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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단아의 실험과 도전, 그리고 전위의식의 확산

윤진섭

영원한 이단아의 실험과 도전, 그리고 전위의식의 확산

윤진섭(미술평론가)

Yoon Jin Sup


Ⅰ.  

 이승택, 그는 과연 누구인가? 지난 60여 년간 한국 미술계에 숱한 화제를 몰고 오면서 전위예술의 외길을 걸어 온 이승택이 이제 90년에 걸친 긴 생애에 정점을 찍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을 갖는다. 이 전시는 노경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원로작가에 대한 헌정(獻呈)의 의미를 띤 것이면서 동시에 예술가로서 험난했던 과거의 족적을 대표작들을 통해 살펴보는 뜻 깊은 자리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특히 행위예술(performance)과 관련한 이승택의 작업을 살펴보고자 한다. 글을 쓰기에 앞서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근 70년에 가까운 이승택의 예술적 도정에서 행위예술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상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승택의 경우 행위 즉, 퍼포먼스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고 이를 적용시키느냐 하는 관점에 따라 그 대상과 폭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택 하면 통상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행한 미술의 범위나 개념은 상당히 넓고 다양하다. 학부시절에 조각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비(非)조각’을 주장하는가 하면, ‘반(反)예술’에 심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오래 전에 나는 이승택을 가리켜 ‘영원한 이단아’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야 말로 반골기질에 뿌리를 둔 미술에 있어서 미개척 분야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이승택의 반골정신과 실험의식, 도전정신을 잘 나타내 주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보았다.” 작가 자신이 만든 자각상(自刻像)(1991)에 붙은 침구에 적어놓은 이 문구는 그것이 상징하듯 작가로서 자나 깨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경구가 된 듯 하다. 세상의 사물과 사태를 “거꾸로 본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나 존재 양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존재에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예술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승택의 회고에 의하면, 이러한 자각을 하게 된 계기는 여럿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컸던 것은 출품작의 낙선과 관련된 것이다. 1956년, 국전에 지하여장군, 천하대장군이란 제목의 한 쌍의 조각품을 하나의 대좌 위에 진열했는데, 당시 한 심사위원이 이를 낙선시키고 훗날 정작 자신은 한 좌대 위에 두 조각품을 진열, 최대의 화제작을 만들어냈다1). 이 사건은 청년 이승택이 기성의 미술계를 불신, 국전을 외면하고 평생 재야작가로 활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오늘의 이승택이 있게 만든 요인은 낙선과 관련된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던 것이다.   

 기성세력에 대한 불신과 거부, 저항은 정신적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반대급부로서의 창의력과 결부된다. 그것은 어쩌면 청년작가 이승택에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삶의 기로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비장의 승부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빼어난 묘사력과 사물을 똑같이 만드는 손재주가 있었다. 1932년 함경남도 고원(高原) 생인 이승택은 소년시절에 해방공간의 고향에서 김일성의 흉상을 만들어 고액의 사례금을 받을 정도로 조각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훗날 이승택이 동상조각을 비롯한 조형물 제작으로 생계를 잇는데 바탕이 되어주었다. 즉, 이승택은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음껏 예술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Ⅱ   

 이승택의 행위예술은 주로 그가 평생을 추구해 온 ‘비조각’, ‘반예술’의 개념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것이 동시대의 다른 행위예술가들의 행위작업과 차별되는 점이다. 즉, 행위작업만을 위한 구상을 따로 하지 않고 ‘비조각’의 연출에 자연히 따라붙는 식의, 일종의 보조적 개념이랄 수 있다. 이를 테면 연기, 불, 물, 바람, 모래, 흙, 안개, 기타 비물질의 기체 등등 비조각 혹은 반조각적인 재료들을 사용해서 설치 혹은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 작업을 할 때 행위성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이승택 퍼포먼스의 개념 설정에 유보 사항을 둔 이유이다.  그러나 이승택의 퍼포먼스가 반드시 그런 양태를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가령, 이승택이 1999년 12월 31일에 홍대 앞에 있는 씨어터 제로에서 열린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전에서 발표한 퍼포먼스는 ‘비물질’과 관련이 없다. 이 행사에서 그는 주둥이 부분에 커다란 남성기가 달린 녹색의포도주 병에 막걸리를 담아 관객들에게 나누어주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승택은 객석을 돌아다니면서 관객들에게 일회용 컵을 나누어 주고 막걸리를 가득 부었는데, 여성 관객들이 받아마실 때에는 객석에서 환호가 터지기도 했다.  

 이른바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이승택의 실험정신은 ‘에로틱 아트’ 경향의 많은 작품들을 낳았는데,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에서 발표한 이 작품도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과정된 남성기의 제작과 이를 활용한 작품들은 사진을 결과물로 남기기도 하지만, 출연자들을 섭외하고 사진을 찍는 과정 자체가 퍼포먼스이다. 2012년 작인 <예비신부들의 기념촬영>(210x430cm)은 지나치게 과장된 거대한 남성기를 손에 든 17명의 여성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이처럼 도발적이며 에로틱한 주제의 작품은 이승택의 작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 가운에서 압권은 <천사의 구두>(100x80cm, 구두, 오브제, 1980)인데, 한 쌍의 검정색 긴 여성용 부츠의 굽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거대한 남성기를 부착한 작품이다. 이승택은 앞의 [난장, 밀레니엄 퍼포먼스 1999-2000]에서도 이 오브제 작품을 목에 걸고 퍼포먼스를 했다.   

 이승택은 한국실험예술정신이 주최한 2010년 [비보이 퍼포먼스 페스티벌]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뒷모습을 확대하여 오려낸 거대한 사진을 들고 나와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는 상체를 벗은 상태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여체 하반신 사진을 어깨에 메는가 하면 손으로 번쩍 드는 등 다양한 행위를 하였으며, 퍼포먼스 중간에 거대한 남성기가 달린 와인병에 막걸리를 담아 관객들에게 따라주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사진 속의 벌거벗은 여체의 하반신을 얼기설기 엮은 로프의 자국이다. 이 로프로 사물을 묶는 작업은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는데, 책, 인체, 나무, 돌, 지폐 등등 다양하며, 그 기원은 1958년 작 <역사와 시간>에서 U자 형태의 몸체에 둘둘 감긴 철조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Ⅲ. 

 그렇다면 한국행위미술사에서 이승택이 차지하는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한국 행위미술의 시작을 <가두시위>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발표된 1967년으로 삼을 때2), 이승택은 이 시기에 명백히 해프닝 혹은 기타 다른 형태의 퍼포먼스를 발표한 적은 없다. 기록에 의하면, 행위와 관련된 이승택의 작업은, 퍼포먼스의 개념을 유연하고 폭 넓게 적용했을 때,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그림들>(1964년 원안, 1974년 실행)이다. 이승택은 이 작품을 발표한 곳을 마포로 기억하고 있으며, 당시 세 사람이 동행해서 도와주었다고 증언했다 3).이 작품은 세 개의 나무판 위에서 맹렬히 불이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한강을 유유히 떠내려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와도 연관되는 작업이다. 애슐리 로링스(Ashley Rawlings가 아트 아시아 퍼시픽(Art Asia Pacific) 2010년 7/8월 호에서 크게 다룬 이 작품은 훗날 80년대 후반의 불작업의 원형이 된다. 당시 한강은 보안상 중요한 방어진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한강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신변상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이승택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크리스마스 날을 거사일로 잡아 실행에 옮겼다.  

 이승택의 증언에 의하면, 60년대 당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몬도가네>와 같은 해외의 진기한 것들에 대한 기록 영화나 극장에서 본영화 상영 전에 틀어주는 <대한뉘우스>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로 귀착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동의 유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둥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60년대 후반 당시 이승택은 연령상으로 10년 정도 차이가 나는 후배 작가들인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과 교류는 있었으나 해프닝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으며, 김구림, 이건용, 이강소 등과는 <AG> 그룹 활동을 통해 친분이 있었더라도 김구림이 주도한 <제4집단>이나 이건용이 주도한 <ST> 그룹과는 무관했다.   

 초기 한국행위미술사에서 이승택의 이름이 보이지 않은 것은 이런 사정에 연유한다. 그가 중요한 행위미술작가로 부각되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전이다. 이 전시의 도록에는 이승택의 1971년 작인 <바람-민속놀이>, 1974년 작인 <하천에 떠내려 가는 불붙은 그림들>, <지구행위>(1989, 포토 몽타주) 등이 소개되고 있다.4) 이승택의 한국행위미술사에서의 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2018년 한국행위미술 50주년을 기념하여 대구미술관이 주최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한국 행위미술 50년 : 1967-2017]에서 70년대와 90년대 이후의 기록들이 보완되면서 행위미술사상 중요한 작가로 각인이 되었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고 실험정신이 강한 이승택은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매사 예사로 보지 않으며, 길을 가거나 여행을 하다가도 눈에 들어오는 신기한 장면이나 사물이 있으면 즉석에서 사진을 찍거나 기록을 해 둔다. 이른바 ‘개입’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류의 작업들이 이승택의 전체 작품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작가 찰스 레이(Charles Ray)의 작품 <가족>을 이용한 것이다. 네 개의 마네킹이 서 있는 이 작품은 [19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에 출품된 것인데, 이승택은 맨 왼쪽 남자상의 성기를 손으로 만지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전시장에서, 1989, 휘트니비엔날레+행위). 이런 류의 작품은 많다. 가령, <미국문화, 1993>는 서양풍의 민속의상을 입고 있는 여자 마네킹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행위이고, <중국문화>는 만리장성에 서 있는 갑옷 입은 병졸의 갑옷 속으로 손을 넣는 행위이다. 이러한 류의 ‘개입’적 행위작업은 <목구(木口) 놀이>(1968)가 보여주는 ‘사유화(私有化)’ 작업과 함께 이승택의 중요한 작업 유형이 되고 있다. 일종의 대지미술과도 비견되는 이 사유화작업은 인삼밭을 비롯하여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흙더미 위에 거대한 비닐천을 덮고 그 위에 수 백 개의 흙이 든 비닐 주머니들을 눌러놓은 구조물을 작품화하는 등등 일종의 순간 포착에 기인한 특유의 창작방법론을 낳았다. 그럴 때마다 작가는 작품의 대상이 되는 풍경의 한 구석에 빠짐없이 등장하여 목격자 혹은 자기증인화하는 재치를 발휘한다. 


Ⅳ.  

 1989년, 경기도 장흥의 토탈미술관에서 행한 불 행위 내지는 분신 행위는 이승택이 그동안 행한 어떤 작업보다도 규모가 큰 대형 퍼포먼스였다. 그는 토탈미술관의 야외전시장 곳곳에서 다양한 불 퍼포먼스를 행하였다. 자신이 만든 로프 작업, 천 작업, 두상 작품을 이용하여 기름을 붓고 불사르는가 하면 등신대 크기의 거대한 자각상을 불태우는 등 정화(淨化)와 관련된 일종의 제의적 퍼포먼스를 장소를 옮겨다니며 행했다. 그는 건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다양한 불작업을 펼처거나 솜으로 만든 구름 형태의 구조물을 벽에 붙인 뒤 분방한 필치의 드로일을 한 다음, 불태우는 행위를 했다. 이런 류의 불 퍼포먼스는 2009년에 경기도도자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열린 국제퍼포먼스 [Ceramic Passion]에서 행한 거대한 불 작업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이승택은 십 수 미터에 이르는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장대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이승택은 <지구행위>라는 제목의 고무풍선 퍼포먼스에 주력했다. 아마도 횟수로는 가장 많은 퍼포먼스가 바로 이 <지구행위>일 것이다. 직경이 3미터와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고무풍선 표면에 위성사진에서 보이는 지구의 모습, 즉 흰구름이 유유히 떠가는 모습을 정교하게 그린 고무풍선에 바람을 집어넣고 남녀노소 등 다양한 관객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즐겁게 밀고 다니는 행위를 통해 작가 이승택의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이 포착된다. 이승택은 이 <지구행위>를 1990년대 초반, 수원의 컴아트 그룹 전시를 필두로 2000년 [서울국제행위예술제]와 일본의 사이타마, 중국의 베이징, 독일의 베를린 등지에서 행했다. 


Ⅴ.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지구의 환경과 생태의 위기가 운위되는 요즈음 일찍이 이 문제에 주목하여 작업으로 부각시킨 이승택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는 1990년대부터 지구행위를 비롯하여 이끼 심는 작업, 녹화 작업 등등 거대한 규모의 대형 설치 및 행위 작업을 통해 지구의 환경오염을 둘러싼 문제와 생태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예술화하는 작업을 오랜 기간에 걸쳐 펼쳐왔다.  이승택의 지난 60여 년 간 전위정신에 바탕을 둔 실험작업은 90을 넘긴 지금에 이르러서야 깊은 공감과 함께 신뢰를 얻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테이트모던을 비롯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은 이승택을 국제적인 반열의 거장으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에 상응하는 실력과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퍼포먼스 역시 이승택의 전체 작품세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행위작업은 오브제, 설치, 회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미술장르를 아우르고 있는 이승택의 전체 작업을 긴밀히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위적이며 강한 실험정신을 쏟아 붓는 중요한 매체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승택의 작업에서 퍼포먼스를 제외하면 그 의미와 힘이 크게 반감될 만큼 비중이 매우 크며, 전위정신을 표출하는 주요 원천이 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전 도록>

 


1) 이승택, <나의 실험미술 55년, 그 모험적 과정들>, SEUNG-TAEK LEE 1932-2012 : Earth, Wind and Fire, 성곡미술관 전시도록, 2012, 181쪽

2) 무동인, 신전동인, 오리진 등 세 그룹의 연합체인 청년작가연립전이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때이다. 이 시기에 이승택이 퍼포먼스를 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승택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청년작가엽립전]을 본 기억이 있다고 밝혔다. 아시아문화전당 발행, <해프닝과 이벤트 : 1960-70년대 한국의 행위예술>, 2014, 이승택은 이 자리에서 청년작가연립전 전시는 본 적이 있으나,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벌인 <한강 변의 타살>은 못 봤다고 말했다. 한편, 무동인의 회원이었던 이태현과 김영자는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이승택의 행위작업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2020. 8. 13). 

3) 이승택, 앞의 책, 219-221쪽 참조. 4) 이승택의 퍼포먼스 작업과 관련하여 하나의 난점은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록물이 없는 점이다. 즉, 발표년도나 장소,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기사 등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보도를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71년의 <바람-민속놀이>, 1974년의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그림들>(1964년 원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경우에는 작가의 기록과 증언, 사진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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