두, 장성순, 김충선, 나병재, 김서봉, 김창렬 등이나 다소 회원의 변동이 있었다.  

18) 윤진섭, 앞의 책, 29쪽 참조. 

19) 회원은 다음과 같다. 현대미협: 김창렬, 박서보, 하인두, 전상수, 장성순, 이양로, 조용익. 60년미협: 김대우, 김봉태, 윤명로, 김종학, 손찬성. 

20)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다음의 문헌을 참고할 것.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서진수 편저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마로니에   북스, 2015, 76-77쪽. 
    오상길 엮음.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Ⅱ-60,70년대 미술운동의 자료집 Vol. 2>, 하종현 대담,       ICS, 2001, 109-128쪽. 

21) 윤진섭, 앞의 책 78쪽에서 인용. 

22) 한국의 실험미술이나 전위미술을 다룬 필자의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윤진섭, <행위예술감상법>, 대원사, 1995
      --   <현대미술의 쟁점과 전망>, 미진사, 1997 
      --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   <몸의 언어>, 터치아트, 2009
      --   <한국의 팝아트 1967-2009>, 에이엠아트, 2009
      --   <글로컬리즘과 아시아의 현대미술>, 사문난적, 2014
   Yoon, Jin Sup, Lev Manovich, John Clark, Simon Morley, <Art Criticism in a Labyrinth>, AICA, 2014, (공저)  

23) 이 시기 이후 한국사회의 경제적 번영에 따른 전위미술의 양상과 추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의 문헌을 참고할 것. 
   윤진섭, <한국의 팝아트 1967-2009>, 에이엠아트, 2009

24) 이 시기에 등장한 실험적인 전위그룹 <난지도>(, <타라(TARA)>, <로고스와 파토스(Logos & Pathos)>, <레일리떼 서울> 등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필자의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를 참고하라. 
   회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난지도:김홍년, 박방영, 신영성, 윤명재, 이상석 등. 1985년 창립. 
   타라(TARA): 김관수, 오재원, 이훈, 1981년 창립, 1990년 9회전. 
   로고스와 파토스(Logos & Pathos): 권훈칠, 김덕년, 김주호, 김호득, 김희숙, 노상균, 도흥록, 문범, 박정환, 신옥주, 신현중, 양희태, 유인수, 윤성진, 이귀훈, 이기봉, 이원곤, 이윤구, 이인수, 장화진, 조덕현, 최광천, 최병민, 최인수, 최효근, 형진식, 홍명섭, 황현수 등. 1986년 창립. 서울미대 출신. 
   레알리떼 서울: 권여현, 김용식, 김우한, 김재광, 김종학, 김태호, 김희숙, 노상균, 문범, 박항률, 배석빈, 신장식, 안정민, 이귀훈, 이기봉, 이원곤, 이인수, 정은미, 최병기, 하동철, 한운성, 형진식, 황용진 등. 1987년 창립. 서울미대 출신 작가들의 모임. 

25) 윤진섭, 앞의 책, 211쪽. 아울러 신세대 미술에 대해서는 210쪽, 3.부정의 미학: 신세대 미술을 참고할 것. 

26) 이 시기에 등장한 신세대 미술그룹으로는 ‘뮤지엄’과 ‘Sub Club’ 외에도 ‘Coffee Coke’, ‘황금사과’, ‘New Kids in Seoul’, ‘헌화가’ 그룹 등이 있다. 각 그룹의 성격과 특징은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217쪽을 참고할 것. 
   회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Sub Club: 오재원, 김형태, 백광현, 이상윤, 구희정, 신명은, 김현근, 육태진, 홍수자, 송긍화, 이형주 등. 
   Coffee Coke: 강홍석, 김경숙, 김현근, 변재언, 이진용, 조현재. 1990년 창립. 
   New Kids in Seoul: 김도경, 김준, 김홍균, 이동기, 황선영, 강민권, 김종호, 이명선, 정희진. 1991년 단성갤러리에서 전시. 
   황금사과: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의 그룹. 이기범, 윤갑용, 장형진, 백종성, 이상윤, 박기현, 홍동희, 정재영, 이용백, 백광현 등. 1990년 2회전을 끝으로 해체. 
   헌화가 그룹: 강미경, 고승욱, 문미니, 신현진, 이봉주, 조경숙, 정혜승, 홍지연, 홍희진 등. 

27) 1969년에 전시회를 기도했으나 불발로 그친 <현실동인>을 시발로 한 민중미술 계열의 작가들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김지하가 선언문을 쓴 이 그룹의 멤버는 서울미대 학생들인 오경환, 오윤, 임세택이며, 계보적으로 볼 때 이러한 경향은 현실비판적인 경향을 띤 <현실과 발언> 그룹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현실과 발언> 창립멤버는 다음과 같다. 성완경, 원동석, 윤범모, 최민(이상 평론가). 작가: 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임옥상, 주재환. 1980년 11월 13일부터 19일까지 동산방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28) 이 두 진영이 최초로 만난 사건은 1981년 동덕미술관 주최의 [현대미술 워크숍]전이었다. 이 행사는 <ST>, <현실과 발언>, <서울80> 등 3개 그룹을 초대, 전시와 함께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그룹의 발표양식과 그 이념’을 주제로 분임토의와 주제발표회를 가졌지만, 동질성보다는 서로 다른 이념의 차이만 확인한 자리였다. 이후 약 10여 년간 한국의 현대미술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양분된 시기를 거쳐야 했다.    

29) 2018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전위미술과 한국 행위미술 50년의 역사를 돌아본 회고전의 제목으로 필자의 작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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