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대전 현대미술의 서곡(序曲): 행위미술과 대전트리엔날레를 중심으로

윤진섭

대전 현대미술의 서곡(序曲)
-행위미술과 대전트리엔날레를 중심으로-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대전시립미술관이 70-80년대의 현대미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광자진취((狂者進取) : 대전미술 다시쓰기 7080]전은 시기적으로 볼 때 매우 시의적절한 전시회이다. 그 이유는 최근 들어서 각 지역의 공립미술관들이 미술사적인 입장에서 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운동을 정리하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적극적 움직임 1) 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소장품을 중심으로 기획전을 꾸몄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있으나, 한 시기의 미술 흐름을 소장품을 중심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소장품 수집을 둘러싼 장기적인 방향의 설정과 함께 당대 미술을 해석하는 미술관의 학예적 관점이 확립돼 있어야 소장품 중심의 전시 기획이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일관된 체계가 없이 중구난방으로 작품을 수집해 왔거나, 특정한 미술 사조나 경향에 치우쳤다면 미술사적인 관점에서의 전시기획은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의 기획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주최 측의 발언을 들어보자.  


 “<광자진취 : 대전미술 다시쓰기 7080>은 대전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중 1970~80년대 대전미술의 흐름을 살펴보는 작품들로 구성하여 개최한다. 이 전시는 대전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을 통해 대전미술사를 다시 정립하고자 개최하는 연례전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80년대 대전미술의 주요한 쟁점이 되었던 미술활동과 미술관 소장품을 연계하여 전시하고 소장품 수집과 자료 수집으로 확장하여 향후 대전미술사의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고자 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사항이 본 전시 기획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대전미술사의 정립, 둘째, 1970-80년대 대전미술의 주요 쟁점과 미술활동의 파악을 위한 ‘자료체(body of data)’로서의 소장품에 대한, 전시와 연구를 통한 미래지향적 연구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의 정체성 확립 등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향후 소장품을 비롯한 각종 아카이브 수집 정책의 방향성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대전시립미술관은 소장품을 활용한 이러한 류(類)의 전시를 연례적으로 실행해 나간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사업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바탕으로 한 매우 책임감이 있는 전시기획 행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글 속에 그러한 소장품 수집의 의도와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고 여겨져 다시 인용한다.  

 “작품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은 미술관의 중요한 기능이자 주요 임무다. 동시대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며, 수집된 내용에 따라 지역과의 연결을 증명해 줌으로써 한 시대 역사를 기술하기도 한다. 대체로 어떤 종류의 소장품을 수장하고 있는지는 미술관의 성격을, 얼마나 훌륭한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미술관의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대전미술 다시쓰기’는 소장품을 통하여 미술관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문제는 ‘인식’이다. 전시기획이란 행위를 수행함에 있어서 문제의식을 갖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 나타난 결과는 판이하다. 그러할 때 미술관의 성격과 위상을 규정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알게 모르게 소장품 수집의 철학이 스며들게 된다. 그것은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어떤 종류의 소장품인가(성격), 얼마나 훌륭한 소장품인가(소장품의 질에 따른 위상) 하는 질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또한 체계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소장품 수집이 뚜렷한 방향성과 원칙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미술관의 성격이 형성되며, 그러한 성격은 다시 정체성의 내용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큐레이터가 단순히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느냐 아니면 지성인의 위치로 상승하느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단순히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그치면 그 사람은 한낱 지식인에 불과할 뿐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창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의미있는 전시로 승화시키면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한 독서와 사색, 창의적 사고, 풍부한 현장경험이 필수적이다. 


Ⅱ. 
 그렇다면 이번 전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 미술관 측이 제공한 전시기획 자료에 의하면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섹션_1. 1970~1974 | 태동, 대전에 현대미술이 움트다
섹션_2. 1975~1979 | 생장, 자생과 변혁의 대전미술
섹션 3. 1980~1984 | 도전, 새로움을 향하여
섹션 4. 1985~1989 | 확산, 대전미술의 지평을 넓히다.  

 
이 중에서 이 글의 집필 범위에 해당하는 항목은 섹션 2-4 이다. ‘대전 행위미술의 태동에서 ’대전’87청년트리엔날레’의 결성과 실행에 해당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소 그 범위가 넓은 편이다. 그러나 전시의 소주제와 시기는 그렇다 치고 이 글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작가들의 본격적인 활동 시기는 섹션 2의 출발점인 1975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전에서 행위미술(performance art)의 시작은 ‘19751225’ 그룹의 결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그룹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하게 고찰한 바 있기 때문에 2) 이 자리에서는 다른 행위미술제에 관한 소개와 더불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때는 1975년 12월 25일 정오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대전역 광장에 일단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숭전대학교 미술교육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들인 이종협과 정장직, 정길호 등 세 사람은 12시 오포(午砲)에 맞춰 행위를 시작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의 상황을 알기위해서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본다.   


 “애초에 참여하기로 했던 정길호가 불참한 가운데 이종협과 정장직은 1975년 12월 25일 정오, 대전역 광장에서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행위를 벌였다. 제4공화국의 삼엄한 군부통치 하에서 억눌린 감정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이들은 대전역 광장에 미리 가져간 종이를 여러 장 펼쳐놓고 양 팔을 벌려 소리를 지르거나, 바람에 날리는 종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주변에서 구한 돌을 올려놓는 등 즉흥적인 행위를 벌였다.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들의 이상한 행동에 호기심이 발동한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와중에 누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세 차례나 출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오포 소리에 맞춰 묵념을 올렸다. 언론통제를 비롯하여 검열, 통행금지에 의한 이동의 부자유, 사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 경범죄 단속과 같은 사회적 억압, 반공을 둘러싼 좌우 간의 이념 갈등 등 모든 것이 억압된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고자 한 즉흥적 행위였다.


 경찰이 물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작가 왈, “예술하는 거다.”, 경찰이 말했다. “이게 무슨 예술인가? 모이면 큰 일 나니, 어서 빨리 가라.”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이라 당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대전역 광장 맞은편에 있는 사진관의 사진사를 불러 급하게 찍은 사진 몇 장이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3)

 
 당시 이들이 벌인 행위는 1975년 이건용에 의해 ‘이벤트’로 명명된 행위가 벌어진 미술계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빠른 편이었다. 물론 이들의 행위를 가리켜 ‘해프닝’으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70년대를 관류했던 ‘이벤트’로 불러야 할지 주저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명칭 여부를 떠나 그 시절에 대전 지역에서 행위미술이 시도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국 현대미술제의 효시가 되는 [대구현대미술제](1974)에 이벤트가 등장한 것이 1977년임을 감안할 때 4) 대전에서 벌어진 이들의 행위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종협의 증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당시 자신은 같은 해에 서울에서 이건용이 자신의 행위가 ‘이벤트’임을 선언하고 일련의 행위를 벌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사전을 찾다가 우연히 사건을 의미하는 ‘이벤트(Event)’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명칭을 1975년 12월 15일에 벌어진 행위작업에 붙였던 것은 아니다. 이 명칭을 밝힌 것은 1976년 홍명미술관에서 열린 [19751225]의 창립전에서 였다. 이 용어는 제1회전 팸플릿에 기록돼 있다. 5)

 이 전시는 대전역 광장에서 첫 행위를 벌인 이들이 이듬해인 1976년 1월 18일 대평리에서, 그리고 역시 같은 해 2월 15일에 내탑에서 일련의 행위를 벌인 후 보고회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들은 이 전시의 팜플렛에 ‘이벤트(Event)’란 용어를 명기했다. 6)
 
 그 다음에 살펴봐야 할 것은 ‘대전 ’78세대‘의 활동상이다. 이 그룹은 목원대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창립전 참가작가 중에서 신현태(한남대)와 이종봉(강원대)을 제외한 강정헌, 김익규, 김철겸, 송일영, 안치인, 장금자, 정상희, 지석철, 최덕희, 최병규 등이 목원대 출신이다. 이듬해에는 이두한, 이재우, 김영호, 진정식(이상 목원대), 홍현표(강원대, 임근우(충남대)가 가담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에서 왜 유독 목원대 출신들이 행위미술의 중심이 되었을까? 대전 행위미술의 첫 발자국을 내디딘 ‘19751225’ 그룹이 숭전대(훗날 한남대로 개칭)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70년대 후반 들어 비롯된 ‘대전’78세대‘의 등장은 행위의 본격적인 확산을 의미한다. 한남대에는 70년대 초반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들이 모여 결성한 전위 그룹 ‘신체제’ 출신의 김수평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반면에 목원대에는 ‘A.G’ 그룹의 멤버인 김한 교수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A.G’와 함께 1977년 한국 현대미술계를 풍미한 전위그룹 ‘S.T’의 리더인 이건용이 강사로 목원대에 출강하게 되면서 목원대는 현대미술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되기에 이른다. 7) 즉, ‘대전 ’78세대 멤버들은 김한과 이건용의 제자 세대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목원대 출신의 안치인과 이두환, 그리고 배제대 출신의 문정규 등은 70-80년대의 공간에서 행위미술 분야에 지속적이고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벌였다. 

 한편, 1980년 11월 6일부터 22일까지 공주 금강 백사장에서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 참여한 작가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고승현, 고창환, 강희순, 곽남신, 김관호, 김영호, 김용익, 박인규, 신동국, 송일영, 안치인, 오자영, 유근영, 유동조, 유병호, 이종협, 이정훈, 이윤구, 이은철, 임동식, 장금자, 정장직, 정길호, 정광호, 정덕영, 조성모, 지석철, 허진권, 홍명섭, 이 모(이정훈) 등 30명에 이르는데, 이는 일부 서울작가를 제외하면 모두 대전의 작가들이다. 8)

 이 행사의 도록에 서문을 쓴 임동식의 기록에 의하면 미술제 운영위원회가 위임한 홍명섭과 임동식에 의해 기획, 진행, 작가선정이 이루어졌다. 9)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여 행위작업을 했는데, 고승현은 폭 2미터, 길이 4킬로미터의 원통형 비닐에 모래를 채워나가는 작업을 1주일에 걸쳐 수행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김용익은 금강 백사장 일부를 삽으로 판 뒤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집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관한 연구’를 묻는 개념미술 경향의 행위를 했다. 이종협은 텔레비전 수상기 2대를 가져와 모니터 부분에 거울을 대체한 뒤 한 대는 모래밭을 비추고 다른 것에는 강물을 비치게 했다. 조상영이 쓴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에는 이 당시의 행위를 기록한 사진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는데, 앞서 언급한 작가들 말고도 고창환, 곽남신, 김관호, 박인규, 신동국, 오자영, 유근영, 유동조, 유병호, 이윤구, 임동식, 정덕영, 정장직, 조성모, 지석철, 허진권 등등의 자연친화적이며 개념미술적인 경향의 현장 행위작업을 볼 수 있다.


Ⅲ. 
 행위미술과 관련된 70-80년대 대전 작가들의 활동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 첫째, 1975년에 결성된 ‘19751225’ 그룹, 1978년에 결성된 ‘대전 ’78세대‘ 그룹, 그리고 1980년에 창립전을 가진 뒤, 훗날 ’야투(野投) 그룹과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모태가 되는 ‘금강현대미술제’ 등이다.  10)

 대전에서 퍼포먼스, 설치, 입체(오브제). 회화, 드로잉 등등 다매체에 주목하여 1978년 이래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온 작가로는 안치인을 꼽을 수 있다. 11)

 이 안치인이 주도하여 ‘대전 ’87 청년 트리엔날레가 결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도록에 명기된 운영위원의 명단을 보면 강덕기, 강정헌, 문정규, 박관우, 안치인, 양충모, 정길호, 정장직, 황영기가 등재돼 있다. 진행위원은 고현희, 김기권, 박천욱, 송일영, 신영일, 이훈웅, 전일국이며, 커미셔너로는 독일에 임봉규, 인도에 이진숙, 일본에 유병호, 대만에 곽소종의 이름이 보인다. 

 이 트리엔날레가 결성되기까지에는 서울 미술계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못한 지역작가들의 애환과 열망이 담겨 있다. 그러한 요구란 과연 무엇일까? 대전작가들이 뭉쳐 주체성을 희구하면서 ‘대전 사수’를 외치기에 이른 것이다. 12) 그리고 그러한 염원은 국내에서 1981년의 부산국제청년비엔날레에 이은 ‘대전’87청년트리엔날레‘의 개최였다. 이는 민간에 의해 결성된 역사상 두 번째의 행사였다. 13) 당시의 정황이 다음의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운영위원을 보면 대전’78세대 멤버 중 목원대학교 쪽에서 강정헌, 안치인(운영위원장), 양충모, 신영일, 르뽀에는 박관우, 19751225 멤버 중 한남대 쪽에는 정길호, 정장직, 배제대학 쪽엔 문정규, 김기권이 있었죠. 그러니까 대전의 초창기 그룹이 다 집결한 겁니다. 하지만 트리엔날레 운영이 어려워 운영위원이나 진행위원들에게 50만원씩 운영비를 내라고 한 경우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습니까. 다들 어려운데.....(중략) 외국작품은 대형작품도 있었고, 메일아트 형식으로 작품을 보내오기도 했었습니다.” 14)    


 이러한 국제전 결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이건용이었다. 이때 그는 군산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대전에 제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관계로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전언에 의하면 이건용은 ‘대전‘78세대’ 작가들에게 해외작가들과 국제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트리엔날레 개최를 종용했다고 한다. 도록의 서문을 쓴 사람도 이건용이었다. 

 이 짧은 지면에서 7년간에 걸친 ‘대전트리엔날레’의 긴 역사적 과정을 다 기술하는 것은 무리이다. 15) 그러나 이 행사는 대전에서 민간에 의해 치러진 첫 국제전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비록 1년 뒤에 창설한 광주비엔날레처럼 규모가 크고 유명작가와 큐레이터들이 초대된 명망있는 행사는 아니었지만, 3년에 한 번 열리는 ‘트리엔날레(Triennale)’의 형식을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81년, 부산에서 청년작가들이 주축이 돼 창설한 ‘부산청년비엔날레’에 이어서 대전의 젊은 작가들이 순수한 열정으로 뭉쳐 추진한 이 트리엔날레는 비록 명망있는 국제전은 아니었지만, 광주비엔날레 이후에 비엔날레의 폭주 시대를 맞이한 한국 국제전의 역사에서 개척기를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전시립미술관 기획 [광자진취((狂者進取) : 대전미술 다시쓰기 7080]전 도록>

ㅡㅡㅡㅡㅡ
1) 이들 전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현대미술의 태동-시대정신전](대전시립미술관, 2018. 1. 19-3. 11),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1부 한국의 아방가르드미술:1960-80년대의 정황, 2부 한국 행위미술 50년, 1967-2017](대구미술관, 2018. 1. 16-5. 13), [어느 누가 답을 줄 것인가-1980-1990년대 청주미술](청주시립미술관, 2017. 11. 9-2018. 2. 18), [1980-1990년대 수원의 실험미술-그것은 그것이 아니다](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017. 6. 6-2017. 9. 3), [경기천년도큐페스타](경기상상캠퍼스, 2018. 9.10-10. 31), [시점(時點) 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미술운동](경기도미술관 기획전시실 2019. 10. 29-2020. 02 02)

2) ‘19751225’ 그룹의 활동과 전개에 관해서는 필자의 기발표글 <한국 행위예술의 흐름과 대전의 새로운 미술운동-[19751225] 그룹의 활동을 중심으로, 대전시립미술관 세미나 자료집>를 참고할 것. 

3) 윤진섭, 앞의 글에서 인용. 

4) 조선일보 1977년 5월 3일자. “전국서 모인 100여명의 해프닝, 모래성 쌓은 후 소주 마시고 나무에 못박아 외투 걸기도” 

5) 이종협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브 클라인의 해프닝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행위를 해프닝으로 부르기에는 다소 저어되어 1975년 12월 15일에 벌어진 대전역 광장의 행위는 명칭을 정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윤진섭, 앞의 글에서 인용. 

6) 당시 발행한 팜플렛에는 대전역 광장의 행위작업 사진이 누락돼 있다. 이 두 곳에서 벌어진 이벤트에는 ‘19751225’의 회원인 이종협, 정장직, 정길호 외에 ‘르뽀’ 그룹의 회원인 유근영이 참가했으며, 내탑 행위에는 정장직이 불참하고 서진호, 유근영, 이종협, 정길호가 참여한다. 두 번째 행위는 내탑에서 이루어졌다. “역시 한 겨울이었다. 서진호, 유근영, 이종협, 정길호 등 네 명의 행위자들이 내탑에서 두 개의 행위를 선보였는데, 첫 번째는 자갈로 이루어진 언덕 중턱에 11개의 나무기둥을 세운 뒤 크기가 서로 다른 종이를 감고 불을 붙이는 행위였으며, 그 결과가 설치미술로 남는 작품이었다.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야외 설치미술은 훗날 1981년에 결성된 [대성리전]과 [야투]에 빈번히 등장한다는 점에서 설치미술의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윤진섭, 앞의 글에서 재인용. 1975년 12월 25일 결성된 ‘19751225’ 그룹은 1992년에 마지막 전시를 치르고 해체된 비구상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멤버에는 정길호, 이종협, 정장직, 신동국, 유병호, 이정훈, 이창인, 윤주용, 심재구, 최장한, 방효성, 신현대, 함상호 등 13인 이었다. 조상영,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다빈치기프트, 2009, 40쪽. 한편, 조상영의 기록에 의하면 정작직, 이종협, 정길호 등 ‘19751225’ 그룹의 멤버들에게 행위미술에 관한 정보를 주고 직접 행위할 것을 종용한 사람은 유근영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조상영, 앞의 책 47-49쪽을 참고할 것.  

7)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재학생의 신분(1975-1979년)으로 'S.T‘의 멤버로 활동한 나는 이 무렵 이건용의 대전과 관련된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다. 당시 나는 이대입구 굴레방다리 육교 옆에 있던 ’이건용 화실‘에 자주 들렀으며, 1977년의 어느 날 김한이 찾아와 이건용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우연히 동석하게 되었다. 이건용의 목원대 출강은 김한의 권유에 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나는 1979년 5월 군에 영장이 나와 논산훈련소로 가는 도중에 대전의 비래리아파트로 이건용을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추억이 있다. 아무튼 전위미술에 대한 소신과 이벤트에 대한 작가적 소명감을 가지고 있던 이건용이 목원대에서 후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8) 당시 발간된 금장현대미술제의 표지는 모래밭에 ‘錦江現代美術)祭’라고 손가락으로 쓴 사진(홍명섭 글씨)을 실어 이 행사가 자연미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암시했다. 

9) 조상영, 앞의 책, 133-140쪽.. 

10) 그 외 이 시기의 중요한 행위미술 행사와 작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78년 12월 30일 대천해변에서 78세대 현장작업. 참여작가 : 강정한, 김철겸, 안치인, 송일영, 최병규, 임근우, 장금자 등.  
1981-1.2회 야투현장미술제/공주, 설치, 행위 약 20명 중 행위:안치인.이두한.나경자.강정헌등 1982 - 안치인.이두한 이벤트/대전문화원 &야투현장미술제/공주 금강 1980- 대전78세대 현장이벤트/신탄강변-안치인.송일영.최병규.지석철.김익규 1980. 11. 16-22 창립 금강현대미술제/공주금강,설치 행위중 행위;안치인.송일영.김영호.김용익등 1981-2회 금강현대미술제/대전문화원 30명중행위;안치인.유동조.이두한.이기재.홍현표 1981-대전78세대 현장이벤트/대전문화원-안치인.강정헌.김영호.김익규.김철겸.송일영,신현태.이두한.지석철등 
1986-대전 실험작가회 현장퍼포먼스/공주-안치인.송일영1986-6인의 퍼포먼스/대전 중앙갤러리-안치인.이두한.문정규.한건준등 
19878-대전 ’87행위예술제, 쌍인미술관, 이건용, 이훈웅, 김준수, 김용문, 고상준, 조충연, 강정헌, 김정영, 윤진섭, 방효성, 이이자, 문정규, 박창수, 심철종, 전일국, 안병석, 한건준, 안치인, 이두한
1987-대전 트리엔나레/행위;안치인.윤진섭.김해민.박창수.김준수 
한편, ‘금강현대미술제’에서 ‘야투’를 거쳐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이르는 긴 역사적 도정은 이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11) 대전 현대미술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서술한 책으로는 조상영의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이 있다. 이 책에 안치인의 활동에 대한 서술은 매우 빈약한 편이다. 그 이유는 조상영도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안치인이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러한 서술의 내용과는 달리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이건용이 조직한 ‘’86설치행위예술제‘(1986, 아르꼬스모미술관)에서 안치인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친교를 맺어 온 까닭에 그의 행적과 활동에 대해 소상히 아는 편이다. 특히 ’대전 ‘87트리엔날레’가 창설된 87년을 전후하여 대전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진행과정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당시 이 행사에 행위작가로 참가한 바 있다. 조상영이 쓴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에도 당시 사정이 소상히 나타나 있다. 조상영, 앞의 책, 210-212족.   

12) 조상영, 같은 책, 210쪽 참조. 

13) 국내 미술계에서 비엔날레의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전위그룹 ‘A.G’가 1974년에 주최한 ‘서울비엔날레’였다. 그러나 장차 국제전으로 도약할 것을 선언한 이 행사는 미술평론가 이일을 커미셔너로 위촉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1회전을 끝으로 단명하게 되고 이듬해에 ‘A.G'마저 해체되기에 이른다. 

14) 김기권과의 인터뷰. 조상영, 앞의 책. 210쪽에서 인용. 

15)‘대전‘87청년트리엔날레’라는 공식명칭이 ‘청년’을 ‘대전트리엔날레’로 바뀐 것은 한 해를 미루고 개최한 ‘대전‘91트리엔날레’에 이르러서 이다. 이 국제전은 기금 관계상 아쉽게도 ‘대전‘94트리엔날레’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