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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윤진섭

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결성에서 해체까지-컴아트 그룹 6년의 활동 전말기

  
윤진섭


Ⅰ. 들어가는 말


 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아마도 지난 6년간에 걸친 컴아트(Com-art) 그룹의 활동상을 이야기할 때, 이 단어들만큼 과거의 기억을 생생이 떠올리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90년에 결성돼 1996년에 해체전을 열기까지 수원을 거점으로 활동한 컴아트 그룹의 회원들은 아방가르드 운동의 전사요, ‘문화 게릴라’1)들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나긴 했지만, 당시 이들의 활동에 동참했던 나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 자리를 빌려 그들에게 ‘겁 없는 전사들’2)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싶다. 특히 이 그룹이 1993년과 94년 두 해에 걸쳐 벌인 북경에서의 활동은 비록 한 해 전에 수교를 했다하더라도3), 여전히 지난했던 당시 중국과의 외교 정치적 관계를 고려할 때, ‘겁 없는 전사들’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들이 과연 얼마만큼 겁이 없었고, 또 구체적으로 과연 이들이 중국에서 어떤 활동을 벌였기에 그런 호칭을 얻게 됐는지에 관해서는 나중에 밝히기로 하고, 여기서는 먼저 컴아트 그룹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에 대해 약술하고자 한다.  





Ⅱ. 컴아트 그룹의 형성과 시대적 배경



 지리적으로 볼 때, 수원은 서울에서 약 백리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이다. 수원은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당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은 떡전거리(병점)에서 떡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수원에서 하루를 묵었다. 수원에서 한양까지는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수원은 예로부터 숙박업이 번성했다.

 이러한 수원의 지리적 특성은 현재에도 별 변함이 없다. 서울의 위성도시 중 하나인 수원은 특히 교육과 문화, 그리고 예술에 관한 한 많은 것을 서울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지하철과 전철,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의 발달은 예술의 향수 측면에 있어서 지나치게 서울에 의존하는 경향을 가져왔고, 이는 상당기간 동안 수원이 미술의 불모지대로 남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의 기억으로도 1970년대 초반 인구가 17만 명에 달한 수원시에는 단 한 개의 화랑도 없었으며,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이층으로 된 수원문화원의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이 유일했다.4) 그러나 이처럼 열악한 문화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훗날 ‘컴아트 그룹’과 ‘슈룹’으로 통칭되는 전위예술의 맹아가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잠복하고 있었으니5), 이는 그 때 당시의 전국적인 미술계 상황에 비추어 봐도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컴아트 그룹6)은 1990년 1월 1일, “민족정서의 대중 소통을 통한 진정한 예술의 기능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이경근, 김석환, 홍오봉, 황민수, 허종수, 최병기 등이 경기도 수원에서 결성한 미술단체이다. 당시 이들이 생각한 컴아트 그룹 창립 취지의 핵심은 ‘소통’이었다. 이는 소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communication’을 예술을 뜻하는 ‘art’와 결합, 영어권에서는 관례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 신조어를 창안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당시 이들이 주장한 ‘교감예술(communication art)’이란 대중에게 예술의 충격적 체험을 통해 지루한 일상적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러한 예술의 기능이 ‘민족정서’와 어떤 구체적인 관계가 있는 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거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무튼 대중적 삶의 의식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컴아트 그룹이 지닌 이러한 성격은 그룹의 이론적 대변인 역할을 한 최병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오늘 날의 공중(公衆)은 과거의 공중과는 달리 계층의 간격은 이미 없어졌다. 작가는 공중에 대한 새로운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 고상하고 일상적인 세계에서 탈피해야 하며, 새로운 충격과 체험을 통해서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예술가와 공중의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예술행위는 삶 자체의 조화이며 생성력이다. 수동적인 관계가 아닌 보다 적극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보다 높은 삶을 창조하는 체험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와 예술과 공중은 단절이 아닌 소통을 통하여 일체감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위치에 커뮤니케이션, <교감예술>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7)



 그러나 비록 대중(공중)과의 단절이 아닌, 소통과 교감을 부르짖었지만 대중과 작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여전히 존재했다. 실험과 전위정신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추상을 비롯하여 설치, 오브제, 퍼포먼스와 같은 난해한 작품을 하는 한, 대중은 그런 미술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대중과 예술 간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컴아트 그룹이 택한 전략은 야외로 진출해 대중과 직접적인 소통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룹 활동의 초기에 컴아트 그룹은 수원시 북문 근처에 있는 장안공원에서 교감예술제를 개최하는 등 전시장과 야외를 오가는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8)   

 컴아트 그룹의 초창기 연혁을 살펴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왕성한 전시의 조직과 참여이다. 이들은 그룹이 창립된 1990년 1월 1일 이후 《’92국제교감예술제》가 열리는 1992년 8월 8일까지 채 2년이 못되는 기간 동안 무려 스물여섯 차례에 걸쳐 전시를 기획하거나 다른 전시에 참가하는 실적을 보여주었다.9)

 이경근을 비롯한 컴아트 그룹 회원들은 1991년 행궁 근처에 장안미술관을 개관하고 이를 본부로 사용하는 한편, 직접 전시장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등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COM-ART STUDIO를 장안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명칭과 운영방식에 있어서 진일보된 전진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컴아트 그룹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국제적 네트워크의 구축이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가 본격적인 실효를 거둔 것이 1993년 북경에서 열린《북경 한국 현대미술의 육성(肉聲)-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전》10)이었다.

 



Ⅲ. 컴아트 그룹과 퍼포먼스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볼 때, 컴아트 그룹의 결성은 작가 주도의 미술운동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태동되었다는 사실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는 8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맹렬히 활동하던 현대미술 계열의 단체들이 점차 소멸되기 시작함과 동시에11) 1990년을 기점으로 신세대 미술경향을 대표하는 단체들이 태동되던 시기와 일치한다.12)

 컴아트 그룹이 결성된 후 가진 첫 전시는 수원 선화랑에서 열린《다섯 칸전》(1991. 1. 18-1. 23)이었다.13) 이 전시는 전시장에 다섯 개의 부스를 마련하고 이경근, 홍오봉, 김석환, 황민수, 허종수 등 창립멤버들이 각각 부스 1개씩을 차지하여 회화, 입체, 설치, 퍼포먼스 등 실험적인 성격의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선화랑은 수원시내의 중심지인 남문 근처에 있었다. 이 전시에서 허종수를 제외한 이경근, 홍오봉, 김석환, 황민수 등은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였는데, 당시 경인일보는 “수원 선화랑에서 수원 최초의 퍼포먼스가 공개되다”고 소개하였다.14) 당시 이 전시에 직접 참가한 적이 있는 홍오봉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경근은 앞서 언급된 것처럼 <선에 대해>라는 주제 아래, ‘기운에 관한 평면으로부터 입체’라는 다소 조형적인 미감이 가미된 즉흥 퍼포먼스를, 그리고 홍오봉은 <비밀 드로잉>이라는 주제 하에, ‘만남, 진행, 헤어짐 그리고 비밀’이라는 개념으로 디자인된 드로잉 퍼포먼스를, 김석환은 자신의 설치작품 앞에서 <재생>이라는 주제아래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되는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퍼포먼스를, 황민수는 ‘자연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다시 생성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지럽게 다가온다.’라는 개념으로 가공된 <자전멀미> 퍼포먼스를 펼쳤다. 허종수는 설치작품만 발표하고 퍼포먼스는 하지 않았는데, 홍오봉의 드로잉 퍼포먼스 때 협연을 했다. 그의 설치작품 주제는 <진단-도피하는 사람에 대한>이다.”15)



 이 전시에서 이들이 발표한 퍼포먼스가 ‘수원 최초’라고 매스컴에 의해 소개되긴 했지만, 한국 행위예술의 전체 역사를 놓고 볼 때 90년대 초반에 컴아트 그룹을 중심으로 시작된 수원의 퍼포먼스는 기실 매우 늦은 편에 속한다.16)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점에 대해 90년대 초반 당시 컴아트 그룹의 창립 멤버이면서 그 이전부터 퍼포먼스를 발표한 바 있는 홍오봉에 의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컴아트 그룹의 핵심 멤버인 이경근, 김석환, 황민수 등이 처음부터 퍼포먼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나, 퍼포먼스를 접하면서 새로운 표현형식에 급격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90년대 초반에 이경근, 김석환, 황민수, 홍오봉 등 컴아트 그룹의 멤버들이 교감예술제를 통해 수원에서 퍼포먼스를 확산시킨 이면에는 퍼포먼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17)

 8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김석환, 황민수, 이경근 등은 각자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김석환은《앙데팡당전》을 비롯하여《’86 여기는 한국전》18) 등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이경근은 오산에서 미술학원을 경영하다 80년대 후반에 수원으로 합류, 컴아트 그룹을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19) 당시 수원에는 전위미술을 하는 실험작가들이 희귀하였다. 훗날 ‘슈룹’의 중심인물이 되는 김성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한편, 독학으로 현대미술 이론을 공부하는 등 수원에서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를 거부한 채 일본어를 배워 피에르 카반느(Pierre Cabanne)가 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의 대화』 일본어판을 번역, 손으로 직접 쓴 소량의 복사본을 출간하여 주변의 지인들에게 돌렸다.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개념미술에 깊숙이 경도돼 있었으며, ‘우주’를 꿈꾸는, 기발한 상상력과 실천력을 지닌 무명의 작가였다.20) 

 김석환, 황민수, 이경근, 홍오봉 등등 컴아트 그룹의 창립 멤버들과 훗날 슈룹21)의 중심인물이 된 김성배와의 만남은 컴아트 그룹과 슈룹이라는 전위적 단체의 결성을 가져왔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의 친교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기획한 《그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다전》은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들의 활동상을 회고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새기는 한편,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헌정하는 성격의 전시이다.





Ⅳ. 국제적 네트워크의 구축과 가시적 성과들



 1992년, 평면(painting), 입체(objet), 행위(performance), 영상(media art) 등 4개 분야에 총 200여 명의 작가들이 초대된 《’92 교감예술제》22)는 장안미술관에 본부를 둔 컴아트 그룹이 총력을 기울여 기획한 전시회였다. 이 무렵에는 그룹의 대표인 이경근의 지휘 아래 외부적으로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위한 국내외 인맥의 구축에 힘쓰는 한편, 내부적으로 김석환과 황민수 등에 의해 그룹의 안 살림이 꾸려지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열악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이승택, 이반, 이건용(이상 작가), 박래경, 오광수, 김영재, 윤우학, 윤진섭, 정준모(이상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심우성(민속학자), 강인섭(시인, 국회위원) 등등을 자문위원으로 섭외, 초대하는 한편, 도록 제작 및 행사진행을 위해 수원의 기업인들을 후원인으로 영입하였다.

 지역의 그룹이 지닌 태생적 무명성을 보완하기 위한 전략은 이승택, 이건용, 이반 등등 전국적 지명도를 지닌 원로 중진작가들의 영입으로 가시화되었다. 이들은 컴아트 그룹을 알리는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었다.23)

 컴아트 그룹의 한중 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선족 사람인 강명(姜鳴)이다. 중국문화부 소속의 고위직 공무원인 그는 90년대 초반 한국 문화부에 파견을 나와 있었는데, 어떤 경로로 수원의 서광학교24)에 근무하던 이경근을 만나게 돼 얼마 후 중국교류의 물꼬를 트는 단초가 되었다.25) 이 무렵 나는 수원을 독일의 카셀처럼 아시아 현대미술을 위한 전초기지로 키우기 위해 수원시가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컴아트 그룹을 지원할 것을 주장하였다. 

 

 “수원을 국제전의 개최장소로 만들자. 수원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성(城)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이다. 매우 보존이 잘 된 성곽이 시내의 중심을 감싸고 있어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돋보일 뿐 아니라, 주변에는 영릉과 세마대, 용주사, 신갈저수지, 용인자연농원, 민속촌 등등 관광자원과 위락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천혜의 관광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 각국 간의 ‘문화전쟁’ 양상을 살펴볼 때, 우리나라도 이제는 세계적인 차원의 국제전을 설립, 가꿔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도 기껏해야 하나의 미술관에서 단독으로 치르는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아 2년 내지 3, 4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제전 같은 것을 말이다..... 도시 외곽의 넓은 초원에 전시촌을 짓고 그 주변을 수백만 대의 T.V로 ‘T.V 장성’을 쌓는다면 밤에는 장관을 이룰 것이다. 나아가서 도시 전체를 전시장으로 삼아 원하는 작가에게는 얼마든지 작업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을 영구보존한다면 일거양득일 것이다.”26)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수원시는 컴아트 그룹과 같은 선진적 사고와 열정을 지닌 단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만일 그 때 컴아트 그룹을 문화예술의 전진기지로 삼아 치밀한 정책적 뒷받침을 했다면 오늘날 수원이 예술의 메카로 명성을 떨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고난에 찬 컴아트 그룹의 6년사는 꿈과 열정, 그리고 에너지로 뒤범벅이 된 채 급기야는 내장의 파열로 인해 무너진 성장과 해체의 과정이요, 에너지 소진의 역사이다.

 컴아트 그룹은 역사적인 중국 진출을 위해 1993년 1월 5일 자정 수원의 장안문에서 출문제의(出門祭儀)를 갖고 북경을 향해 출발하였다.27) 중국문화통사 초청으로 이루어진《북경-한국현대미술의 육성(肉聲) -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전》은 회화를 비롯하여 입체, 설치,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등이 총망라된 전시로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현대미술 교류를 지향할 것”을 모토로 한 컴아트 그룹의 실험과 도전 정신을 담고 있었다. 이 전시를 위해 컴아트 그룹의 대표인 이경근은 장소확인 및 사전조율을 위해 한 해 전에 북경을 방문한 바 있었다28). 이경근을 비롯하여 김석환, 황민수, 김중, 홍오봉, 신묘숙, 이경원, 김무범, 이상진, 박병욱, 서길호, 안영준, 나길수, 유동일, 박용국, 정재영, 최효원 등 현지 참여작가들은 중국미술관과 인근에 있는 중앙미술학원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당시 세계일보는 “참여작가 중 이승택 씨는 현지에서 수집한 나무를 이용해 설치 <교(橋)>를 제작하고, 정재영, 신묘숙, 유동일, 박용국 씨 등도 작업현장에 있는 돌, 나무, 흙 등으로 대형 설치물을 세울 예정이다. 또 박병욱, 이경근, 홍오봉, 김석환 씨 등은 춤, 컴퓨터, 회화, 사진, 비디오, 산업 부산품 등을 이용해 설치작업과 행위미술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밖에 김중, 최효원, 주윤균, 이경원 씨 등은 아크릴, 유채, 염료, 한지 등을 이용한 4미터 회화를 각각 2-3점씩 출품한다.” 29)고 보도하였다.

 참여작가들은 1993년 1월 6일 0시를 기해 인천항에서 천진항으로 가는 선상에서 이번 행사의 내용이 담긴 디스켓을 서해바다에 수장(水葬)하는 퍼포먼스를 행하였으며, 또한 북경전을 기록한 영상을 가지고 시사회를 포함, 귀국전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30) 이때의 활동상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1월 9일부터 18일까지 필자는 북경소재 중국미술관에서《북경 한국현대미술의 육성-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라는 전시명으로 열린 바 있는 행사에 커미셔너의 자격으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한ㆍ중 교류전의 일환으로 중국문화부 소속 중국문화통사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행사는 작년 역사적인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래, 문화행사로는 가장 본격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곳의 국립미술관에 해당하는 중국미술관에서 전시회가 개최됐다는 사실이 그것이요, 그 다음은 그곳 문화부의 공식적인 초청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게다가 아직 개방의 열기가 무르익지 않은 그곳의 사정을 감안할 때, 한국의 현대미술이 대거 중국에 선보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적’인 의미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을 중국에 소개했다는 점에서는 문화외교적인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이렇다 할 지원이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국제교감예술제》를 개최하는 등 괄목할 만한 행사를 기획해 온 컴아트 그룹의 끈질긴 자생력은 민간차원에서 국제전을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이번 행사는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본다.”31)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컴아트 그룹 회원들보다 하루 늦게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거쳐 북경에 들어간 나는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호텔에서 이들을 만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경공항은 중국이란 대국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무척이나 소박해 보였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영접하는 안내원을 따라 공항 밖으로 나오자, 어두컴컴한 겨울 밤거리 반대편에 한국의 ‘LG’와 ‘SAMSUNG’의 거대한 입간판이 밝게 빛나고 있어서 자부심에 마음이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북경의 거리 풍경은 60년대의 서울을 연상시켰다. 황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정초의 쌀쌀한 북경 날씨는 몸과 마음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죽의 장막에 의해 가려져 온 신비의 나라 중국은 그렇게 초행길인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중국문화통사의 부장 직책을 지닌 강명(姜鳴)은 유일한 대(對)중국 접촉 창구였다. 내일의 일이 불투명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시와 기자회견, 세미나 등 제반 행사들이 속속 실천에 옮겨졌다. 기자회견장에는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기자들이 참석했으며32), 리시엔팅(栗憲庭), 인슈앙시(殷桑喜), 인진난(尹吉男) 등 중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들과 왕광이(王廣義), 송똥(宋冬), 왕루엔(王魯炎), 왕지안웨이(汪建偉), 구더신(顧德新) 등등 오늘날 스타급으로 성장한 중국 작가들이 전시의 개막식과 세미나에 참석,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북경 수도사범대학의 강당에서 열린 한중 세미나에서 발표한 ‘21세기 동양의 문화적 지평을 위하여’란 제목의 강연에서 “서구 열강에 대한 문호 개방이라는 근대사적 사건이 동양 3국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이슈는 민족적 정체성(national identity)의 확립”이라고 강조하며, 앞으로 한ㆍ중ㆍ일 3국이 미술을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공동으로 서구에 대응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은 천안문 사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안경찰은 군중집회에 민감했기 때문에 이승택을 비롯하여 김석환, 황민수, 홍오봉, 박창식 등 퍼포먼스 작가들은 각자 게릴라식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 천안문광장을 비롯하여 만리장성, 자금성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으로 즉흥 퍼포먼스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령 이승택은 천안문 광장에서 지구 풍선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가는 사진을 펼치거나, 거대한 지구 풍선을 자전거에 싣고 거리를 달리는 퍼포먼스를 행했으며, 김석환은 새 모양의 연을 사서 탯줄을 온몸에 칭칭 감고 자유와 해방에 대한 염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만리장성에서 이경근은 진한 라이반을 쓴 채 신문지를 온몸에 칭칭 감았으며, 황민수는 머리와 얼굴에 하얀 면도 크림을 듬뿍 바르는 행위를 보여주었다. 만에 하나 콘돔을 불어 풍선을 만드는 홍오봉의 퍼포먼스가 공안의 눈에 띄었더라면 아마 연행되었을 지도 모를 긴장된 상황이었다.

 



Ⅴ. ‘지금, 동(東)의 꿈(夢)’과 한ㆍ중ㆍ일 미술인들의 역사적 만남



 1994년, 역사적인 한ㆍ중ㆍ일 3국 작가들의 북경 해후(邂逅)는《지금, 동의 꿈(Now, Dream of East)》이란 제목의 전시를 통해 이루어졌다33). 이 전시의 도록에는 수원성의 봉화대 사진이 중앙에 박혀있는데, 이들의 앞으로의 활동을 예견이라도 하듯 다섯 개의 봉화대로부터 흰 색 연기가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 매우 상징적으로 보인다. 

 한국 작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1년 만에 다시 찾은 북경은 비교적 익숙한 편이었으나, 처음 방문한 일본 작가들이나 미술관계자들에게는 생소한 듯 싶었다. 그러나 그 전날에 가진 파티를 통해 급속히 친해진 작가들은 전시장인 수도사범대학 미술관에서 만나 국가별 장소를 정하고 곧바로 작품 설치에 들어갔다. 당시 전시장 풍경을 묘사해 둔 간단한 메모를 근거로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의 왕광이(王廣義)는 인조양털로 감싼 책상 위에 슬라이트 프로젝트를 올려놓고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영상을 틀었으며, 그 앞에는 흰색 털로 덮은 핑크색 의자를 놓았다. 가장 나이가 젊은 측에 속한 송똥(宋冬)은 국수 빼는 기계를 닮은 문서파쇄기를 책상 모서리에 부착하고 손으로 핸들을 돌려 한문으로 된 책을 국수 가닥처럼 길게 파쇄하는 작업을 선 보였다. 한국의 이경근은 2x3미터 크기의 구덩이를 판 뒤 사진을 찍어 확대하고 그 위에 스티로폼 박스를 놓고 물고기 한 마리를 얹어놓았으며, 녹음기로 야한 음악을 틀었다. 박창식은 전시장 벽에 인물사진을 부착한 뒤 전선줄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설치작업을, 김석환은 토르소에 램프를 장착한 오브제 작품을 출품하였다. 일본의 미사와 겐지(三澤憲司)는 일장기와 오성홍기 형상의 장방형 벽을 설치한 뒤 중간 부분에 일장기에서 빼낸 둥근 원반 위에 별을 세워놓았는데,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한ㆍ중ㆍ일 간에 벌어진 25년 전의 일을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때의 일은 그때의 일이고,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일 뿐이다. 당시 중국의 전위작가들은 1989년에 중국미술관에서 벌어진 한 바탕 소동을 겪은 뒤34),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된 상황이었다. 공산당이 인정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미술이라면, 왕광이라든지 송똥이 지향하는 전위미술은 언더그라운드 미술에 지나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중국의 현대미술이 해외에서 각광을 받기 전인 당시 북경 화단의 풍경은 마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한국과 일본에서 온 한 무리의 실험작가들은 반가운 동지들이었다. 뒤를 이어 벌어진 한국과 중국, 일본 작가들의 끈끈한 유대와 결속을 그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빚어진 산물이었다.35)





Ⅵ. 1995년, 컴아트 그룹과 New Asian Art Show



 북경에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눈 한ㆍ중ㆍ일 3국의 작가들은 1년 뒤 일본의 오사카와 동경에서 다시 만났다.36) 일본 전시의 기획은 큐갤러리(Q Gallery)의 사장이자 참여작가이기도 한 우에다 유조가 맡아 전체 진행을 도맡아 했다.37) 이 전시의 특징은 세 나라의 작가들 대부분이 설치, 오브제, 미디어아트(영상) 등 당시 첨단으로 여겨졌던 매체를 사용한 점이다. 지금은 주로 평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왕루엔(王魯炎)은 당시만 하더라도 자전거 실물을 전시장에 배치하는 등 설치와 평면, 미디어가 결합된 작품을 전시하였다. 왕지안웨이((汪建偉)는 2천 년대 중반에 중국의 사회주의적 계몽연극에 뿌리를 둔 영상작업에 주력하였지만, 당시 그는 누르면 소리가 나는, 실리콘으로 만든 귀를 한 무더기 전시장에 진열하는 등 오브제 작품에 빠져 있었다. 당시 중국작가들은 상파울루비엔날레 참가를 계기로 국제미술계에서 성가가 높았던 왕광이(王廣義)처럼 국제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 소위 비엔날레 양식으로 통용되던 오브제, 설치, 퍼포먼스, 미디어아트에 급속히 흡인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과 일본이라고 다를 바 없어서 전시장이 온통 설치작품으로 채워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38)     

 



Ⅶ. 나오는 말



 일본 전시를 끝내고 나서 회원들 간에는 그간의 활동을 둘러싼 여러 갈등들이 표면적으로 노출되었고, 그것은 회원 간의 결속력을 상당부분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회원들의 회비로 유지되던 그룹 활동이 과부담으로 인한 재정적 곤란으로 인해 자금 공급이 원활치 못했던 것도 그룹이 점차 와해의 조짐을 보이게 된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39)

 아무리 원대한 꿈과 확고한 이념을 가지고 출범한 단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와해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를 한국 현대미술사에 비쳐보면 현대미술가협회를 비롯한 50년대의 앵포르멜 단체들이 그랬고, ‘S.T’, ‘A.G’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자연의 이법이다. 컴아트 그룹 또한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줄기의 가는 물이 종국에는 거대한 방파제를 허물 듯이, 컴아트 그룹 역시 내부로부터 붕괴의 조짐을 비치기 시작했다. 1996년, 철거를 앞둔 서광학교의 건물을 이용하여 현장작업을 펼친 컴아트 그룹의 마지막 전시는 어찌 보면 예술을 향한 작가들의 처절한 몸부림, 바로 그것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컴아트 그룹의 작가들은 마지막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허물어져 가는 건물에 마지막 예술적 의지를 투사했다.40)  황사바람처럼 세차게 몰아쳤던 컴아트 그룹 멤버들의 열정적인 활동은 지금에 와서 생각할 때 과연 무엇이었던가? 6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꿈과 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투사했던 그 당시의 청년들이 어느 덧 환갑을 맞이했다. 과연 세월은 가고 예술만 남는 것인가? 

         <수원아이파크시립미술관 주최 <그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다>전 서문, 2017)




1) 윤진섭, 문화계릴라로서의 컴아트 그룹, <미술평단> 1993년 가을호 54-55쪽.
2) ‘겁 없는 전사들’이라는 호칭은 아방가르드가 지닌 본래의 전쟁용어로서의 근원적인 의미로 붙인 것이다. 전위를 의미하는 아방가르드는 군(軍) 대열의 맨 앞에서 적정을 탐지하며 행군하는 병사들을 가리킨다. 1992년 역사적인 한중 수교 이듬해에 열린 《북경 한국 현대미술의 육성(肉聲)-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전》((1993. 1. 9-1. 18, 북경 중국미술관+중앙미술학원 미술관)은 오랫동안 ‘죽의 장막’으로 인식돼 온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중국 미술계에 한국 현대미술이 소개된 첫 사례이다. ‘겁없는 전사들’은 당시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고 한중 현대미술 수교의 첫 물꼬를 튼 컴아트 그룹 핵심요원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빗댄 것이다.    
3) 한국이 대만과 수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수원의 컴아트 그룹이 1993년 1월에 북경에서 한중연합전을 열 때만 하더라도 중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상당히 경직돼 있었다. 한국 작가들에게 ‘죽의 장막’으로 인식돼 온 중국은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였으며, 거기에서 파생된 문제점들은 전시와 세미나, 그리고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 차례에 걸쳐 불거져 이경근, 김석환, 황민수 등 컴아트 그룹의 핵심 멤버들은 이를 해결하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심에는 검열을 비롯한 체제의 문제가 상존했다.  
4) 당시 문화원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는 대부분 중고등학교 미술반 전시회이거나 수원시내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들의 전시들로 이루어졌다. 수원에서 현대미술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결성된 것은 80년대 이후부터이며 화랑의 개설은 크로바 백화점 화랑이 문을 연 1970년대 중반부터 비롯된다. 
5)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 나혜석을 낳은 수원은 그러나 일찍부터 정치적 성향의 단체가 존재했다. 1931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 수원지부가 주최하는 《제1회 프로레타리아 미술전람회》를 공모하는데, 공모 분야는 포스터, 만화, 서화, 사진, 조각 등이었다. 이른바 정치적 경향성을 띤 미술단체의 등장인 것이다.
6) Communication-Art Group/ 약칭 ‘Com-art Group’.
7) 최병기, 현대예술의 재건을 위한 제언, 《’92교감예술제》 도록, 1992, 12쪽.
8) 컴아트 그룹이 개최하거나 참가한 야외전으로는 《제1회 교감예술제》(1990. 5. 7, 수원 장안공원)을 비롯하여 《제1회 교감예술제 야간ㆍ야외 시사회》(1990. 7. 20, 수원 장안공원), 《성곽환경전》(1990. 10. 14, 수원 장안공원), 《제2회 교감예술제](1991. 5. 5, 수원 장안공원),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제》 참가(1991. 7. 14, 공주, 청주), 《’92 겨울 대성리전》참가(1992. 1. 25, 대성리), 《’92국제교감예술제》(1992, 8. 8-8. 14, 수원 장안공원(행위, 입체, 설치)) 등이 있다.
9) 보다 자세한 내용은 ’92 국제교감예술제 도록에 실린 연혁을 참고할 것.
10) 나는 이 전시의 제목을 짓고 팜플렛의 서문을 쓰는 등 커미셔너로서 적극적으로 행사에 동참하였다. 당시 행사를 위한 현지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전시와 세미나, 기자회견과 관련하여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현지 사정 때문에 수뇌부는 북경 체류기간 동안 수시로 회의를 열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거의 군 작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인천항을 출발 천진을 거쳐 북경에 들어간 작가들 보다 약간 늦게 출발한 나는 항공편으로 홍콩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갔다.   
11) 모두 다 열거할 수 없기 때문에 대표적인 경우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난지도 창립전(1985), 메타복스 창립전(1985), 로고스와 파토스 창립전(1986), 인간시대 창립전(1986), 현상전 창립전(1986), 레일리떼 서울 창립전(1987), 뮤지엄 창립전(1987) 등등. 한국미술단체 100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3 참조. 
12)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Sub Club>(1990), <Coffee-Coke>(1990), 황금사과(1990), <OFF & ON>(1990), <New Kids in Seoul>(1991) 등등이 있다.  
13) 홍오봉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다섯 칸의 의미를 밝혀준다. “‘다섯 칸’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5명의 작가들은 갤러리 전시장을 5개의 공간으로 배정한 후, 분할된 공간에 각자의 작품을 배치하고 그에 따른 퍼포먼스를 행했는데, 각각 배정된 공간이 완전 독립된 공간체 미학으로 정리된 곳이라서 퍼포먼스가 참으로 기상천외했다.” 홍오봉, 『경기 퍼포먼스 아트』, 다빈치’ 기프트, 2012, 12쪽. 각 작가의 퍼포먼스 내용에 대해서는 이 책을 참고할 것. 
14) 홍오봉, 앞의 책. 11쪽.
15) 홍오봉, 앞의 책, 11-12쪽.
16) 1967년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에서 무동인과 신전 동인이 발표한 한국 최초의 해프닝 <비닐 우산과 촛볼이 있는 해프닝> 이후 70-80년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의 퍼포먼스는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물론 지역에서도 퍼포먼스가 대구, 부산, 대전, 공주, 전주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유독 수원에서만 60-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퍼포먼스가 발표되지 않았으며, 또한 퍼포먼스 작가도 존재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거리가 서울에서 매우 가깝고 또 많은 작가들이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컴아트 그룹 멤버들에 의해 퍼포먼스가 행해진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기억에도 이들이 20대 초반이었던 80년대 중반에 《’86 행위설치미술제》(서울 남영동 소재 아르꼬스모미술관, 1986)을 비롯하여 많은 행위예술제들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열렸는데, 발표 현장에서 컴아트 그룹 멤버들을 만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는 수원 화단의 보수성을 의미하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7) 홍오봉과의 전화 인터뷰. 2017년 7월 20일 오후 10시 36분(21분 9초). 컴아트 그룹의 창립 멤버 중 가장 먼저 퍼포먼스를 발표한 사람은 홍오봉이다. 1978년에 안치인 등 대전의 <78세대> 퍼포먼스를 접한 바 있는 그는 군대에서 퍼포먼스에 대한 연구를 한 뒤, 제대 후 81년에 결성된 공주의 <야투> 그룹에서 직접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는 당시 행위의 동어반복적인 태도를 태마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수원에 있는 수성중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한 인연으로(1987-1991) 이들과 친교를 맺었다. 홍오봉, 같은 인터뷰. 
18) 1986년 5월 동숭동 대학로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야외설치미술제이다. 필자가 제목을 짓고 도록의 서문을 썼다. 김용문, 강용대, 윤진섭, 박영률, 이호종, 문정규 등 전국에서 12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였으며 다수의 퍼포먼스도 발표되었다.
19) 김석환 전화 인터뷰. 2017. 7. 21. 오전 6시 38분(18분 18초).
20) 경력에 ‘아시아 한반도 생’이라고 밝힌 김성배는 ‘융합 21세기’를 화두로 《안드로메다전》(1982-1983), 《시작회전》(1983-1985) 등을 결성하거나 수리미술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수원을 거점으로 독자적으로 전위미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석환, 이윤숙, 김진로, 장지성 등 초기에는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80년대 후반부터 《’97 청년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 《한국 현대미술의 최전선》(관훈미술관) 등 서울 등지로 활동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21) 순 우리말로 ‘우산’을 뜻하며, 산스크리트어로는 ‘높은 산에서 전체를 조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22) 1992년 8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경기도문화예술회관, 뉴코아수원백화점, 장안미술관, 장안공원에서 열린 국제전 성격의 전시회였다. 200여 명에 달하는 초대작가들을 선정하기 위한 지역별 선정위원을 위촉하였으며, 독일, 대만, 일본, 인도 등 해외 작가들을 섭외하기 위한 선정위원도 위촉하였다.
23) 국제전의 표방과 함께 전국적 지명도가 높은 유명 작가 및 평론가의 영입은 매스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컴아트 그룹의 지명도는 높아갔는데 여기에는 언론의 힘이 컸다. 이들의 활동은 서울의 매스컴은 물론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의 언론에 의해 증폭되었다. 
24) 농아를 위한 특수 장애인 교육기관이며 컴아트 그룹의 대표인 이경근의 부친(한국화가)이 설립자였다. 
25) 황민수와의 전화 인터뷰, 2017년 7월 21일 오전 8시 38분(12분 40초)
26) 윤진섭, 「성곽도시의 전통건축과 관광자원 활용 ‘수원국제비엔날레’」, 가나아트 1994년 1.2월 호.
27) “1993년 ‘닭의 해’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5일 0시, 수원의 중심가에 위치한 장안문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모관대를 비롯한 자유분방한 복장을 한 이들은 젯상(祭床)을 진설하고 출문제의(出文祭儀)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젯상의 한 가운데에는 T.V모니터가 설치되었고, 거기에는 장안문(長安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비춰졌다. 수천 년 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문명과 문화의 전래경로를 거슬러 올라가기 워한 첫 출발의 의식인 셈이다. 대표인 이경근에 의해 제문이 낭독되고 참여작가 전원의 신고를 알리는 절이 행해졌다.

    이들이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행선지를 인천항-천진-북경 간의 수로와 육로를 택한 것은 일종의 역사적인 탐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문화와 중국문화 간의 ‘근친적(近親的)’ 접근을 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교가 되는 셈이다.

     1월 6일 0시, 인천과 천진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선상에서 행해진 하나의 퍼포먼스는 이 행사가 갖는 의미에 상징성을 더하는 것이었다. 대표인 이경근이 참여작가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소지(燒紙)를 올리고, 행사개요가 입력된 디스켓이 든 투명 플라스틱 용기를 서해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 일련의 퍼포먼스는 행사전체를 이벤트(사건)化하려는 이들의 실험정신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윤진섭, 위의 글, 83쪽. 
28) 황민수의 회고. 황민수와의 전화 인터뷰. 2017년 7월 21일 오전 8시 38분.
29) 세계일보, 1993년 1월 9일자 양헌석 기자. 그러나 현지 사정상 작가들의 이러한 계획은 다 성사되지 못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대미술에 대한 중국 당국의 이해 부족이었다. 특히 작품에 대한 검열은 중국미술관에서 일부 구현되지 못한 작품들이 인근에 위치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전시는 파행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 이 귀국전은 당시 필자가 관장을 맡고 있었던 무역센터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에서 2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렸다.
31) 윤진섭, 「소통과 교감을 위한 서주(序奏)-북경 한국 현대미술의 肉聲전」, 미술세계 1993년 3월호, 81쪽. 
32) 컴아트 그룹의 6년에 걸친 활동상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컴아트가 발행한 활동기사자료집(1990. 1-1994. 8)에는 실로 방대한 양의 국내외 기사들이 실려 있다. 지면관계상. 대표적인 해외 언론 기사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Art in America, 1994. March, 석간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1994. 4. 18, 월간 韓國文化(일어판), 1994년 2월호, The Japan Times, 1994. 8. 11, 美術手帖, 1994년 1월호, 信濃每日新聞, 1993. 3. 1, 中國旅遊報, 1993. 1. 28, 등등이다.
33) 전시기간은 1994년 10월 25일부터 31일까지 이며, 전시는 북경 수도사범대학 미술관에서 열렸다. 당시 참여작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왕루엔(王魯炎), 왕광이(王廣義), 왕지안웨이(汪建偉), 구더신(顧德新), 왕유신(王友身), 웨이광칭(魏光慶), 리용빈, 송똥(宋冬)
   한국:이승택(李升澤), 이경근(李勁根), 김석환(金錫煥), 황민수(黃敏秀), 최효원(崔孝媛), 안영준(安泳俊), 최필규(崔弼圭), 최준걸(崔俊傑), 박창식(朴昌植), 김 중(金 中)
   일본:우에다 유조(上田雄三), 미사와 겐지(三澤憲司), 아베 마모루(阿部 守), 니시 마사키(西雅 秋), 곤도 토시노리(近藤等則), 다카하시 칸(高橋 寬), 미야마에 마사키(宮前正樹), 하치야 가즈히코(八谷和彦), 시부야 히로유키(涉谷浩之)
   1994년 10월 25일 오후 4시부터 북경 수도사범대학 세미나실에서 있었던 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한 발표자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리시안팅(栗憲庭), 구시안팡(顧丞峰), 시안지지안(錢志堅), 한국:윤진섭(尹晋燮), 김진숙(金眞淑), 일본:타니아라타(谷 新), 미나미시마 히로시(南O廣)
34) 당시 북경의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현대미술전(Chinese Avant-garde Art)》에서 일어난 한 여성작가에 의한 권총 발사 퍼포먼스를 가리킨다. 이 사태로 인해 중국은 발칵 뒤집혔고, 이후 예술가들을 원명원에 소개한 ‘원명원 사태’를 거쳐 중국의 많은 미술인들이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로 도피하게 된다. 페이다웨이와 후한루는 프랑스 파리로, 슈빙은 미국으로, 카이 쿠오 키앙(蔡國强)은 동경을 거쳐 뉴욕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35) 근 3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이때의 중국측 작가들은 거의 전원이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는 한국의 참여작가들 대다수가 작가로서의 활동을 접은 것과 대조적이다. 이를 보면 당시 중국작가들이 국제전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 지를 알 수 있다. 
36) ‘동(東)의 몽(夢)’이라는 제목의 한ㆍ중ㆍ일 3국의 일본 전시는 1995년 7월 20일부터 8월 3일까지 오사카의 기린플라자에서 열렸으며, 다시 동경의 재팬파운데이션 미술관으로 옮겨 8월 23일부터 9월 5일까지 심포지엄과 함께 열렸다. 당시 참여작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국:왕루엔(王魯炎), 왕지안웨이(汪建偉), 웨이광칭(魏光慶), 왕유센(王友身), 왕광이(王廣義), 송똥(宋冬), 이용빈(李永斌), 줄리아 니 추(邱久麗), 양준(楊君). 한국:이경근(李勁根), 김훈(金勳), 박창식(朴昌植), 황민수(黃敏秀), 전수천(全壽千), 권여현(權汝鉉), 안필연(安畢姸), 이불(李昢), 김경한(金璟漢). 일본:아베 마모루(阿部 守), 니시 마사키(三澤憲司), 다카하시 칸(高橋 寬), 우에다 유조(上田雄三), 미야마에 마사키(宮前正樹), 하치야 가즈히코(八谷和彦), 사이토 미나코(齌騰美奈子), 나카야마 다이수케. 한국의 참여작가 명단을 보면 김석환 등 컴아트 그룹의 멤버들이 빠지고 대신 한국 미술계에서 지명도가 높았던 작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데, 당시 참여작가 선정을 둘러싸고 대표인 이경근과 김석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 필자는 이 작가들을 섭외하는 커미셔너로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37) 1992-3년 무렵, 컴아트 그룹의 대표인 이경근이 일본에서 개인전을 갖기 위해 일본에 갔는데, 이때 그는 우에다 유조와 만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돼 일본과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 같다고 김석환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김석환과의 전화 인터뷰.  
38) 당시 평면 작품을 출품한 작가는 이경근(회화+오브제), 권여현, 황민수, 중국의 양준, 그리고 일본의 니시아 추 정도였다. 
39) 김석환, 황민수와의 전화 인타뷰. 당시 황민수는 총무를 맡고 있어서 내부 사정에 밝았다. 과도한 재정적 부담 때문에 94년 이후에 그룹을 떠났다는 홍오봉의 진술도 신빙성을 더한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부유한 편에 속했던 대표 이경근이 경비를 상당 부분 부담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40) 이 전시는 그해 월간미술이 주최한 월간미술대상 전시기획 부문의 장려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이 전시의 개요와 참여작가 명단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96 수원 국제교감예술제  일시:1996년 12월 7일부터 12월 21일까지  장소:수원 서광학교 철거건물 임시전시장, 컴아트갤러리
   한국: 이승택, 이경근, 박창식, 이용찬, 최필규, 황민수, 박인철, 정재철, 박근용, 권여현, 허진, 이재복, 사석원.
   중국: 주신시(朱金石), 구더신(顧德身), 이용빈(李永濱), 인슈젠(尹秀珍), 송똥(宋冬)
   일본: 오쿠보 에이지, 사이토 미나코, 후지모토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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