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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

윤진섭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

                                              윤진섭


 “오직 소수의 일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버려라. 또한 누구든 오직 지금의 이 순간, 이 불가분의 점(點)을 살고 있을 뿐이며 그 밖의 그의 생애는 지나가 버린 것이거니와 불확실한 것임을 명심하라. 따라서 그가 사는 순간은 짧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지구의 작은 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사후(死後)의 명성도 잠시 동안 계속될 뿐이니, 이 명성조차도 필경은 곧 죽어야 하고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에 의해 전승(傳承)되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젊은 작가인 앤젤 오테로(Anget Otero)와 윤종석의 전시를 보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B.C 121-180) 황제의 <명상록>에 나오는 이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두 작가는 비록 작품의 스타일이나 내용은 판이하더라도 이들이 추구하는 회화의 세계가 죽음을 암시하는 소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자연의 법칙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앤젤 오테로의 경우는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들, 가령 피카소를 비롯하여 드 쿠닝, 아실 고르키, 잭슨 폴록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린 후 이를 파기하여 조합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유리판 위에 유성물감을 칠한 후 마른 상태에서 예리한 나이프로 물감층을 떼어내 칼이나 가위로 오린 절편들을 재결합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말하자면 미술사에서 이미 거장이 된 인물들의 작품에 잔존하고 있는 죽음의 냄새, 즉 미술사의 저편으로 넘어가서 미술관이라는 납골당에 안치된 작품의 이미지들을 소환해 이를 자기 작업의 맥락 속에 안치하는, 즉 자신의 고유한 화풍 속에서 재맥락화하는 작업을 추구하고 있다.

 앤젤 오테로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시절에 <기억의 재구성>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처럼 유리로부터 떼어낸 ‘유성물감 피부(oli paint skin)’를 10-12겹에 이를 정도로 겹쳐 마치 조각의 부조처럼 두꺼운 재질감을 드러낸 작업이었다. 자신의 기억과 학교에서 배운 거장들의 작품 이미지들이 혼재하고 있는 이 연작들은 작가 자신에 의한 완전한 창조라기보다는 여기저기서 얻은 참조적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읽을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제작방식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독창성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천재 개념의 산물인 독창성이 붕괴된 현상황에서 그린다고 하는 예술적 행위가 과연 유효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과 관련돼 있다. 이미 60년대 후반에 저자의 죽음을 논한 롤랑 바르트 이래 이 같은 질문은 여러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인용이라든지 관객참여와 같은 현대미술의 보편화된 전략은 독창성 개념의 붕괴를 입증해 왔다.

 앤젤 오테로의 작업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개인적 서사와 앞에서 예로 든 거장들의 특정 작품이 지닌 색깔과 형식을 차용, ‘요리하듯 배합하는’ 방식이다. 그는 일기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며 무엇을 재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추상화에 경도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즉, 개인적 기억과 서양미술사 속의 유명한 추상적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특유의 두껍고 거친 화풍을 개척해 나간다. 

 타피스리처럼 거대한 작품을 벽에 거는 방식을 구사하는 <달의 표면(Piel de Luna)에는 작가의 기억 속에 잔존하고 있는 희미한 사물들(가령 색채가 화려한 요리)과 추상화의 이미지들이 혼재하고 있으며, 기존의 검정색이 주조를 이룬 작품들은 어둡고 우중충해 보이나 죽음의 본능(thanotos)을 통한 삶의 강한 긍정을 역으로 보여준다. 일견 화려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두운 기운이 저변에 깔려있는 앤젤 오테로의 거대한 화면들은 삶에 대한 작가의 강한 정념(pathos)을 뿜어낸다.   

 한편, 소피스갤러리에서 열린 윤종석개인전 <날개밑의 바람>은 기법과 형식면에서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아크릴 물감이 담긴 주사기를 사용, 작은 점들을 캔버스 위에 무수히 찍어 이미지를 구축했던 기존의 방법과는 달리 선을 그어 궤적을 중첩시키는 방식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2년 전, 대만의 갤러리 추에서 열린 전시회를 위해 쓴 작가노트를 보면 이러한 변화에는 그 나름의 요인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지각적인 태도보다 실재와 허구가 구분되지 않는 직관’에 의한 방법을 구사하게 된 이유의 이면에는 자신의 사랑하던 형과,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죽음이 개재돼 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받은 정신적 충격은 사물을 다시 보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실재와 허구 사이와 혼동과 함께 점차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소멸작용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윤종석은 주사기를 사용하여 무수한 점들을 찍어나가는 가운데 개를 비롯하여 총, 손, 전구와 같은 팝적 이미지를 구축하였으며, 그것은 그의 트레이트 마크처럼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지인의 죽음 이후에 그는 분명하게 구축된 대상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선묘를 통해 사물 이미지의 분명한 경계를 흐리는 기법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마치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속의 희미하게 흔들리는 영상처럼 불안정하게 변주된다.

 윤종석의 이번 전시에는 투명한 플랙시글라스에 그린 미니멀한 색조의 추상화와 그것을 그리기 이전에 먼저 그린 구상화를 하나의 화면을 통해 다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작품들을 다수 출품하였으며, 관객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벽면과 각을 이루어 알맞게 설치하였다. 윤종석의 이러한 전략은 기존의 팝적 이미지에서 사건 중심적 에피소드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그러한 사건들의 조합이란 개인적 경험과 세계적 주목을 받은 사건 사이의 시간적 일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어느 날 자신이 목격한 발목이 묶여 날지 못하는 가엾은 새를 카메라에 담은 날과 과거의 같은 날짜에 일어난 노벨상 수상자인 중국의 인권운동가 유샤오보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 사진을 병치하는 방식이다. 윤종석은 작가 자신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경험과 세계적 사건의 이미지를 병치하는 공존의 방식을 통해 사건을 현재화한다. 

 <같은 날의 잔상> 연작 중 한 작품은 예의 미니멀한 추상과 구상을 결합하여 서로 이질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앞면에는 화면의 중앙 경계선을 사이로 위에는 연한 핑크 계열의 색이, 아래에는 중간 톤의 청색 계열의 색이 칠해져 있다. 이는 물론 아크릴 물감이 담긴 주사기를 사용해서 가로 방향의 섬세한 선묘로 그린 것이다. 뒷면에는 후지산의 분화구 위에 재래식 저울을 그린 그림이 담겨있다. 산 뒤로는 감청색의 짙푸른 바다가 그려져 있는데, 수평선은 앞면의 색면 추상화와 일치하고 있다.

 자신이 찍은 사진과 인터넷에서 구한 사진들을 병치하는 기법은 개인과 사회, 주관과 객관이라는 서사의 직조를 통해 화면 속의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대작인 <순간의 의미(A Momentary Meaning)> 연작은 시진핑, 메르켈, 버락 오바마, 블라디미르 푸틴, 아베 신조 등 강대국 정치지도자들의 손을 크게 확대한 작품들이다. 윤종석은 이들 정치지도자들의 손의 표정에 주목해서 권력의 무상함을 풍자한다. 사물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친지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삶의 경험을 통해 팝적 이미지에 대한 천착에서 벗어나 비로소 죽음과 소멸이라는 문제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처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잘 드러난 작품은 심장을 소재로 3점의 연작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연한 핑크 색조의 심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파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장은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은유를 통해 심장이 해체되는 과정이 밀도높은 직선들의 조합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서두에 인용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잠언은 ‘인생은 덧없다(vanitas)’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그러니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경구를 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잠시 되새겨 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앤젤 오텔로의 작품에서는 화려한 꽃이 이울 때의 애잔한 느낌과 함께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스산한 애상감이 느껴진다. 검정색이 빠지지 않고 화려함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나 거장에 대한 폐기의 제스처를 통한 권력에 대한 강한 부정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이 점은 윤종석의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권력자들에 대한 강한 풍자를 통해 죽음 앞에서는 권력도 한낱 뜬구름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Art in Culture,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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