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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80년대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윤진섭

1960-80년대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윤진섭(미술평론가/전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면 우리는 그 파도를 맞이하기 위해 바짝 긴장하죠. 이 파도란 놈이 어찌나 거칠고 센 지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나 두 번째 파도가 밀려올 때쯤이면 우리는 지나간 파도를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지나간 파도는 이미 힘이 다 빠져버렸으니깐요. 우리에게 중요한 순간은 파도와 부딪힐 때입죠. 왜냐구요? 지나간 파도는 죽은 것이지만,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파도야말로 지금 내가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될 살아있는 놈이기 때문이죠.”

                                   -Jonathan Funk 著, <<한 어부의 이야기>> 중에서-

  

Ⅰ. 한국 아방가르드의 출범과 전개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전위(avant-garde)’에 대해 논하게 될 이 글은 하나의 시론(試論)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이 용어야말로 다분히 논쟁적이며 용례에 따라 그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함의를 지닌 문화적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그 기원은 유럽의 긴 문화사로부터 출발한다. 이 말은 특히 불어권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는데, 본래는 전쟁용어에서 출발했으며 중세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1)

 특히 이 용어는 시간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H.R 야우스의 정의에 의하면 근대를 의미하는 ‘모던(modern)’은 “오늘의 것과 어제의 것 사이, 시시각각의 새로운 것과 옛것 사이의 경계”를 표시해 주는 말이다.2) 여기서의 경계란 일종의 구획을 의미하며, 이는 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의 각기 다른 신념을 구분시켜 준다. 가령,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여, 구한말의 단발령에 맞서 머리를 자르느니 차라리 목숨을 바꾼 수구파와 흔쾌히 단발을 받아들인 개화파의 예가 그것이다.

 또한 이를 공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일정한 방향성을 지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전위(前衛, avant, fore)’라는 단어에서 ‘앞(前)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 용어가 전쟁에서 출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앞에서 지켜(前衛)’ 나아가는 별동부대, 다시 말해서 척후조는 뒤 따라오는 본대(本隊)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칠 각오가 돼 있는 특수한 집단인 것이다.

 이를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세력은 그 특유의 호전적 자세, 비타협주의, 과감성, 도전의식, 시간과 전통에 대한 승리의 확신 등을 무기로 구세대를 위협”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티로부터 진보의 개념을 차용한 아방가르드는 혁명정신을 토대로 하여 정치적 문화적으로 급진적인 노선을 걸어왔다.3)

 이상의 사항을 토대로 한국 현대미술사를 살펴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아방가르드의 출현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도출된다.

  ‘새로운 이념’이란 무엇인가? ‘이념(ideology)’을 가리켜 “사회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계급 또는 당파의 이해를 반영하는 일정한 관념과 견해 및 이론의 체계”4)라고 할 때, 그러한 ‘새로운 이념’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때는 과연 언제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본 시론의 핵심이다. 앞에서 인용한 문구를 다시 반복하자면 “특유의 호전적 자세, 비타협주의, 과감성, 도전의식, 시간과 전통에 대한 승리의 확신 등을 무기로 구세대를 위협”한 전위 의식의 출현을 전위예술 운동의 계보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5)

 그렇다면 과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나는 이미 졸저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일제하의 추상미술과 전후의 추상미술을 구분짓는 뚜렷한 차이점은 집단적 운동이다. 1930년대에 태동된 일제하의 추상미술이 몇몇 작가의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1950년대 후반의 그것은 이념적 배경을 지닌 집단적 데먼스트레이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걸쳐 전개된 앵포르멜을 아방가르드 운동의 효시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6)

 

  예술가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 그들은 집단의 힘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 운동이 지닌 집단적 양상이다. 그들은 집단의 힘을 빌려 기성의 가치에 도전하는데, 그럴 때 거기에는 의당 이념의 문제가 따른다. “이념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한다면 아방가르드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사회에 대항하는 자기주장 내지 방어의 논쟁”7)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아방가르드적 이념이란 “그 자체가 지지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혹은 예술적 선언들의 사회적 내지 반사회적 성격에 기인하는 사회적 현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심리학은 곧 집단의 심리학이기 때문에 아방가르드가 문학적, 문화적, 예술적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 연구”8)의 대상에 가까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9)

 한국 현대미술사상, 전후 앵포르멜은 ‘운동’을 근본으로 현대적 집단화의 원리를 추종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낸 최초의 사례에 해당한다. <현대미협>, <60년미협>, <벽동인회>, <악뛰엘>10)과 같은 앵포르멜 운동의 주체세력들은 비록 자신들의 주장을 담아 배포할 기관지를 발행하지는 못했지만, 각기 선언문을 통해 이념의 핵심을 드러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세상에 공포하고 미술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걸쳐 나타난 한국 전위미술의 서술에 있어서 그 동안에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연대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은 이처럼 짧은 논고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장(章)에서는 6.25전쟁의 산물인 앵포르멜 운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고, 그 이후에 나타난 청년작가들의 예술적 반동에 대해 서술한 다음, 70년대 초반에 소위 ‘단색화(Dansaekhwa)’란 이름으로 재등장한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에 대해 잠시 언급함으로써, ‘단절과 지속’으로 얼룩진 초창기 한국 전위미술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발언해 보고자 한다.

 연령적으로 볼 때, 앵포르멜 운동의 추진세력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출생에 해당한다. 이들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장유유서(長幼有序)’와 엄격한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유교적 사회질서 속에서 보냈으며, 정치적으로는 일제강점이 낳은 억압과 정신적 치욕, 민족적 수난을 겪으며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좌우익 간의 이념대립과 전대미문의 ‘6. 25 전쟁’이 빚은 참화는 이들로 하여금 인간과 이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에서 태동된 앵포르멜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이 낳은 참화를 궁핍한 사회 현실에서 추상적 화풍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물자가 부족한 현실에서 이들은 청계천에서 구한 안료가루를 린시드 기름에 개서 천막 천을 활용한 대형 캔버스에 들이 부었다. 이들은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을 모태로 창설된 국전(國展)에 저항하며, 새 시대의 이념 표현에 걸맞는 새로운 미학을 주창하고자 했다. 유럽에서 건너온 앵포르멜과,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미군의 군화에 묻혀 들어온’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구상풍의 보수적인 국전에 대항하기에 적합한 화풍이었다.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작품에 나타난 특유의 거칠고 폭발적인 제스처는 대형 화면에서 몸을 매개로 정신을 투사할 수 있는 적합한 매개물처럼 보였다.11) 당시 이들의 선언문에 나타난 허무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삶에의 의욕12)은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감돌던 실존주의 사상의 산물이었다.

 이들 전쟁세대에 저항하여 나타난 것이 60년대 중반의 소위 ‘4.19 세대’에 의한 반동이었다. 이들은 캔버스라는 제한된 매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13) 전쟁세대가 한글보다는 한문과 일본어에 익숙한 반면, 4.19 세대는 근본적으로 한글세대였다. 전쟁세대가 참전을 경험한 반면, 대부분의 4. 19세대에게 있어서 6. 25 전쟁은 유년시절에 겪은 희미한 추억에 불과했다. 훗날 4. 19세대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의 주체세력으로 떠올랐을 때, 전쟁세대는 선전 출신의 국전세대와 때로는 불편한 동거를 유지하며 파리비엔날레와 상파울루비엔날레 등등을 비롯한 국제전에 나가는 등 화단 내에서 기득권층으로 부상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앵포르멜 세대(전쟁세대)의 제자뻘인 4.19 세대가 탈(脫) 캔버스를 시도한 것은 ‘새로운 의식을 새 부대에 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무’, ‘신전’, ‘오리진’ 동인으로 구성된 [청년작가연립전](1967. 12. 11-17, 국립중앙공보관)의 등장은 10년간에 걸친 앵포르멜 화풍의 퇴조인 동시에 구세대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뒷 세대가 앞 세대를 치는 아방가르드의 속성상,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60년대 후반 화단의 정황에 대한 평자들의 공통적인 지적은 앵포르멜의 점진적인 쇠퇴를 둘러싼 여러 현상들과 관련된다. 1957년을 앵포르멜의 기점으로 간주할 때, 10년이 지난 뒤에 나타난 미술계의 정황은 이미 지리멸렬한 기색이 농후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혼란된 사회상과 궁핍한 시대상을 화폭에 담았던 앵포르멜 세대의 저항의식이 무뎌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앵포르멜 운동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했고, 충만했던 도전의식이 점차 매너리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도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해외로부터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새로운 미술사조에 대한 정보가 이러한 쇠퇴를 촉발시킨 주요인이었다. 앵포르멜 역시 해외의 정보에 의존한 미술운동임에 분명하지만, 60년대 후반의 정보 채널은 이보다 더욱 다변화돼 있었고 정보의 취득이 훨신 용이했다. 뿐만 아니라 앵포르멜 세대들이 일본어 교육을 받은 계층임에 반해 60년대와 70년대의 미술을 주도한 세대는 한국어에 보다 익숙했던 점도 세대 간의 단절을 야기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단절은 곧 새로운 언어의 등장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청년작가연립전]에서 비롯된 새로운 사조의 대두는 필연적이었다.”14)



 ‘탈(脫)캔버스’에서 비롯된 기존 회화에의 반란은 예술과 일상의 결합을 통한 ‘반(反)예술’적 태도를 드러냈다. <무>와 <신전> 동인을 주축으로 한 해프닝15)과 네오다다 풍의 오브제의 등장(이태현, 김영자, 최붕현, 임단 등), 팝적 오브제와 이미지(정강자, 심선희, 최붕현, 정찬승 등), 구체음악과 일상적 소음의 도입(진익상) 등등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의 등장은 화단에 충격을 줌과 동시에 대중적 관심을 이끌어 냈다.16)

현실참여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보다는 오히려 [청년작가연립전]의 오프닝 날인 1967년 12일 11일 밤 10시부터 벌어진 ‘가두시위’가 본령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행동하는 화가’, ‘생활 속의 작품’, ‘추상이후의 작품’ 등 미술과 관련된 것에서부터 ‘국가발전은 예술의 진흥책에서’, ‘현대미술관 없는 한국’, ‘4억의 도박 국립종합박물관’ 등 문화정책에 이르기까지 미술과 문화행정의 개선을 촉구하는 이들의 피켓시위는당시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미술의 본질적인 문제를 떠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자 한 이러한 현실참여의 입장은 비록 온건한 형태이긴 하지만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형태로 읽혀질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감안할 때 그렇다.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린 이 해는 ‘5.16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 한 해 전에 공표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해 나가던 때였다. 전주공업단지와 구로동 수출공업단지의 준공 등 거대한 경제 프로젝트들이 속속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으며, 외환보유고는 이미 3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부정선거로 인한 소요는 전국을 들끓게 했으며, 정부당국은 이처럼 어수선한 정국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한 공작정치의 산물인 동백림 사건을 발표, 또 다시 사회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이른바 윤이상, 이응노 등 국내외 교수, 학생, 예술인 등 315명이 연루된 대남공작단 사건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바캉스와 레저라는 말이 유행하여 [청년작가연립전]에 출품한 심선희, 정강자, 김영자 등등의 팝아트 풍의 입체작품을 미학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17)   

 1960-70년대의 해프닝은 70년대의 이벤트에 비해 정치적 성향을 훨씬 더 띠고 있었다. 현실참여(앙가쥬망)의 측면에서 볼 때, <무>와 <신전> 동인에 의한 ‘가두시위’에서 출발한 사회 풍자 내지는 정치적 성향의 해프닝은 이듬해에 벌어진 ‘한강변의 타살’(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1968. 10. 17, 서울 제2한강교 밑)을 비롯하여 김구림과 정찬승, 방태수가 행한 일련의 해프닝들, 즉 ‘콘돔과 카바마인’(1970. 5. 15,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 ‘육교위에서의 해프닝’(1970. 5. 16, 신세계백화점 앞 육교)과,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김구림, 정찬승, 정강자, 진익상 등, 1970. 8. 15, 사직공원-태평로) 등으로 이어진다.

 1970년대를 점유한 단색화와 입체, 설치, 이벤트가 미술에서의 형식과 매체를 문제삼은 본질주의적 측면18)을 지니고 있다면,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사회에 대한 현실풍자 내지는 비판적 성향을 지닌 일련의 해프닝들은 비본질적임과 동시에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1980년대 초반에 태동된 민중미술이 보여준 것과 유사한 ‘정치적 아방가르드’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지난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행위미술1967-2007](8. 24-10. 28)은 그동안 미술계의 변방에서 이루어진 행위미술이 제도권에 진입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1994년에 열린 [민중미술 15년전]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중에서 매우 인상적인 전시였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볼 때 행위미술이야말로 민중미술과 함께 기존의 미술 제도에 대해 강한 ‘안티(anti)’적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이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 제도권 미술에 대한 이의제기였다고 한다면, 행위미술은 기존 미술의 언어에 대해 형식파괴적인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비록 그 내용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아방가르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급진성은 이 두 경향을 관류하는 공통적 성격으로 기존의 미학을 해체하고 공격하는 데 그 주요한 목적을 두고 있다.19)



실제로 이 무렵 해프닝에 참가한 행위예술가들은 경찰에 연행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의 오프닝 날 밤에 이루어진 피켓시위 도중, 이 해프닝에 참가한 <무>와 <신전> 동인들은 종로경찰서로 연행이 되었다.20) 또한 1970년 8월 15일 정오, 선언문 낭독을 마치고 관을 꽃으로 장식한 다음 <제4집단>의 상징기인 흰색 깃발을 앞세우고 광화문을 거쳐 한강으로 가던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의 해프닝 참가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에 걸려 연행이 된 일화는 이 일련의 해프닝이 표방한 급진적 성격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벌인 ‘한강변의 타살’(1968)은 문화 테러리스트로서의 일면을 잘 보여준 사례라 주목된다.



 “<한강변의 타살>은 정치적 내지는 사회적 데먼스트레이션이라기보다는 타성에 젖어 그릇된 행태를 보이고 있던 기성 미술계를 겨냥한 문화비판적 성격이 짙은 시위였다. 아마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합당한 수식어는 ‘문화 테러리스트’일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급진적이다. 비록 공격의 목표가 국전을 겨냥한 것이긴 했지만, ‘사기꾼’, ‘기피자’, ‘부정축재자’ 등등 그들이 사용한 단어의 이면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군대 기피자를 비롯하여 경제 사기꾼, 정치적 부정축재자와 같은 사회의 기생충을 환유하는 사회적 비판의 형식을 띤다. 문화부정축제자의 정체는 국전심사를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사이비 대가’일 수 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정치적 힘을 빌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부정축재자에 대한 풍자인 동시에 고발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매장하고 그 위에 물을 끼얹는 행위를 통해 사회에서 부정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식(儀式)을 집전한 것이다. 그들은 앞서 인용한 문장들이 적힌 비닐을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부정부패를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자신들의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해프닝은 그런 그들의 의도를 대중에게 보여주기에는 지나치게 난해한 예술적 형식이었다. “바람 부는 한강다리 밑에서 비닐에 불을 지르곤 “죽이고 싶다. 모두!”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실험미술가들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는21) 한 신문의 보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행위미술과 대중 사이에 여전히 괴리감이 존재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22)  



 그러나 문화테러리스트로서의 이들의 해프닝이 과격한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경찰의 연행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이 엄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들의 행동이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술인들은 장발이나 미니스커트의 착용 등 퇴폐풍조의 조성을 빌미로 경범죄 처벌을 받을지언정 작품의 내용이 문제가 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 무렵 해프닝을 주도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행위는 당시의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급진적으로 보였지만, 문학의 래디컬리즘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23)     

    

Ⅱ. <A.G>, <S.T>의 등장과 전위의식의 확산

 1970년대에 접어들면 정국은 더욱 가파르게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한다. 1971년 4월 27일, 박정희 후보의 제7대 대통령 당선을 필두로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에는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이 있었다. 대학에 휴교령이 발표되고 신문, 통신에 대한 사전검열제가 실시되는 가운데, 급기야는 정부의 헌법 개정안 공고와 함께 동년 11월 21일에는 개헌국민투표를 실시, 찬성 91.9%로 동 개정안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유신헌법의 제정이었다. 박정희 후보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당선, 12월 27일 취임과 동시에 유신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른다.24) 

1970년대 공간에서 <A.G>(‘avant-garde’의 약칭, 1969년 창립)’와 <S.T>(‘space & time’의 약칭, 1969년 ‘S.T미술학회’로 출범) 그룹은 서울대 출신의 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신체제>25)와 함께 전위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그 중에서 특히 <A.G>는 “전위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하고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표방하며 결성된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회원들은 동명의 기관지를 발행하고 선언문을 공포하는 등 전위그룹으로서의 당찬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26) 김구림, 김차섭(<회화68>그룹), 서승원, 최명영(<오리진> 그룹), 김한, 하종현, 박종배, 박석원, 심문섭, 이승택, 신학철 등을 창립회원으로 하고 여기에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 평론가들이 가세하여 형성된 <A.G>27)는 당시 화단의 최정예 멤버들이었다.28)

 ‘A.G’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세 번에 걸쳐 테마전을 가졌다. [확산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가 그것이다. 이 그룹은 ‘A.G’라는 동명의 회지를 발간, 미술잡지가 귀한 당시의 미술계에 최신의 서구 미술이론을 공급, 현대미술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29)

 1974년에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비엔날레]30)는 차후에 국제전을 열 것을 목표로 이 단체가 내세운 야심찬 기획전이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이일을 선정위원으로 위촉, 향후 국제전을 지향하겠다고 약속한 이 행사는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차례에 그치고 만다.

 이 단체는 이듬해에 정기전을 열었으나 이 전시에 참가한 회원은 회장인 하종현을 포함, 김한, 신학철, 이건용 등 단 4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박서보를 비롯한 ‘전쟁세대(앵포르멜)’에 대한 ‘4.19세대(A.G)’의 투항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술의 이념이나 그룹의 입장 차이가 아니라, 국제전 참가를 비롯한 여러 이권을 둘러싼, 화단 정치에 의해서 파생된 교묘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초반, 한국 화단에서 전위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왕성한 실험을 전개했던 ‘A.G’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31)

 애초에 미술을 연구하는 모임으로 출범한 <S.T>는 학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건용이 운영한 동양미술학원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진 회원들은 미학을 전공한 김복영의 이론적 지원 아래 지적 훈련을 쌓아 나갔다. 회장인 이건용을 위시한 초창기 멤버들은 개념미술의 정전으로 간주되는 조셉 코주스의 ‘철학이후의 미술’을 비롯하여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 등등 당시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친 글들을 텍스트로 삼아 연구해 나갔다. 이들은 서양의 현대미술에 관한 이론서는 물론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와 같은 평론가의 비평문을 비롯하여 구조주의, 언어학, 노장사상 등 광범위한 인문적 교양을 쌓았다. <S.T> 그룹32)이 이러한 학습 과정을 거친 배경에는 당시 서구로부터 유입된 개념미술의 영향이 컸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가교 역할을 한 이우환의 영향은 비단 <S.T> 그룹의 멤버들뿐만 아니라 화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일본 모노파(物派)의 활동에 관한 정보가 ‘미술수첩’이나 ‘미즈에’와 같은 잡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한국의 입체, 설치미술의 전개에 그 파급력이 높았다.

 <S.T>의 초창기 회원들 가운데서도 특히 이건용을 비롯하여 성능경, 김용민, 장석원이 보여준 일련의 이벤트 작업은 특기할만 하다. 맨 처음 이벤트란 용어를 사용한 이건용은 사건의 논리적인 측면에 주목하여 자신의 이벤트를 ‘Event Logical’로 명명하였다. 그는 ‘장소의 논리’, ‘손의 논리’, ‘건빵 먹기’ 등 일련의 이벤트를 발표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나무둥치를 사각입방체의 흙덩이와 결합한 입체작품 ‘신체항’을 발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작품을 구사하였다. 성능경은 1974년에 ‘신문읽기’를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언론이 통제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한 이벤트 및 설치작업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진보적 저항의 제스처를 보여준 성능경의 ‘신문읽기’ 이벤트, ‘S씨의 반평생’과 같은 사진을 이용한 개념적 경향의 작업은 훗날 성완경과 같은 민중 평론가에 의해 국제전에 초대되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김용민은 ‘걸레짜기’와 같은 동어반복적 행위를 보여주는 이벤트와 입체, 설치작업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작가이다. 이들은 노장사상과 선불교에 심취, 단순한 행위를 통해 ‘말되어질 수 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 장석원과 함께 ‘4인의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33)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은 특정한 그룹의 업적을 기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위적 활동을 둘러싼 집단 대 집단 간의 공방, 화단내의  정치적 관계와 입장, 그룹의 진로와 향방에 따른 회원들 간의 이합집산 등 다양한 심리적 내지는 이념적 관계를 살피는 데 있기 때문에 작품을 둘러싼 미학적 논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브제와 설치, 이벤트 등 당시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에 등장한 매체와 방법론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생략하고자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1960년 중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실험미술 내지는 전위미술의 활성기에 과거 화단의 헤게모니를 거머쥐었던  앵포르멜 세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단색화’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화단의 중심으로 복귀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Ⅲ.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과 단색화의 등장 

 한국의 단색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과 함께 당시 화단의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다소 장황할 정도로 <A.G>의 활동상에 대해 기술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단색화를 가리켜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이라고 쓴 바 있다. ‘귀환’이란 ‘되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자면, 군사적인 용어로 ‘탈환’이라 해도 무방하다. ‘고지의 탈환’이란 군사적 용어만큼 예술의 사회사를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이것이 바로 본디 군사용어였던 ‘아방가르드(전위)’가 문화적으로 전성된 이유인 것이다. 삶의 치열성이 곧 예술의 치열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고지’의 점령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예술분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못 된다. 어느 것이든 그것이 곧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A.G>가 야심차게 [서울비엔날레]를 연 이듬해인 1975년에 박서보가 주도한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이 창립, <A.G>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흡수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수의 작가들이 백색 단색화로 전환, ‘단색파’의 획일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34).

 국제전 참가를 위한 작가 선정을 목적으로 창설된 [앙데팡당]은 1972년에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가진 이래,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자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열렸다. 1972년의 제1회 [앙데팡당]전은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했다. 그것은 당시 미협 국제분과위원장 겸 부이사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박서보에 의해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여러 국제전에 참가할 작가를 선발할 목적으로 창설된 무심사 독립전이었다. 제1회전의 심사위원으로는 재일화가인 이우환이 초청되었다. 그는 훗날 한국의 단색화와 관련, 역사적인 전시로 평가되는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이 열리는 일본 동경 소재 동경화랑의 주인인 야마모토 다카시와 함께 전람회장을 둘러보고 이동엽과 허황의 흰색 계통의 그림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35)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살면서 조선의 백자에 심취했던 야마모토 다카시(山本 孝)는 이 두 사람의 흰색 작품들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이는 훗날 자신의 화랑에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단색화가 언제 맨 처음 발화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돼 있지 않다. 그러나 1969년에 발행된 ‘A.G’ 잡지의 표지에 서승원의 기하학적 작품 ‘동시성’이 소개된 적이 있으며, 이반의 제19회 국전 입선작인 ‘Instant 폐문 백’, 권영우의 ‘70-21’(제19회 국전, 1970), 정창섭의 ‘원ㆍ원’(제19회 국전, 1970), 김형대의 ‘백의민족’(제18회 국전, 1969) 등등의 작품에서 흰색이 주조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72년 9월, 명동화랑에서 개최된 [5인의 백색전](김주영, 이원화, 이종남, 엄희옥, 여명구)은 검정색 단색화를 그린 김주영을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모두 흰색 계통의 작품을 출품, 처음으로 흰색이 집단화되는 양상을 보였다36).

 이러한 선례들은 70년대 단색화가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아니라 6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탄생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5인의 백색전]은 최초의 집단적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37)



Ⅳ. 민중미술의 대두와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확산

 전기 단색화가 미학적 성취를 이룬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70년대의 화단정치에 염증을 느낀 20대 후반의 작가들이 국제전을 둘러싼 미협의 장악과 독점에 불만을 품고 이를 일제히 성토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미술대학 재학 시절인 70년대에 모더니즘 교육을 받은 자들로서 작가로서의 진로가 불투명한 데서 오는 심리적 좌절감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과거 20년간의 핵심적 구조가 헤게모니의 추구로 인하여 상대적 파워의 구축을 초래하였고”(한국 현대미술 모색전 선언문), “우리는 오늘날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기존 미술행태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과 회의를 품고 있으며 스스로도 자기 나름의 모순에 빠져 방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현실과 발언 창립 취지문)와 같은 발언들은 모더니즘 세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였다.



“‘현․발’, ‘광자협’, 그리고 1982-4년에 걸쳐 등장한 청년작가 그룹들이 70년대의 단색조 회화 및 개념미술 일변도의 경직된 화단분위기에 대해 일대 반기를 들고 저항한 사태가 민족․민중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0년대 초반은 70년대를 통해 모더니즘 미술의 교육을 받았던 청년작가들이 집단적으로 반발, 그룹을 통해 집단적 발언을 시도한 다소 혼란스런 전환기였다. 당시 20대의 청년작가들이 주축이 된 그룹들은 때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기성화단에 도전을 감행했지만, 70년대 주류미술의 그것과 차별되는 뚜렷한 이념이나 미학적 관점의 수립이 미비된 상태에서 일종의 심정적인 저항을 보였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성격이 농후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1980년의 <횡단> 그룹을 필두로 [한국현대미술의 모색전](1982), [젊은 의식전](1982, 1983), [상식 감수성 또는 예감전](1982), [대성리전](1980), [의식의 정직성 그 소리전](1982), [한국현대미술 80년대 조망전](1982), [실천그룹전](1982), [시대정신전](1983), [표상전](1983), [에스파 동인전](1983), [인간, 그 어디에전](1983), [접근 가늠 도달전](1983), [토해내기전](1983) 등 일련의 그룹전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현실과 발언), ‘구미미술의 외형적 재탕에 그침으로써 삶이 배제된 창백한 형식주의를 초래’(삶의 미술전),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생활인 중심의 미술’(두렁) 등등의 선언문은 모두 70년대의 형식주의 미술에 따른 제도적 파행에 비판의 표적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38)

    

 이처럼 제도 미술에 불만을 품은 청년작가들의 저항은 이념이 결여된 상태에서 터져나온 것으로 아직 뚜렷한 공격목표의 설정이나 개혁의 구체적인 전략이 준비돼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정치적 아방가르드’로 지칭되는 미술운동이 합당한 명분을 얻음과 동시에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80년대 초반 무렵에 서서히 조성되고 있었던 사실은 특기할만 하다. 그것은 1979년 10월 26일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과 연이어 나타난 12ㆍ12사태, 그리고 이듬해에 광주에서 벌어진 ‘5.18 민주화 항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른바 전두환 군부 정권의 대두는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시해사건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이 사건은 18년간 지속된 군부의 종식이라는 정치사적 의의 외에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3김씨의 정치활동 재개로 대변되는 ‘민주화의 봄’을 열었다는 점에서 전환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39)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민중미술로 대변되는 ‘정치적 아방가르드’는 급격히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이 같은 현상을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잇따른 민주화 선언과 사회주의의 종식으로 대변되는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와해, 그리고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몰락 등 외부적인 요인과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대변되는 내부적인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난 ‘혁신과 급진의 급격한 퇴조’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은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출범과 [민중미술 15년: 1985-1994전]의 개최이다. 특히 민예총의 사단법인화와 함께 민중미술이 대표적인 제도 미술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 형식으로 열렸다는 사실은 폐터 뷔르거(Peter Bürger)의 표현을 빌리면, 민중미술이 ‘역사적 아방가르드’화하는 결과를 스스로 초래한 것으로서 문예운동을 통한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1980년대의 군사독재에 저항, 민주화 투쟁의 기수를 자임했던 정치적 아방가르드 세력은 이렇게 해서 한 때 자신들이 그토록 적대시했던 제도권 속으로 진입하여 스스로 제도화의 길을 가게 된다.40)


1) Matei Calinescu, <<Five Faces of Modernity-Modernism Avant-garde Decadence Kitsch Postmodernism>>,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1987, p,97.

2) Hans Robert Jauℬ, Literaturgeschichte als Provocation, Suhrkamp, 야우스, <<도전으로서의 문학사>>, 장영태 역, 문학과 지성사, 20쪽. 

3) Matei Calinescu, 같은 책, 95쪽,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21쪽에서 재인용.

4) <<철학소사전>>, 민중서관 편집국 편, 현암사, 1983, 171쪽.

5) 나는 이러한 전위예술 운동의 계보를 2000년에 출간한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를 통해 살펴본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사를 수놓은 다양한 미술운동의 흐름을 전위의 관점에서 그룹 활동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앵포르멜 운동은 그 서술의 본론 첫 머리에 해당한다.

6)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19쪽.

7) 윤진섭, 같은 책, 56쪽.

8) Renato Poggioli,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The Belknap of Ha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essachusetts London, England, 1968, p. 4.

9) 윤진섭, 앞의 책, 56-7쪽. 이 글의 시간적 범위로 삼고 있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을 염두에 둘 때, 전사(前史)는 앵포르멜 운동이 된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의 창립을 기점으로 60년에 결성된 <60년미술가협회>(약칭 ‘60년미협’)과 같은 해에 이루어진 <벽동인회>, 그리고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이 모여 발전적 해체와 회원 재정비의 명목으로 결성된 1962년의 <악뛰엘> 등은 앵포르멜 운동을 추진한 주체 세력이었다.

10)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이 발전적 해체와 회원 재정비의 명목하에 새로이 조직한 단체이다. 회원은 김창렬, 박서보, 정상화, 하인두, 정창섭, 전상수, 장성순, 이양로, 나병재, 김대우, 윤명로, 김종학, 손찬성, 정영렬, 조용익, 임상진, 김응찬, 이춘기, 민병영, 원대정, 유병엽, 문미애 등이다.

11) 손수 짠 대형 캔버스에 신체를 투사하는 앵포르멜 세대 작가들 특유의 제스처는 70년대에 들어서 나타난 단색화의 수행성 개념과 연결된다. 특히 신체를 활용한 끊임없는 반복의 제스처는 70년대 단색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미술적 사조의 주체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일생을 통해 캔버스의 틀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전기 단색화 작가들 중에서 입체와 오브제, 설치를 경험한 작가들로는 권영우, 김기린, 박서보, 하종현 등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2) “우리는 지금의 이 혼돈 속에서 생(生)에의 의욕을 직접적으로 밝혀야 할 미래에의 확신에 건 어휘를 더듬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 수립되었던 빈틈없는 지성체계의 모든 합리주의적인 것들을 박차고 우리는 생의 욕망을 다시없는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온 세계의 출발을 다짐한다. 세계는 밝혀진 부분보다 아직 발들여 놓지 못한 보다 광대한 기여(其餘)의 전체가 있음을 우리는 시인한다.” -현대미협 선언문(1959)) 중에서-  

13) “캔버스에의 싫증이지요. 그건 장식에 지나지 못하는 기능만을 갖고 있습니다. 생활 속에 직접적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환경구성에 참여하자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최붕현, 주간한국, 1967. 12. 17.

14) 윤진섭, <<한국모더니즘 미술연구>, 68-9쪽.

15) 당시 <무>와 <신전> 동인이 행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국내 최초의 해프닝으로 간주된다. 혹자는 이 해프닝을 수행하면서 참가자들이 부른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동요의 의미를  동학혁명 내지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미지와 연결시켜 현실참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순수한 놀이정신의 발현으로 보인다. 이는 이 해프닝의 각본을 쓴 미술평론가 오광수의 견해, 그리고 당시 참여작가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이 해프닝을 찍은 사진에 참가자들이 웃고 있는 표정이 인상적인데, 이는 이 해프닝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16) 변변한 미술전문지가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이들의 해프닝은 주간한국 등 각종 주간지를 비롯한 대중잡지와 신문에 주로 소개가 되었다.  

17) 윤진섭, 앞의 책, 67쪽.

18) 이른바 미술에서 순수한 형식과 매체의 측면에 주목한 작가들의 입장과 태도를 말함.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며 상세한 설명의 나의 글 ‘한국의 초기 해프닝에 관한 연구’(예술논문집, VOL. 49, 2010, 대한민국예술원) 117쪽을 참고할 것.

19) 윤진섭, ‘한국의 초기 해프닝에 관한 연구’, 예술논문집, VOL. 49, 2010, 대한민국예술원, 113-4쪽. 

20) [청년작가연립전]에 참가한 단체와 멤버는 다음과 같다.

    <무> 동인 : 최붕현, 김영자, 임단(임명진),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신전> 동인 :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오리진> 동인 :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김택화, 이상락, 함섭은 불참), 이상 無順.

21) ‘한강변서 해프닝 쇼’, 조선일보, 1968. 10. 18.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시공사) 97쪽에서 재인용.

22) 윤진섭, 앞의 논문, 127쪽.

23) 윤진섭, 앞의 논문, 127쪽.

24) 개항 100년 연표 자료집, 동아일보사 간, 신동아 1976년 1월호 별책부록. 283-6쪽.

25) 1970년에 창립된 신체제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 김수평, 윤건철, 김창진, 이강소, 이주영 등. 이 그룹 역시 <S.T>와 마찬가지로 70년대를 통해 여러 차례의 스터디를 통해 이론 진작에 힘쓰는 등 전위의식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26) 전위에술론을 쓴 레나토 포기올리도 밝힌 것처럼 운동으로서의 아방가르드는 집단과 선언문, 기관지 등을 갖추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950-60년대 앵포르멜 운동의 주체세력인 <현대미협>, <60년미협>, <벽동인회>, <악뛰엘> 등과 60년대 초중반에 결성된 <무>, <신전>, <오리진> 등은 선언문과 그룹 등 기본 요건은 충족시켰으나 기관지를 갖지는 못했다. 오히려 1964년에 강국진, 정찬승, 한영섭, 김인환, 최태신, 양철모, 남영희 등이 모여 결성한 <논꼴> 동인은 그룹, 선언문, 기관지 등 전위의 기본 요건을 충족시켰으나 단명하여 강국진, 정찬승, 김인환 등 기존 멤버에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가 가담, <신전>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무>, <신전>, <오리진> 동인들 간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오리진>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지만, 그 중에서 이승조, 서승원, 최명영이 <A.G>의 창립 멤버로 가담하였고, 처음에 <A.G> 결성에 적극성을 보였던 이태현과 최붕현은 도중하차, 강국진, 정찬승, 한영섭, 최태신, 이묘춘, 김정수, 전창운, 김기동 등과 함께 1974년에 <무한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27) 1971년에 발행한 ‘A.G’ 잡지 4호에는 확장된 회원들의 명단이 보인다. 김구림, 김동규, 김청정,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송번수,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조성묵, 최명명, 하종현(이상 작가), 김인환, 오광수, 이일(이상 평론가).

28) 각주 27에서 보듯이, 이 그룹이 결성된 지 45년이 경과한 현재 김동규를 제외한 전 회원들은 화단의 원로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 중 작고한 김한, 이승조, 조성묵은 생전에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들이다. 이는 이 그룹이 그만큼 엘리트 집단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S.T> 그룹은 창립멤버인 이건용, 박원준, 김문자, 한정문, 여운을 필두로 김홍주, 황현욱, 남상균, 성능경, 이재건, 장화진, 조영희, 최원근(1973년 제2회전, 명동화랑), 김용민, 송정기, 최효주(1974년 제3회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강창렬, 김선, 김용철, 김장섭, 안병섭, 장석원(제5회전), 강용대, 강호은, 김용익, 박성남, 윤진섭, 장경호(1977년 제6회전, 견지화랑), 정혜란, 최철환(최민화)(1980년, 제7회전, 동덕화랑) 등 회원들의 입탈퇴가 빈번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작품활동을 중도에 그만 두거나 평론으로 전환하는 등 변화와 부침이 심했다. 이 그룹은 81년에 <현실과 발언>, <서울80>과 함께 동덕미술관이 주최한 [현대미술 워크샵전](동덕미술관에서 전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토론회 개최) 참가를 끝으로 10년 간에 걸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9)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서진수 편저, 마로니에북스, 2015, 76쪽.

30) 단 1회로 그친 [서울비엔날레]는 1974년 12월 12일부터 19일까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A.G>는 이 전시의 취지문을 통해 “국제적 차원에서의 미술 교류를 꾀할 것”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국가별로 특정 국가를 비엔날레에 초대, “실질적인 작품 및 정보 교환을 실현시킬 것”이며 아울러 “서울비엔날레의 해외 진출을 도모할 것”을 약속했으나 일년 뒤에 해체되는 불운한 종말을 맞게 된다.

31) 윤진섭, 앞의 책, 77쪽.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1975년에 일어난 <A.G>그룹의 종언은 마지막 전시가 있었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제1회 [서울현대미술제]가 개최된 사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참고로 1975년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서울현대미술제]에 초대된 <A.G> 그룹의 작가들은 김동규, 김청정, 이승택(이상 초대작가), 김구림, 이승조, 심문섭, 이깅소(이상, 운영위원) 등이다. 이 숫자는 총17명에 달하는 <A.G>의 회원 중 상당수에 해당하여 <A.G>가 와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2) 선정위원 이일에 의해 1974년에 열린 제1회 [서울비엔날레]에 초대된 <S.T> 그룹의 멤버는 김용민, 김홍주, 남상균, 성능경, 여운, 최효주, 이건용(운영위원) 등이다. 이는 전체 초대작가 58명 중 약 1/8에 해당하는 숫자로 그 만큼 화단에서 차지하는 <S.T> 그룹의 비중이 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33) 윤진섭 편저, <<1960-70년대 한국 행위에술가 구술채록 자료집-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국립 아시아문화의 전당 정보원 刊, 2016.

34) 이 점에 대해서는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93-101쪽 참조.

    “특정인과 관계되는 건데, 박서보 씨가 앵포르멜을 주도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대가 바뀌니까 기하학적 추상을 자기가 못했고 아방가르드적 운동도 주도를 못하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주도를 해야겠다고는 것으로.....서울현대미술제가 일종의 AG 방해공작의 시발점으로 보면 될 겁니다. 서울현대미술제가 특별한 이념을 가지고 출발한 미술제가 아니고 많은 추상미술하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겉으로는 하나의 축제를 만들자는 것으로 그 쪽에서 많이 내고 이 쪽에서 적게 내고 했지요. 어떤 면에서 내가 리더십이 부족했다고 봐야 되겠지요.'

   하종현, 오상길과의 대담 중에서,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Ⅱ>>, 6.70년대 미술운동의 자료집, Vol. 2. ICAS. 2001, 120쪽.

35) 세 폭으로 된 이동엽의 <상황> 연작(1972)과 허황의 <가변의식>(1972)을 일컫는다. 당시 파리비엔날레의 코레스퐁당이었던 이우환이 이 작품들을 선정, 미협이 파리비엔날레 본부에 통보하였으나 비엔날레 측은 설치와 입체, 퍼포먼스 등 당시 파리비엔날레가 추구했던 실험적인 미술경향과 배치된다고 판단, 이들의 참가를 거부하는 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이들은 2년 후에 열리는 [카뉴국제회화제]에 참가하게 된다. 

36)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진경, 1970년대 한국 단색화 운동과 국제화,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 청구논문, 2015, 19-41쪽을 참고할 것. 

37) Ⅲ장은 윤진섭,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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