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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훈 / <선비의 길>이 품은 뜻은?

윤진섭



 <선비의 길>이 품은 뜻은?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최병훈. 그는 누구인가? 4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오로지 가구 디자인에 전념하여 이 분야에서 높은 명성을 얻은 그. 그가 최근 변신을 꾀하고 나섰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소위 말하는 ‘융합의 시대’에 자기 예술의 확장을 위해 과감히 큰 행보를 성큼 내디딘 것이다. 

 최근에 올린 가장 큰 성과는 작년 말에 있었던 미국 휴스턴미술관의 신관 개관 행사의 참가였다. 미술관 측은 현대건축의 거장 스티븐 홀(Steven Hall)이 설계한 신관 건축에 맞춰 장소맞춤형 작품을 의뢰했는데, 세계적인 작가인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아이 웨이웨이(Ai Wei Wei)와 함께 그가 초청을 받은 것이다. 

 2020년 11월 21일 개관한 이 행사에서 최병훈은 <선비의 길>이란 제목의 조각작품 석 점을 발표했다. 가로 70센티에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은 인도네시아 산(産) 현무암으로 제작됐다. 이 재료는 겉은 흑갈색이지만 속은 진한 검정색이어서 차분히 가라앉고 육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말하자면 ‘침묵의 돌’인 셈이다. 

 서두에서 ‘자기 예술의 확장’이란 말을 한 것은 이 작품을 계기로 아트 퍼니처의 길을 개척해 선구자의 위치를 구축한 그가 성큼 조각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휴스턴미술관에 영구 소장된 이 석 점의 작품은 명백히 조각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향후 그의 변신이 기대된다. 

 공예와 순수미술을 가르는 기준점은 이른바 ‘쓰임(用)’이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예작품이 아무리 실험적이라 하더라도 이 기능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것은 공예의 범주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병훈이 최근까지 제작한 <태고의 잔상(Afterimage of beginning)> 연작은 여전히 공예의 범주에 머문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실험적이라 하더라도 ‘앉음(座)’의 기능을 지니는 한 그것은 ‘스툴’에 불과하다. 

 물론 최병훈의 이 작품들은 거의 순수미술에 근접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병훈이 자신의 아트 퍼니처를 순수한 예술품으로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가구의 사용자가 생활 공간에서 보내는 불과 몇 시간 동안의 실용적 기능을 충족시키기기 위해 심미적 기능이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가구가 온전히 예술작품으로 대접받는 이유이다.   


Ⅱ.
 최병훈의 작업실 한 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보인다. 대교약졸 대지약우(大巧若拙 大智若愚).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 하고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 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으뜸 가는 선은 물과 같다. 모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경구들로써 동양의 지혜를 품고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면 이 구절들은 최병훈의 작품을 감싸는 문화적 배경 막의 역할을 한다. 비유컨대, 짙은 안개 속에서 최병훈이 걸어나오는데 그 안개의 내음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을 일러 굳이 ‘동양적’이니 ‘한국적’이니 할 필요는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얼책(facebook)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매체가 세계를 한 가족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굳이 그것을 그렇게 불러야 할까? 

 이른바 문화적 보편성이란, ‘세련’의 다른 이름이다. 갈고 닦아 자신의 예술에서 지역성의 티를 털어내고 수준높은 보편합일의 어떤 미적 경지를 이루는 것. 그것이 세계적으로 소통 가능한, 소위 문화적 경쟁력인 것이다. 그러할 때 최병훈이 이제까지 갈고 닦은 아트 퍼니처의 성과는 다수의 초대전을 통해 그 국제성을 입증해 주었다. 뉴욕에 있는 프리드만 벤더(Fredman Benda)<2014, 2016>와 프랑스 파리의 라파누어 갤러리 다운타운(Laffanour Gallery Downtown)<2015>의 초대전들이 그것이다. 이번 휴스턴미술관의 초대는 이러한 성과들이 집약된 결과이다. 

 최병훈의 작업실에는 그가 틈틈이 붓글씨를 쓰는 큰 책상이 있다. 그의 일획(一劃)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2014년 프리드만 벤더 갤러리 초대전의 타이틀이기도 한 이 ‘일획’은 이 무렵 그의 아트 퍼니처 개념이 오롯이 함축된 용어이다. 마치 긴 검정색 칼집을 돌 위에 비스듬히 얹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은 선과 점으로 요약된다. 먹을 듬뿍 묻힌 붓으로 단번에 그은 최병훈의 일획 드로잉은 바로 이 주욱 그은 선과 그 밑을 받치는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도네시아 산(産) 현무암으로 만든 이 아트 퍼니처 연작들은 일획의 드로잉에서 보는 것처럼 반질반질하게 윤기 나는 검정색의 긴 원통형 몸체로 돼 있다. 그 밑을 구형 혹은 입방체의 꾸밈없이 소탈해 보이는 받침돌이 고이고 있다. 

 이 <태초의 잔상> 연작은 최병훈의 아트 퍼니처 개념을 오롯이 품고 있다. 앉으면 벤치가 되고(用), 그냥 바라보면 순수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즉, 공예와 조각, 실용과 순수의 경계에 위치한다. 하나 덧붙이자면 그의 작품은 장자(莊子)가 말하는 ‘무용(無用)의 용(用)’, 곧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이라고나 할까, 텅 빈 듯 하면서도 가득 찬 듯한 역설의 미학을 담고 있다. 


Ⅲ. 
 가구 디자이너로서 최병훈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중재하는 ‘개입자’이다. 개입하되 중재할 뿐, 조작하거나 조정하려 하지 않는다. 작위적인 것은 가능한 한 피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이 개입의 미학을 잘 나타낸 작품이 2015년에 제작한 일련의 돌로 만든 테이블들이다. 인도네시아 산 현무암으로 만든 이 작품들의 한 가운데는 움푹 패어 있고 까맣게 보이는데, 그 속에 주변의 풍경이 담겨 있다. 나무와 숲, 그리고 구름과 하늘이 보인다. 그 자연스러운 자태라니! 
 옛날의 선비들은 먹, 붓, 벼루, 종이 등 문방사우(文房四友)와 함께 수석(壽石)을 가까이 두고 그 정취를 즐겼다. 바로 그 수석과 강원도 원주 거돈사지의 불상대좌에서 받은 감동에서 휴스턴미술관에 영구 소장된 <선비의 길>이 나왔다. 수석(壽石)은 또한 수석(水石), 즉 돌과 물이 함께 해야 제격이다. 최병훈의 <잔상(Afterimage)>에서 돌과 물이 함께 하는 이유이다. 돌과 물은 모두 자연의 일부이니, 그것들을 바라보매, 물에 주변 풍경들이 비치는 데서 관조(觀照)가 이루어지고, 그럼으로써 높은 정신의 품격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른바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이룬 상태에서 발현되는 관조는 작품을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감상(鑑賞)과는 그 태도에서 사뭇 다르다. 

 최병훈의 <선비의 길>은 명백히 조각품이다. 그것은 형태나 기능면에서 그의 전공인 공예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최병훈으로서는 이번 작품을 계기로 작업의 개념과 범주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 그는 이번 작품을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먹과 붓으로 드로잉을 하고 모형을 만들었다. 구불구불 자연스런 유기적 형태를 갖춘 추상조각 <선비의 길>은 숭숭 구멍이 뜷려 있되 그 구멍은 인체에 뿌리를 둔 헨리 무어(Henry Moore) 식의 구멍이 아니라, 수석(壽石)의 문화적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가구 전공의 목공예에서 출발한 최병훈에게 있어서 수 십년 간 나무를 통해 익힌 자연의 본성은 곧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을 넓혀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른바 예술이 폭넓은 인문(人文)을 통해 나오는 이치이다. 예술을 인격 수양의 방편으로 삼았던 동양의 문인화적 전통이 서양의 인문학(humanities/artes liberales)과 만날 때, 더욱 높은 수준의 보편적 가치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최병훈의 작품세계를 통해 그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퍼블릭아트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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