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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그 서럽고도 슬픈 전설의 이야기

윤진섭

진달래꽃, 그 서럽고도 슬픈 전설의 이야기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진달래의 작가 김정수가 잠시 캔버스를 벗어나 디지털 이미지로 작업한 움직이는 진달래꽃을 선보인다. 선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그가 이제까지 십 수 년 간 작업을 해 온, 그래서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진달래꽃을 소재로 한 유화작품과 함께 새롭게 개발한 다수의 미디어 아트 작품이 출품될 예정이다.

 작업실에서 대형 비디오 모니터 화면을 통해 그의 애니메이션 미디어 아트 작품을 감상했다. 허공에서 화사한 연분홍색 진달래꽃이 떨어져 바구니에 소복이 쌓이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꽃잎이 떨어져 바구니 안에 쌓이거나 주변에 떨어져 이루어지는 꽃잎의 양태에 변주를 가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서정적이며 정갈한 분위기의 화면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미디어 아트 작품이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고객이 고가의 캔버스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미디어 아트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형식의 대표적인 매체인 캔버스를 비디오 모니터로 대체한 움직이는 디지털 미디어 아트 작품의 등장인 셈이다. 이로써 관객들은 정지된 진달래꽃이 아니라 움직이는 진달래꽃을 통해 기존의 그림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다른 애니메이션 특유의 독특한 감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보다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작업에 기울이는 그의 노력은 예술작품에 대한 대중적 향수체험의 확산을 불러오는 긍정적 효과를 낳게 될 전망이다. 

 

Ⅱ.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학부시절부터 김정수는 회화의 재료적 실험에 푹 빠져있었다. 내가 당시 종로에 있는 그의 화실을 찾았을 때, 그는 모래를 이용한 추상작품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그는 미대 입시생을 지도하기 위한 화실 옆방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해 놓고 작업을 했다. 그는 체로 친 가는 모래를 나이프로 캔버스 바탕에 고르게 바르고 그 위에 채색을 했는데, 그 그림은 색을 두서너 가지로 제한한, 약간 서정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패턴의 유채작품이었다.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1982년도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1). 군대에서 제대한 내가 대학원 회화과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홍익대 중앙도서관 자유열람실에 있는데, 검정색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그가 내게 다가와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미술회관에서 열릴 [도큐멘터]전의 기획자로서 전시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작가들 명단을 보니 이름이 익숙한 비슷한 또래들이었다. 초대 예정 작가가 100여 명이 넘는 매머드 급 전시였다. 그 전에 그는 [앙데팡당]을 비롯하여 [겨울 대성리 31인 창립전] 등 실험적인 경향의 전시에 참가하였는데, 그 무렵은 미협 중심의 제도권 미술에 저항한 청년작가들이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작품을 작가들이 중심이 돼 기획한 전시에 출품하던 때였다. 한국 화단에 민중미술 바람이 대대적으로 확산된 것은 그로부터 이삼 년 뒤였으니 매우 어수선한 시국이었다.

 그 뒤로 김정수의 모습은 화단에서 보이지 않았다. 소문에 듣자니 그는 도불하여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파리에 사는 누군가를  만났더니 김정수가 파리 모 백화점의 이사가 돼 벤츠를 타고 다니는 성공을 했다고 전해주었다. 이렇듯 김정수의 삶에는 신출귀몰하면서도 약간 신비스런 구석이 있었다.

 그러구러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인사동을 걷던 내가 김정수를 다시 만난 것은 2005년 무렵이었다. 그는 완전히 귀국했다고 말했다. 보여줄 것이 있다는 말에 마침 근처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들르니 웬 판판한 돌 조각에 진달래꽃잎을 그린 소품들이 놓여있었다. <진달래꽃-이 땅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연작이었다.  검은 들판으로 보이는 축축한 대지 저 편에 연옥색 하늘이 , 그 사이에 예닐곱 개의 연분홍빛 진달래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하늘을 보니 슬프다.’고2) 한 것처럼 애절한 슬픔이 묻어나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김정수는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이름이 난다는 것은 작가로서 성공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의 아마포에 유화로 그린 진달래꽃 그림이 인사동 화랑가 여기저기에서 보이고, 국내외 아트페어에서 고객들이 선호하는 그림으로 꼽히기 시작했다. 

 밑칠을 하지 않은 생 아마포 캔버스 위에 유채로 그린 김정수의 <진달래꽃>은 색은 화사하지만 ‘왠지’ 모르게 슬픈 그림이다. 그것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 주는 연정의 느낌과는 약간 다른 슬픔이다. 그것은 아마도 밥이 소복이 담긴 밥공기를 연상시키는 꽃바구니에서 오는 정취일 것이다. 가슴 밑바닥에서 저며 오는 아픔을 극복하고 승화시킨 뒤에야 나타나는 그런 슬픔, 그런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애상의 슬픔이 김정수의 그림에는 담겨 있다. 어머니라는 존재,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녀와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오롯이 담겨있는 정취가 그런 근원적인 슬픔의 진원지로 여겨진다.

 김정수의 <진달래꽃> 연작의 요체는 어디선가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꽃잎의 존재감에 있다. 그것은 하늘일 수도 있고 가슴 속 ‘어딘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시공을 가리킨다. 세월이 가면서, 즉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물을 바라볼 때의 느낌이 각기 다른데, 그런 삶의 구체성이 추상성을 띠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김정수의 진달래꽃 그림인 것이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분리되는’ 심리적 아픔은 밥공기의 주변에 마치 섬처럼 떠있는 꽃무더기로 표상된다. 바다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아무런 칠도 돼 있지 않은 아마포의 텅 빈 공간 그 자체가 마치 추상으로서의 바다처럼 보이는 것이다. 화사한 꽃 무더기가 섬으로 표상되는 것은 회화가 지닌 신비스런 작용의 결과이다.

 김정수는 얇은 점판암에 그린 진달래꽃 연작에서 출발해서 도시 풍경 위의 허공에서 떨어지는 진달래꽃(<진달래꽃-기억의 저편> 연작)을 거쳐, 동양화풍의 황량한 벌판 위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진달래꽃-축복> 연작)에 이르렀다. 그 후 이천 육년에 들어서면서 슬픔을 극복하고 예의 밥공기에 철철 넘치는 진달래꽃(<진달래꽃-축복>)에 당도했다.

 이제 김정수는 진달래꽃을 소재로 한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품을 실험하면서 새로운 국면의 전환을 시도한다. 캔버스에 붙박이로 정지된 진달래꽃이 아니라 하늘하늘 떨어지는 과정과 마치 눈이 쌓이듯 밥공기에 소복소복 쌓이는 진달래꽃의 자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이 실험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가슴 속에 지금은 잃어버린 추억 속 과거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바란다.


1) 김정수와 나 사이의 개인적인 인연을 밝히자면 1977년 내가 제6회 [앙데팡당]전 출품작인 <어법>을 제작할 때 그가 사진을 찍어준 사실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퍼포먼스로 한글의 ‘아, 어, 이, 에, 오’ 등 기본 음절을 발음하는 입 모양과 글자를 쓰는 장면을 사진을 찍어 인화한 후 같은 사이즈의 패널로 만들어 잇대어 붙인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에 건 것이었는데, 이 때 얼굴 모습은 성능경 선생이, 글자를 시멘트 바닥에 쓰는 장면은 김정수가 활영을 했다. 당시 촬영은 홍익대 교정(사대 건물 앞)에서 이루어졌다.     

2) 대전에 사는 작가 안치인의 말이다. 그가 최근에 대전의 보문산 유원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문득 하늘을 보며 그랬다. 이때 그의 말은 완벽한 한편의 시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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