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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균 / 노마드여, 노마드여, 그 끝 모를 방랑이여!

윤진섭




노마드여, 노마드여, 그 끝 모를 방랑이여!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유명균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자면 뭐랄까, 광막한 대지가 떠오른다. 예컨대 아득하게 넓고 긴 어떤 초원, 아니면 끝 모를 지점을 향해 치닫는 붉은 벼랑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가?  
 유명균의 입체와 평면, 설치작업은 이러한 질문에서 비롯됐다. 그 기원을 찾아가면 우리는 그가 미국의 대륙을 유랑하기 시작한 2010년 무렵의 긴 시간대와 만난다. 다음은 이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다. 

 “최근 나는 개인적 사정으로 정처 없이 미국의 수많은 지역(남에서 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중부지역......)을 떠돌아 다닌다. 이동수단은 언제나, 몇 년 전 단돈 3,500달러로 구입한 나의 애차(수없이 고치고, 또 고치고......그래도 굴러간다. 아마, 나는 이젠 거의 중급 정비사 수준......) 그리고, 언제나 이동 중엔 차에서의 캠핑. 그리고 실감한 것은 미국은 정말 큰 땅덩어리, 가는 곳마다 전혀 다른, 경험하지 못한 자연환경이다. 그리고, 그곳들의 각각의 환경에서 보여지는 지오그래픽, 생명체의 역사......수 없는 종의 출현과 사라짐의 반복, 그리고 진화.,,,,,참으로 감동적인 지구 형성의 역사, 시간이었다.” 
-유명균, <작업노트> 중에서-       

 그러니까 유명균의 작업의 토대는 자연, 그것도 광활한 미국의 대자연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약 7년여 동안 미국대륙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현지에서 직접 채취한 자연의 산물로 자신의 감정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흙’이다. 그는 흙을 통해 우주의 기원을 상상했으며, 흙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그렇게 여행을 하던 중에 특별한 느낌을 발산하는 조지아주의 한 신비스러운 숲에서 한 줌의 흙을 채집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의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흙들을 채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반복적인 수집 과정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물으며 지구라는 행성의 길고 긴 세월을 함께 느끼고 상상합니다. 자연이라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인간과 사회, 문명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유명균, <작업노트> 중에서-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유명균의 입체와 설치작업의 근원적인 모태가 자연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흙’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지아주의 한 ‘신비스러운 숲’에서 흙을 만났는데, 그것에서 어떤 영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유명균에게 있어서 이것이 바로 창작의 계기가 되었다. 알다시피 예술적 창작은 어떤 계기가 찾아오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창작을 위한 모진 진통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예술적 창작이 흔히 임산부의 산통(産痛)에 비유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유명균에게 있어서 예술적 산통이란 과연 무엇인가? 태아의 착상에서 분만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에 비유되는 예술작품의 산출은 그에게 있어서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작가 유명균의 예술적 삶의 도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Ⅱ.
 1990년대 초반에 그린 유명균의 그림 중에 인간의 형상을 한 여러 점의 작품을 벽에 부착한 것이 있다. 일종의 설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인데, 이는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유명균 특유의 물질성이 강조된 추상화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연작은 인체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말과 같은 동물적 형상을 지니고 있기도 해서 얼핏 보기에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띤 것들인데, 일본의 가나가와 현민홀(art center)에서 전시된 이 작품들은 주로 인체의 단편을 소재로 한 것이다.

 짐승 같기도 하고 인체 같기도 한 이 일련의 작품들을 사진으로 보면서 얼핏 유명균 특유의 입체나 설치작품들의 원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벽면에 부착된 거대한 크기의 섬유로 된 설치작품들이나 공룡과도 같은 대형 입체작품들의 초기 형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어떤 미적 단서를 그 안에서 포착하게 된것이다.  

 유명균의 이 작품들은 해체된 인체의 이미지를 벽면에 산포(散布) 형식으로 설치됐다. 얼핏 보면 다리 같기도 하고 팔처럼 보이기도 하는 파편화된 이 인체의 단편들은 인체의 해체를 통해 ‘원초적 생명’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즉 하나의 소우주로도 비견되는 인체를 해부함으로써, ‘원초적 생명’의 모태로서의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그 후에 나타나게 된 일련의 추상적 입체, 설치작업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다.

Ⅲ.
 유명균의 삶은 그 자체가 ‘유랑(nomad)’이다. 이 단어가 갖는 의미를 해독하지 못하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난망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추상적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유랑생활에서 온 자연의 관찰과 그로 인한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인생에 대한 통찰, 자연에 대한 통찰, 우주에 대한 통찰이 질긴 섬유질의 마닐라삼을 풀어 난마(亂麻)와도 같은 두꺼운 층을 형성한 유명균 특유의 작품들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을 낳은 직접적인 계기는 201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 서부의 유랑생활이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기술한 것처럼 고물차를 타고 드넓은 미국의 전역을 여행하면서 유명균은 자연과 맞닥뜨렸다. 

 유명균은 미국의 서부를 유랑할 때 만난 지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그는 수억 년의 시간을 내장한 그 지층을 바라보면서 온 카와라(On Kawara/河原溫)의 작품을 떠올렸다. 알다시피 온 카와라(1933-2014)는 시간에 대해 성찰하고 매일매일의 날짜를 기록한 개념미술가였다. 그는 1966년 1월 4일부터 사망한 해인 2014년까지 <오늘(Today)> 연작을 제작한 바 있다. 

 유명균은 표면이 매우 아름다운 이 지층을 보면서 일본에서 접한 온 카와라의 작품 <백만년(One Million Years)>을 떠올렸다고 한다. 두꺼운 두 권의 책으로 된 이 작품은 1999년에 제작됐는데, 각 2001페이지에 달하는 그것은 그 안에 담긴 숫자를 읽는데만 통상 1백 년이 소요된다고 하니, 우리는 백수(白壽)를 하지 못하면 책 두 권도 못 읽고 죽는 하찮은 인생에 다름 아니다.
 유명균은 이때 인생무상을 느꼈다. 그래서 시간성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그는 자연을 보면서 우주의 시공간을 생각했는데, 온 카와라가 1백만 년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기술한 반면, 유명균은 지층을 보면서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적 시공간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그는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슬프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는 자연의 생명체이나 태어남과 동시에 사회적 존재가 되고, 역사의 한 부분으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인간적인 한계이자 숙명이지만, 안전한 영역에서 살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임에 틀림이 없다.  

 이 생생한 체험을 통해 유명균은 자유인이 되고자 결심을 한다. 그 어떤 제도, 교육, ‘사회화’를 위한 강요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평생 그리고 싶고 만들고 싶은 작품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컨대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비엔날레와 같은 통과의례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자기 생활의 충실한 기록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편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 무렵에 깨달은 삶의 성찰이었다. 유명균은 이를 위해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유랑은 그러한 삶의 중심점이었다. 

Ⅳ.
 한국인이면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 했던 IMF 시절에 유명균은 산을 다니며 건축일을 시작했다. 자연 속에서 하늘을 나는 새와 구름, 바람을 벗하며 작품을 구상했다. 유명균 특유의 섬유와 흙을 사용한 입체, 설치작업이 이때부터 서서히 발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육체노동자가 돼 주로 인테리어 일을 했다. 그러던 차에 한 갤러리와 인연이 닿았고, 작업을 재개했다. 

 “작업을 다시 하고자 하니 옛날 스타일은 마음에 안 들고 다른 것을 해야 하는데, 등산할 때 보고 느낀 여러 일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비롯하여 세상 모든 게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 산에서 본 햇볕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드로잉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보니, 서양에서 온 모더니즘 등등 그런 데 내가 발을 들여놓아야 하나. 그럼 진정 내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오감을 통해 나의 존재에 대해 표현하자. 초자연적인 감각, 산의 느낌을 순수하게 표현하자.” 
-유명균과의 인터뷰 중에서-

 IMF 시절에 유명균은 이렇게 해서 다시 작품을 시작했다. 드로잉이었다. 자기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들이 담긴 이미지들에 관한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감각의 산에 대한 느낌을 담은 그림들. 그렇다면 그런 곳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때 얼핏 대학시절 화집을 통해 본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거친 사막의 구릉들, 단순하게 표현한 갖가지 꽃들이었다. 그래, 미국이다. 가자.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곳. 미국을 향해서. 유명균의 미국을 향한 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였다. 

 여기서 이야기를 잠깐 벗어나 유명균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80년대 초반에 그는 부산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유명균은 생계를 위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트럭 운전을 하는 등 갖가지 신산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그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1991년에 제10회 [동경 오브제 대상]전에 몰던 트럭에서 만든 작품을 출품해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하리우 이찌로(針生一郞) 선생이었다. 그는 심사평에서 “물질 위주의 일본 사회에 인간의 정신성을 환기시켜 주었다.”고 썼다. 

 대상 수상작인 유명균의 <몽(夢)>은 인체의 토루소를 섬유와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재료에서 오늘날 보는 것 같은 유명균의 섬유와 종이를 근간으로 한 작품들의 원형이 느껴진다. 
 
 사회비판적 성향을 지닌 하리우 이치로 선생에게서 유명균은 일본의 잃어버린 정신세계를 배웠다. 이 무렵 유명균에게는 작업실이 없었다. 그래서 매일 공원에 나가 나무나 섬유 등속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그러자니 자연이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들어갔다. 담당 형사는 고심을 하다가 차라리 이곳을 떠나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유명균의 수상 소식이 신문에 나자 그가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안 담당 형사가 반색을 하며 아는 체를 한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일본에서 유명균은 [가나가와 애뉴얼]전을 계기로 알게 된 지바 시게오(千燁成夫) 선생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하리우 이치로 선생과 지바 시게오 선생 외에도 친분은 없지만 우연히 접한 백남준 선생의 강연 중 “예술가에게 국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예술가는 세계의 예술가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더 넓은 미적 보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유명균의 삶에서 1985년에서 95년까지 약 10년간 일본에 체류한 시절은 앞으로 전개될 예술에 대한 정신적 토양이 형성된 기간이었다. 꿈이 컸던 만큼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들으며, 찾던, 알찬 기간이었다. 이 숙성기간이 오늘날의 작가 유명균을 만든 것이다. 1980년대의 한국화단을 지배한 이른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대립과 집단화에 염증을 느낀 유명균은 그 시절 그와 동년배의 작가들이 흔히 느꼈을 제3의 영역에 대한 갈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따라서 유명균의 미국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0년대 초반에 시작한 미국생활은 2-3개월간 지속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연속이었다. 이곳저곳 인연이 닿은 곳에서 두세 달 창작 생활을 했는데, 그다음 목적지까지는 또 두세 달 여유가 있었다. 본격적인 유랑은 이때 비롯되었다. 미국에 아는 친구도 없어 혼자 다니며 언어 소통에 불편을 느꼈다. 국립공원에 머물렀다. 머물 데가 없어 고물차에서 생활하며 작업에 몰입했다. 그는 낡은 고물차로 여행할 때 얼마나 위험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멀리 가지 마라.”고 한 지인이 일러준 말을 염두에 둔 유명균에게 일본에서 배운 정비기술은 큰 도움이 되었다.  

 유명균은 미국의 국립공원을 순례했다. 위험을 피해서 혼자서 지내며 산, 하늘, 동물을 보며 인간이 뭔가, 산다는 것이 과연 뭔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유랑생활을 하며 근원에 대한 철학을 하게 된 것이다. 각종 섬유와 나무, 종이, 흙 등등 그의 작업의 토대인 천연 재료는 이러한 삶의 철학에서 나온 사유의 결과물들이다. 

Ⅴ.
 대자연에 대한 유비(analogy)로서 유명균의 입체, 설치, 회화 작업은 장엄한 느낌을 준다. 자연을 교과서 삼아 느끼고, 익히고, 체험한 결과물로서의 그것들은 관객들에게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대자연은 말이 없는 가운데 무수한 말을 건네는데, 그것들에서 어떤 감동을 받는다면 일단 자연이 보내는 신호에 감응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유명균의 <숲의 역사(The History of Forest)>, <무한한 세계(The Infinity World)>, <부유하는 세계(The Floating World)> 연작은 유명균이라는 작가의 몸을 통해 대자연이 보낸 전령사라고 할 수 있다. 

 크기가 무려 4x3x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 물체가 전시장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압도적인 모습에 관객들은 알지 못할 숭고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검게 염색한 수많은 신문지를 구겨 붙여 사각 입방체 형태로 만든 <부유하는 세계(The Floating World)>(2012년 작)는 유명균이 직접 목격한 숲이 모티브이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고목에 서식하는 애벌래(劉珫)의 집이다. 유명균은 그것을 통해 생명의 비밀, 곧 진화의 역사를 생각하게 됐다. 

 신문지 자체가 정보의 덩어리이나 곧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하나의 문명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것을 무화(無化)시키는 하나의 상징적 제스처로 유명균은 신문지를 시커멓게 염색했다. 기록의 역사,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표기되지 않은 역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 속에서 침전되는 양태를 빗댄 것이다. 

 2017년 무렵 유명균은 일련의 입체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매우 독자적인 행태를 지닌 이 입체작품들은 시커멓거나 혹은 연한 갈색의 흙빛을 띠고 있는데, 겉보기에는 어떤 식물의 뿌리나 심지어는 치렁치렁하게 굵게 딴 흑인의 검정색 머리를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이 연작들은 유명균이 버몬트나 뉴햄프셔 지방에서 본 뿌리의 뒤엉킴에서 착상한 것이다. 거대한 고목이 넘어지면 뿌리가 땅 밖으로 돌출되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게 부패하면서 식물의 새싹이나 벌레들이 동시에 공존한다. 유명균은 그러한 상황을 관찰하면서 자연의 탄생과 소멸은 동시적이며, 무의미하다는 일종의 무상감을 느꼈다고 한다. 온 카와라가 100만 년의 시간을 기록하면서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드러내려 한 것과 상통하는 작업이다. 차이가 있다면 온 카와라의 작품이 개념적인 데 반해 유명균의 작업은 물질적이며,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대지에 대한 유비(analogy)로서의 유명균의 작업은 그것이 회화가 됐든, 오브제가 됐든, 설치가 됐든지 간에 대지의 피부와 살(flesh)에 대한 진술이다. 바로 이 점이 유명균의 전 작품을 관류하는 미적 특수성이다. 압도적일 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지가 흙과 뿌리, 그리고 암석 등등 여러 자연물들의 혼합체이듯이, 그것들에 대한 모상(模像)으로서의 유명균의 작품들은 어렴풋이 그 흔적들을 내보이고 있다. 가령, 거칠고 단단하며 때로는 푸석푸석한 질감을 지닌 골짜기, 이끼가 낀 바위, 난마처럼 뒤엉킨 뿌리들과 비옥한 토양과의 결합 등등 그가 만들거나 그려내는 풍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지에 대한 찬미에 다름 아니다. 짙푸르거나 검게 표현된 유명균의 추상화와 입체, 설치작품들 또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명균의 그림과 입체, 설치작품들은 색채 면에서 볼 때 깊고 그윽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침잠된 색채의 느낌은 존재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주는 요소임에 분명해 보인다.  

 유명균의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끝이 과연 어디일지 나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는 물질을 통해 시간과 대화하고 매일 대지를 탐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거기서 받은 느낌을 관객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듯이 말이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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