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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미를 찾아서-이경성론

윤진섭

영원한 미를 찾아서-이경성론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석남 이경성(1919-2009, 이하 ‘석남’으로 표기)은 미술평론가이며 미술사가, 미술행정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에 화가로서 그의 면모는 대중에게 비교적 생소하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행정을 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 수차례에 걸쳐 전시를 했기 때문에, 화단에서 인물을 주로 그린 그의 그림은 대체로 낯이 익은 편이다.

 오래 전에 나는 인사동 화랑가를 거닐다 어느 화랑의 진열장에 걸린 그의 소품 한 점을 발견하고 유리창 너머로 찬찬이 감상한 적이 있다. 그 그림은 한 2호 정도 되는 것이었는데, 흰 캔버스 바탕에 먹으로 서너 명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아주 소탈하고 단순한 화풍이어서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그런 그림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잔잔하게 잔영이 떠오르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그림에는 전문적인 그림 수업을 거치지 않은 탓인지 특별한 기교가 없는 데서 오는 석남 특유의 ‘멋’이 스며 있었다.  

 석남의 그림은 코베이나 서울옥션 같은 경매에도 나타났었나 보다. 오랜 세월 석남을 곁에서 보필한 김달진1)은 어느 날 코베이 경매에 올라온 석남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 석남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이 궁금한 문제에 대한 답을 그 스스로 밝히고 있어 다소 길지만 이 대목을 인용하기로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4년 인천시립박물관을 그만 두고 낙원동에서 김순배 형과 같이 살고 있을 때였다. 그가 방에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릴 때 어깨 너머로 그리는 것을 눈여겨보고 그가 없을 때 몰래 그가 쓰던 재료와 크레파스로 긁적거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한 내 작품을 보고 순배 형은 깜짝 놀라면서 “이거 누가 그린 거냐?”며 칭찬해 주고 “숨어서 그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내 재료를 다 써서 그려도 좋다.”고 허락을 해주었다. 그것이 그림의 시작이다.

 여름방학이 되어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인천 집에서 정원을 산책하며 덥고 긴 날을 지내던 중 종이에 크레파스로 긁적긁적 하던 내가 문방구점에 가서 유화물감과 캔버스를 사다가 그린 것이 이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든 계기가 되었다.”2)



 석남의 그림이 화단에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은 1988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석남 이경성 선생 고회기념 미술전]에서 였다. 석남의 고회를 맞아 제자들이 마련한 이 전시회에 10년 동안 그려 온 크레파스화와 유화 그림을 출품하였고, 그것은 “전람회 형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선보인 최초의 일”이었다.3) 이 전시회는 석남의 개인전이 아니라 그와 각별한 친분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 위주로 열렸으며, 석남의 그림은 전시장의 한 코너를 채운 찬조 출품의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석남의 전시는 같은 해에 공간미술관이 주최한 [김수근문화재단 기금 모금을 위한 이경성 회화전]으로 이어졌다. 마침 김수근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석남이 기금 마련의 필요성을 느껴 스스로 이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1988년 12월에는 L.A의 한국문화원에서 전람회를 가졌는데 이것은 사진작가 황규태와 화가 김봉태가 주선한 것이었다. 이어서 1991년 12월에는 [석남미술문화재단 기금 마련을 위한 이경성전]이 공간미술관과 박여숙화랑 두 곳에서 열려 몇 년 사이에 부쩍 전람회가 잦았다. 



Ⅱ. 

 석남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그 이유는 첫째 석남 스스로 자신이 전문작가라는 사실을 표명한 적이 없고,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기 때문이다.4) 그는 20대 약관의 젊은 시절부터 미술과 관련을 맺다보니 그림 속에서 살게 되었고, 그러자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을 그리게 되고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5) 

 그렇다면 그림에 재능이 없었던 석남이 과연 어떻게 해서 그림에 입문하게 되었을까? 그의 술회에 의하면 50년 가까이 미술을 접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돼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생기더라는 것이다. 석남의 그림에서 오랜 수련을 전제로 하는 대상의 묘사력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태동시킨 동인에 대해 ‘본능적인 표현욕의 충족’과 ‘주관적인 심성의 표현’을 들었다.6) 의식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의 겉모습에 대한 묘사의 테크닉에 치중하지 않고 그린 결과,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마치 ‘원시회화나 아동미술’과도 같은 경지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 :  1872-1945)가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에서 밝힌 유희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처럼 예술을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테크닉이란 중요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특히 석남처럼 근대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선구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전문적인 작가이길 표방했다면 필경은 주변의 질시를 받았을 것이다. 석남의 애교스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자체가 즐거웠고 “목적 없는 행동, 즉 유희”였기 때문에 ‘일종의 낙서’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림의 대상을 오로지 ‘사람’에게 국한시켰기 때문에 석남의 사람 그림은 주변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차별화될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림이 취미의 소산임을 여러 차례 밝혀서인지 석남의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 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미술평론가 송미숙이 쓴 글이 한 편 있는데, 이 글은 1994년에 갤러리 서화와 갤러리 나인에서 열린 [사람ㆍ사람ㆍ사람]전의 서문으로 쓴 것이다. 이 글에서 송미숙은 석남 인물화의 특징을 분석하여 ‘원형, 장방형, 길쭉한 사각형’으로 유형화하고 있으며, 수많은 변주를 이룬 인물상들을 여자 두상과 군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도록에 실린 그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먹과 붓, 혹은 검정 사인펜을 기용, 낙서라기보다는 초서체를 방불케 하는 빠르고 직관적인 터치와 필획들로 단순화된 인물 형태들은 세부묘사와 표현이 절제 생략되어 의인화(擬人化)된 상징기호들로 읽혀진다. 즉 그의 상형문자화된 인물들은 어느 특정한 ‘여자’나 계급 그룹이 아닌 일반화된 여성 또는 군상이다.”7)



 송미숙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유형화된 인물상들을 특징짓는 핵심은 익명성이다. 대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의 결여는 그림의 대상이 누군지 모르게 하는 일종의 기술적 트릭이다. 석남의 경우는 물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인물의 구체적 드러냄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에 나오는 인물상처럼 붓으로 뭉툭하게 찍은 점으로 얼굴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그림을 일종의 상징과 기호로 읽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물의 표현에 있어서 특수한 국면을 피해나가 보편적 지평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찾아볼 수 없음은 그런 연유에서 이다.

 석남이 최초로 그린 그림은 1957년의 명제와 크기 미상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크레파스로 그린 것인데, 화면의 정중앙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다 작은 크기의 두 사람이 역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사람은 검정색, 배경은 붉은 색조를 띠고 있으며, 깡마른 인물상의 테두리 부분은 흰 여백으로 비워 그림 전체에서 뚜렷이 두드러져 보인다.8)

 이 그림이 훗날 석남 인물화의 발화점이다. 그러니까 석남의 작품세계는 이 단순한 작품을 발원지로 해서 약 50여 년에 걸친 기간 동안 다양한 변주를 낳기에 이른다. 그것은 과연 어떤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는가? 1990년대 말에서 2001년도에 이르는 작품을 중심으로 수록한 <석남이 그린 사람들>(모란미술관 발행) 도록을 참고할 때, 이 책에 수록된 약 300여 점의 작품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윤곽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9)

 석남(石南), 석남노인(石南老人), ‘Kyung’으로 서명이 된 석남의 그림들은 드로잉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부분은 연도가 표기돼 있지 않으나 소수의 작품들에 연도가 나와 있어 그 무렵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재료 면에서 보면 종이(한지 포함)가 많으며, 캔버스를 사용한 것도 있고 외국잡지나 신문, 도록 위에 예의 사람의 형상을 먹으로 그려 넣은 것들도 있다. 97년 무렵에는 색종이 콜라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번듯한 캔버스를 애용하지 않은 것은 석남 스스로가 겸손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취미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석남에게는 따로 스튜디오가 없었다. 미술관장실이나 교수연구실, 박물관장실, 살림집, 그리고 말년의 병실 등등 발길 머무는 공간이 곧 작업실이었다. 한 지인의 회고에 의하면 석남은 평상시에 “나는 아마추어 화가이다. 아마추어 화가는 절대 그림을 잘 그리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10)

 그런 석남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주변의 친지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곧잘 선물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 석남의 많은 작품이 제목과 크기, 연도미상의 결여,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의 숫자가 정확히 파악이 안 되는 이유는 이처럼 선물로 나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 지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을 물러난 후 선생은 일본 소게츠미술관의 명예관장으로 초임하였고 곧 동경으로 와서 수준 높은 전람회를 연달아 계속하여 기획하였다. 그때마다 함께 일한 스태프들에게 선물을 하곤 하셨는데 그 중에는 선생 자필의 그림이 들어있는 부채도 있었다.”11)



 석남과 친교를 맺은 인사들 중에 석남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이 많은 이유는 다정다감한 석남의 성격 탓도 있지만 작품을 금전적 가치로 생각지 않고 사대부의 서화처럼 취미의 일환이거나 친교의 수단으로 여긴 데 있다. 물론 석남도 문화재단의 기금 마련 등 분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판매를 위한 전시를 열기도 했다.12) 석남의 이러한 철칙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 소장이나 구입과 관련, 미술비평가의 윤리의식을 염두에 둔 것으로 금전적 이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Ⅲ.

 석남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자타가 인정하는 ‘페미니스트’다. 키가 크고 준수한 용모의 그에게는 많은 여성들이 따랐다. 특히 타고난 미남자인 노년의 석남은 특유의 홍안에 부드러운 은발이 썩 잘 어울렸다. 다음은 석남의 오랜 지기인 삼불(三佛) 김원룡의 회고 한 토막이다.



 “이경성 하면 언제나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최순우, 또 하나는 김수근이다. 엄격히 따지면 그들은 전문 하는 분야에도 차이가 있고 외모, 성품, 체형 모두 다른 점이 있지만 미에 대한 타고난 감각, 그리고 사람 자체가 풍기는 역시 천부의 멋은 셋이 모두 공통적이다. 그래서 그들을 존경하고 동경하는 여인부대가 따라다닌 것도 같은데 그들을 지휘, 용병하는 솜씨에도 배울 점이 많아 미술적 에피소드로 모두 미화되어 있는 것 같다.”13)



 석남을 평생 따라다닌 것은 ‘마더 콤플렉스’ 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육남매의 장남인 그에게 어머니는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는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아래로 5남매가 있었으나 그는 어머니를 독점했으며, “어머니가 동네에 마실가시면 졸졸 쫓아가서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들고서야 잠이 드는 ‘마더 콤플렉스’에 빠진 아이”였다. 유년시절에 돌보아준 준주라는 이름의 누님을 그는 “처음 이성으로 느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소년시절에는 기쿠치강(菊池寬),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 오사리기 지로(大佛次郞)가 쓴 연애소설을 읽으며 자랐다.14) 한 마디로 조숙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석남이 회고하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라는 존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15)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미에 대한 열망으로 투사돼 나타난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 여성적인 것, 섬세한 것, 영원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평생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이며, 부드럽고 자애스런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대용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아흔을 넘긴 그의 일생은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이상과 현실 또는 충족과 상실의 되풀이”이며, 그의 생을 유지시킨 것은 다름아닌 카톨릭 신앙과 아름다움에의 동경”이었다.

 앞에서 제시한 첫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세 사람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카톨릭인 신자인 그에게 있어서 성부, 성자, 성신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는 그가 한 글 속에서 언급한 진, 선, 미의 상징체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삼각구도(화면 중앙의 한 사람은 크고, 양 옆의 두 사람은 작게 표현된)는 이후 그의 작품 속에서 너무나 빈번히 나타나 모종의 관계에 대한 암시처럼 보인다. 왜 석남은 이 삼각구도를 거의 습관처럼 그렸던 것일까? 송미숙은 이와 관련, 석남 그림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어 주목된다.



 “반면 그의 그림의 중심 테마인 단발머리의 여자 얼굴은 자신의 그리움과 애정의 대상인 모든 여인의 전형이며(여자 두상).....(중략).....간헐적으로 2인 혹은 3인으로 구성된 그림들도 있는데 이때에 남자는 여자에게 무언의 그러나 극적으로 희화화된 제스처로써 구애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중략).......그의 고정된 순진할 정도로 플라토닉한 여성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16)



 송미숙은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석남 예술의 본질을 “무정부주의적 허무주의 세계관과 그러한 세계관에서 유일한 쾌(快)의 근원인 미와 사랑, 특히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미학”으로 요약한다.17)

 그러나 나의 분석으로는 석남의 어떤 그림들, 가령 사각의 구획이나 여러 개의 원 속에 갇힌 인물상들은 속박이나 구속, 고립을 암시하는 심리적 기제처럼 보인다. 그것은 외로움의 상징적 표현일까? 아니면 그러한 외로움으로부터 탈출의 욕구에 대해 스스로 가하는 억압의 징표일까? “외로움을 잘 표현해야 바람둥이가 될 수 있다.”는 이경성의 발언을18) 참고하면 이 외로움으로부터의 탈출, 즉 허허로운 내면의 풍경은 왜 그가 그토록 여성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명징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특히 원형 속의 인물 그림은 마치 척서기(擲書期)의 아동화처럼 원형의 주변을 거친 필선으로 마구 칠해 일말의 파괴적 충동을 드러내고 있어 주목된다.

  

 Ⅳ.

 석남의 군중 그림은 일견 고암 이응노의 대표작인 <군상> 연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고암이 필묵의 오랜 수련을 거친 노련한 프로 작가인 반면, 석남은 아마추어 작가 특유의 소박한 필치로 꾸밈없이 군중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대략 무질서하거나 질서정연한 리듬감을 취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오선지 위에 마치 음표처럼 나열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표현기법 상으로는 마치 성냥개비처럼 작고 둥근 머리에 긴 몸통을 지닌 단순한 형태로 나타난 그림들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군중 그림은 단순한 형태적 요소의 반복이 특징이다. 흑과 백의 깃발이 등장하는가 하면 단순하게 묘사된 개의 모습이 군중 사이로 나타나기도 한다. 군중 속의 개인들은 질서정연하게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으로 표현돼 있어 사회의 획일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천 년에 그린 군중 그림 연작에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 두 개 또는 네 개의 원을 그리고 예의 세 사람을 그려 넣은 작품도 보인다. 왜 석남이 그토록 3이란 숫자에 집착했는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석남의 그림들을 관류하는 공통적 특징은 의식의 자유로운 유희이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미의 상태를 동경하는 가운데 영국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시구 “아름다운 것은 참된 것이고 참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19)를 신조로 평생을 살다 간 석남 이경성. 지금도 이 ‘영원한 미의 순례자’는 천국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분란으로 가득 찬 이 땅을 고즈녘한 시선으로 내려다 볼 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평단 2019. 봄호>

  
1)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겸 김달진미술자료연구소장. 2019년 2월 15일 필자와의 대화 중에서.

2)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시공사, 000, 405쪽.

3) 이경성, 앞의 책, 405쪽.

4) 석남의 취미 그림에 대한 이연수 모란미술관 관장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평생을 미술평론가로 살아오신 이경성 관장님께서 평소에 취미로 그림 그리기를 즐기신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연수, <작품집을 펴내며>, 모란미술관 작품집 001, 2002

5) 역설적인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하도 그림을 못 그려서 미술 선생님이 못 그린 그림의 표본으로 그의 그림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이경성, 앞의 책, 407쪽.

6) 이경성, 앞의 책, 407쪽.

7) 송미숙, 모란미술관 작품집 001, 2002, 321쪽. 한편, 이 글의 말미에는 글의 출처를 ‘제3회 개인전(1991.12.2-10)-이경성의 <사람ㆍ사람ㆍ사람> 연작에 대하여’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석남이 자신의 회고록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서 밝힌 ‘1994년 6월에 갤러리 서화와 갤러리 나인에서 열린 [사람ㆍ사람ㆍ사람]전’의 표기와 다르다. 여기서는 뒤의 표기에 따른다.

 

8) <석남이 그린 사람들>, 모란미술관 도록 001, 5쪽 참조. 크기와 명제 미상.

9) 그러나 매우 아쉽게도 이 도록에는 작품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제목과 크기, 재료가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의 <일러두기>는 작가의 편집 방향에 의해 이를 밝히지 않고 자유롭게 편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아마도 작품의 제목과 크기, 제작년도를 기록해 놓지 않는 석남의 습관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되는 바, 이는 그림을 일종의 여기와 취미로 여긴 석남의 의식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10) 이연수, 작품집을 펴내며, <석남이 그린 사람들> 도록, 325쪽. “모란미술관의 고문으로 가까이 모시는 동안 틈만 있으시면 빈 종이에 낙서 비슷하게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을 뵈어왔고, 이 그림들이 관장님 스스로 표현하시듯이 그저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실한 리얼리티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11) 데시카와 히로시, 바람과 신뢰의 군중상(번역 이경성), <석남이 그린 사람들> 도록, 322쪽.

12)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철칙도 있다. 결코 그림을 잘 그러면 안 된다는 것과 자신의 그림을 팔면 안 된다는 것이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송구스러워 주로 신문지나 파지를 이용했고, 전시회가 끝나면 한 점도 남김없이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경성, <아름다움을 찾아서>, 도서출판 삶과 꿈, 2002

13) 김원룡, 칠십이 되어도 콤비를 걸쳐 입은 석남,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331쪽.

14) 이경성, <아름다움을 찾아서>, 21쪽. 

15) 이경성,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꼭 붙들고서야 잠이드는 ‘마더 콤플렉스’....”, <아름다움을 찾아서>. 21쪽.

16) 송미숙, 앞의 글.

17) 송미숙, 앞의 글.

18) 송미숙, 앞의 글. 물론 송미숙은 이 외로움의 감정을 작품의 저변에 흐르는 중요한 요소로 포착하고 있다. 

19)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17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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