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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정서와 숭고미의 발현

윤진섭

담담한 정서와 숭고미의 발현

               윤진섭(미술평론가)
                                                    

 일견 백성혜가 그림의 소재로 다루고 있는 대상은 우주처럼 보인다. 화면을 가득 채운 크고 작은 점들은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들을 연상시킨다. 어디 그뿐인가. 화면의 아래와 위, 혹은 중앙에 포진한 둥근 반원이나 커다란 원은 달이나 화성과 같은 우주의 행성과도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백성혜의 작품들은 우주의 모습을 연상시킬 뿐, 그 자체 ‘우주에 대한’ 그림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우주에 대한 일종의 ‘유비(analogy)’로써 대상에 대한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다. 그녀의 그림이 우주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관련이 깊다. 누군가 한 번쯤은 봤음직한 우주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 혹은 청명한 어느 날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별들의 모습이 그녀의 그림을 우주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에 대한 그러한 인상은 우주과학자 칼 세이건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접하면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우리가 우주 속에 내팽개쳐졌을 때 행성이나 그 근처에 닿을 수 있는 확률은 1조를 1조배하고 거기다 10억을 곱한 것 중의 하나보다도 작다고 한다. 1에다 동그라미 서른 세 개를 붙인 수를 분모로 하고 분자를 1로 삼은 수 보다 더 작은 확률이 되는 셈이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이러한 과학적 진술은 회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백성혜의 그림은 제소와 아크릴 물감의 혼합물이다. 여기서 그녀의 작품경향이 추상화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궁극적으로 이러한 물질들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단색조의 평면회화와 관련이 있다. 이 진술을 좀 더 개진하기에 앞서 참고로 그녀의 작품 제작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다음의 인용문은 좋은 길잡이가 돼 준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화면이지만, 균질하면서도 미묘한 색점이 채워진 화면이 생성되기까지는 지난한 작업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작가는 화면에 요철을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작품 대부분은 2-3mm 두께로 튀어 오른 크고 작은 불규칙한 선들이 화면 전체 혹은 일부에 덮여 있는데, 이는 제소로 이루어진 일종의 저부조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초작업이 완료되면 화면 전체에 색이 진한 물감(아크릴)을 펴 바르는데, 이 색이 작품의 색조를 결정한다.” 
                    -김이순, <겹겹의 시간과 억겁의 만남 : 백성혜의 <천의 인연> 중에서- 

 작업의 초기에 백성혜는 캔버스의 바탕에 제소를 발라 전체적으로는 일정한 두께의 물감층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주로 청색을 주조로 한 색을 칠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헤아릴 수없는 붓질의 반복에 의한 ‘시간의 축적’이 있게 된다. 
 백성혜의 경력을 살펴볼 때 그녀가 미술대학을 다닌 70년대 후반은 단색화를 중심으로 한국의 모더니즘이 성행할 때였다. 따라서 그녀는 학교의 수업이나 미술현장을 통해 한국 특유의 모더니즘을 경험했을 것이다. 당시 단색화의 요체는 회화의 ‘평면성’이었다. 그리고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로 이 평면성이야말로 ‘근대성(modernity)’을 상징하는 핵심적 개념이었다. 당시 근대성(현대성)은 비단 생활뿐만 아니라 개인의 의식(意識)에도 마찬가지로 큰 힘을 발휘했다. 이른바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 관료제의 도입과 생활의 개선 등 근대화의 프로젝트가 한국사회를 점유했던 것이다. 
 이른바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한 근대적 세계관의 수립은 앞에서 인용한 칼 세이건의 우주에 대한 진술에서 보는 것과 같다. 우주를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다름 아니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은 달이 신화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전환된 일대 사건이었다. 동양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이백의 세계관이 무참히 깨지는 상징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달이 방아를 찧는 토끼 두 마리가 사는 곳이 아니라 먼지와 흙, 암석으로 뒤덮인 평범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시인을 비롯한 화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등 많은 예술가들이 여전히 우주를 주제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백성혜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서 우주는 그 자체가 주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생항로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받아들여진 흔적이 역력하다. 화면에 가하는 무수한 붓질과 점들의 배치와 표정들은-크고 작은 것, 중복된 것, 그림자를 지닌 것, 가까운 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 등등-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은 숱한 인연에 대한 훌륭한 유비이다. 이는 마치 수화 김환기가 멀리 떨어진 뉴욕에서 고국에 두고 온 친구와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무수한 점을 찍었던 것과도 유사하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백성혜가 그리는 파상의 곡선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파란(波瀾)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이 지향하는 지점과 삶의 광휘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유비일 수 있다. 
 짐작컨대 뉘앙스가 다른 색을 화면에 무수히 반복해 칠하는 동안 백성혜는 삶에 대한 다양한 사념(思念)에 잠겼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 사념이란 누군가에게 있어서처럼 ‘끊임없이 마음을 비우는’ 것과 같은 그런 거창한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담담한’ 심경에 가까웠을 것 같다(이 때 그녀의 점을 찍는 행위는 아낙네들이 공을 들여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수예의 동작을 연상시킨다). 그 반복되는 동작은 마치 일상이 그저 그렇게 반복된다는 것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밤이 지나면 새날이 밝아오듯이(따라서 지나간 밤은 무화된다.), 이전에 칠한 색을 다른 색으로 덮는 반복되는 동작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메를로 퐁티) 사이의 신체적 접촉을 통한 자기 부정에 가깝다. 이와 연관시켜 볼 때 김이순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단색조 화가들의 반복적인 붓질이 흔히 ‘수행’의 차원에서 해석되는 것과 달리, 백성혜의 작품에서 반복은 시간의 축적을 의미한다. 또 박서보, 정상화, 권영우 등의 단색조 화가들이 행위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작가의 신체성을 강조하는데 비해, 백성혜는 행위의 흔적을 최소화한다. 대신 이처럼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과 무수히 반복된 붓질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됨으로써 화면의 공간감은 두드러진다. 또한 행위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은 결과 화면은 고요함으로 가득 하게 된다.”
                                                             -김이순, 앞의 글- 
  
 대부분의 화가들에게 있어서 예술적 실천은 육체적 노동을 토대로 한다. 이에 대한 부정이 나타난 것은 서구의 경우 60-70년대에 나타난 개념미술이거니와, 노동의 산물로서 판매의 대상인 작품에 대한 부정이 아이디어에 의한 정보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그러나 회화의 경우에 있어서 모던한 언술행위는 육체적 노동과 함께 개념화 작용을 불러온다. 한국의 경우에 있어서도 서구의 미니멀 회화와 마찬가지로 이 개념화 현상이 나타났다. 70년대 한국 화단을 점유한 단색화가 당시 현대미술 혹은 전위미술의 등가물로 간주된 이면에는 단색화와 관련된 이론을 둘러싼 이 개념적 측면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소위 클레멘트 그린버그 류의 평면성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성혜의 작업 역시 이 ‘평면성’의 개념과 무관치 않다. 회화는 2차원 평면을 토대로 한 예술형식이라는 사실에 대한 용인은 그녀의 회화적 언술행위를 모던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백성혜가 대학시절 동양화를 전공한 사실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짐작컨대 그녀가 동양화를 직접 그리고 배운 이력은 모던한 단색화를 그녀 나름대로 해석하고 현재 보는 것과 같은 일련의 추상화에 적용하는 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김이순이 백성혜 작품의 특징으로 간주한 ‘고요’나 내가 앞서 언급한 ‘담담한 심경’과 같은 어사(語辭)는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동양 산수화의 특징들로써 그녀의 작품에 대해 기술이 가능한 미학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이 백성혜의 작품을 보면서 고요하고 담담한 심정을 마음속으로 느꼈다면 그것은 상호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거대한 화면이 주는 숭고한 감정마저 느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이 백성혜의 모든 작품에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작품에서 보이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일렁임은 오히려 역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백성혜의 작품에는 양가적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작업이 지닌 단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향후 작업이 지향하는 데 따른 선택의 문제처럼 보인다. 
 칸트가 분석한 것처럼 숭고미는 ‘일체의 비교를 넘어선 절대적으로 큰 것’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말한다. “숭고성은 자연의 사물 가운데에 있지 않고 우리의 심의(心意) 가운데에 있다(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 이는 다시 말해서 거대한 산과 같은 대상을 보고 숭고한 감정을 느끼는 주체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백성혜의 작품들은 대작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앞에 섰을 때 일말의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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