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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을 토대로 한 단색의 세계

윤진섭

원형을 토대로 한 단색의 세계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윤양호는 유년시절 사방이 탁 트인 김제평야를 보며 자랐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과 맞닿은 들판의 지평선은 어린 소년에게 신비스런 미감을 가져다주었다. 사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들판의 모습은 훗날 작가로 성장한 윤양호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단색의 거대한 화면을 두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단순한 구성을 취하는데, 이는 어렸을 때 본 김제평야의 모습에서 그 연천을 찾을 수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유년기는 창작의 모태이다. 어릴 적에 본 풍경이나 사물은 깨끗한 백지상태(tabla rasa)인 두뇌에 저장돼 있다가 훗날 어떤 계기를 통해 발현된다.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다보면 정작 작가 본인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윤양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윤양호가 자주 사용하는 단순하고 절제된 추상형태의 이미지들은 단색화의 요소들을 만들어 가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는 바, 이는 자연에 변화를 토대로 두고 있으며 작품에 자주 표현되는 청색은 우주를 표상한다. 그가 어렸을 적 고향 마을에서 본 여름날의 끝없이 높은 푸른 하늘에서 청색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재료로 사용하는 안료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가장 특성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본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고향의 가을 하늘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과도 같다. 그것은 순수 그 자체이며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상이다. 그것은 환영일까 아니면 실제일까? 어렸을 적 풀밭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소설 제목처럼1), 그때의 그 투명한 하늘은 한 움큼 뜯어 쥐어짜면 파란 쪽물이 주르르 쏟아질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그러니 색을 다루는 화가로서 어찌 하늘이 준 그 느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양호가 그리는 청색 단색화는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대리인이자 청색으로 대변되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통찰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양호가 우주의 절대 침묵에 기반한 무한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이브 클랭(Yves Klein)의 발명품인 IKB(International Klein's Blue)를 사용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2)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브 클랭이 자신의 독자적인 색(IKB)을 통해 우주에 대한 시, 공간 탐색을 시도한 것처럼, 선(禪) 수행을 통해 자아 존재의 가치를 청색의 세계로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Ⅱ.

 고향인 김제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후, 윤양호는 1986년 서울로 유학, 한성대 회화과에 입학,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다. 이 때 그는 자신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인두와 강국진 두 교수를 만났다. 하인두(1930-1989)는 본격 전위미술의 등장이랄 수 있는 한국 앵포르멜 운동의 주역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강국진(1939-1992)은 ‘무’ 동인의 멤버로서 앵포르멜 이후 한국의 해프닝을 주도한 중요한 인물이다. 윤양호가 한성대에 입학할 당시 이 두 사람은 한성대의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국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강국진의 개인 조교를 역임한 그의 이력을 통해 알 수 있다. 

 윤양호가 학부시절에 개념미술에 심취한 사실은 그의 현재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윤양호의 단색 화면이 지닌 개념적 성격은 학부시절 이후 일련의 작품 활동을 통해 꾸준히 이어져 왔는데, 물질의 개념성이 색의 개념성으로 전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비롯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가?

 1990년대 초중반에 윤양호는 볼록거울과 오목거울, 안경 등을 사용한 일련의 오브제 작품을 시도한 바 있다. 이른바 ‘확산’으로 대변되는 볼록거울과 ‘수렴’ 또는 ‘환원’으로 대변되는 오목거울을 대상 세계를 담아내는 매체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거울의 사용 외에도 안경을 캔버스 중앙에 부착함으로써, ‘보는’ 용도에서 ‘보임을 당하는’ 대상으로 탈바꿈한 안경의 사물성과 인식의 가변성에 주목하였다.

 한편, 이 무렵 윤양호는 선어록이나 퇴계 이황의 시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퇴계의 시집에 나오는 ‘퇴계에서’, 라는 시의 한 구절인 “맑은 흐름 굽어보며 날마다 깨달으리라.”(이황), “예전엔 미치광이가 성인이 된다고 들었더니”,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 MOKSA3)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선어록) 등등 그가 화면에 옮겨놓은 글귀들은 비록 개념어의 나열은 아니라 할지라도 일단의 작가적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독서와 사고를 바탕으로 단색에 대한 실험을 통해 윤양호가 점차 색의 개념성에 천착해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개념미술이란 가령 조셉 코주스(Joseph Kosuth)의 경우처럼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과 개념을 밝히는 일에 있다기보다는 예술 표현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선 수행의 방편으로써4) 색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전에 이루어진 일종의 자아모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라든지 오브제와 같은 개념적 매체들에 대한 실험은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했다. 1993년에서 95년에 이르는 시기에 윤양호는 매체 실험을 하는 동시에 색과 형에 대한 실험도 병행했다. 

 윤양호가 처음으로 단색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흰 광목 천에 검정색 원을 그린 연작을 제작한 1994년이었다. 사진을 통해 본 바로는 벽에 7점(180x180cm)의 같은 크기의 작품이 걸려 있고 바닥의 중앙에 한 점이 놓여 있다. 이것이 윤양호의 최초의 단색화 작품이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색으로 제작한 경우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청색 계열의 단색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윤양호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를 보면,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2년 전이다. 그는 1996년에 독일로 가서 국립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석사와 박사(2002) 과정을 마쳤다. 그는 약 20여 년간 독일에 머물며 수차례에 걸쳐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한국에 귀국한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해서 독일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비록 몸은 독일에 있었지만 당시 윤양호의 의식을 점유한 것은 동양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먹과 번짐을 통한 추상적 회화에서 발현되었다. 이 무렵이면 윤양호는 오브제와 언어로 대변되는 개념미술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먹과 번짐에서 나타나는 우연과 필연의 관계성 속에서 내면적 의식의 표현 쪽으로 점차 표현의 방식이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의 실험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단색 실험의 바탕이 된다. 서양화를 전공한 윤양호가 동양미학과 철학에 깊이 빠진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지만, 유럽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동양의 정신을 반추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동양화론의 중심이 되는 석도의 일획론(一劃論)과 사의(寫意)를 자기 예술 표현의 중추로 삼았다. 그 표현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먹이 종이나 천에 번지는 선염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물의 양에 따라 조절되는 선염법은 먹을 머금은 모필이 종이에 스치는 속도와 힘의 강약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게 되지만 여기에는 물의 작용에 의한 우연의 효과도 따른다. 즉 작가가 나타난 결과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형태를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양미학이 지닌 이 비결정적 요소는 퍼포먼스와 같은 첨단의 전위적 실험에서 나타난 비결정성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동양예술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윤양호가 동양미학의 이러한 성격에 주목한 사실은 미래에 나타날 단색화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Ⅲ.

 윤양호가 태어나고 자란 김제는 평야지대이다. 벼 수확이 다가올 무렵이면 들판은 온통 황금색으로 빛났다. 이때 받은 인상은 윤양호의 그림에서 훗날 황금색 단색화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풍요를 의미하는 황금벌판의 이미지가 그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5) 어린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들판을 쏘다니면서 메뚜기를 잡는가 하면 개천에서 물놀이를 하며 기나긴 여름 한 철을 보냈다. 동네 근처의 만경강 지류에는 검정빛을 띤 개펄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윤양호는 친구들과 함께 벌거벗은 채 부드러우면서도 찐득한 개펄에 몸을 던졌다. 자연에 몸을 맡기는 이 원초적 행위는 일종의 퍼포먼스와도 같다. 시커먼 뻘밭에 온몸을 던져 흙을 짓이기거나 누비는 소년들의 이 천진한 몸짓은 그 자체 행위의 원초성에 대한 희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양호가 모래를 사용한 두터운 질감의 작업에서 이 원초적 행위성을 끄집어 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천진난만했던 소년시절에 만경강 개펄에서 벌인 이 몸의 축제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행위가 지닌 원초성은 곧 회화를 비롯한 예술의 시원(始原)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랄 수 있다. 그는 붓과 먹을 중심으로 한 수년간에 걸친 실험을 거친 후에 적과 청, 갈색과 금색을 중심으로 한 단색의 실험기에 접어들었는데, 그 중심에는 늘 이 행위의 원초성이 자리 잡고 있다. 행위의 원초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를 통한 예술의 근원을 일컬음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의 한 구절에 빗댄다면,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는 명제의 성립도 가능하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 보면 언어 이전에 행위가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른다. 언어는 인류가 고안해 낸 것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행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양호가 이 행위의 원초성, 다시 말해 예술의 시원을 문제 삼은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에 개펄에서 경험한 흙장난은 단순한 놀이 이전에 놀이의 원초성에 대한 희구의 몸짓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 놀이의 미니멀한 요소가 현재 윤양호의 단색 화면에 일종의 화두처럼 남아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Ⅳ.

지난 25년에 걸친 윤양호 회화의 기조는 정신성의 추구이다. 이는 단색화 작가들이 추구하는 공통적 특징이며, 그는 이러한 정신성을 미학적으로 정립하는 노력 또한 병행하고 있다.

 윤양호가 자신의 정신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형은 원형이다. 그것은 그의 화업(畵業)의 바탕을 이루는 도형으로써, 그 자신이 자주 일컫는 선(禪)의 화두가 되고 있다.

윤양호는 선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과 단행본을 저술할 정도로 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를 자기 작업의 미학적 바탕으로 삼을 정도다. 특히 그는 선을 동양과 서양의 접점으로 인식, 이에 바탕을 두고 작업을 한 서양의 작가들, 즉 이브 클랭(Yves Klein)을 비롯하여 볼프강 라이프(Wolfgang Leib), 리차드 롱(Richard Long) 등등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오늘날 서양에 미치고 있는 동양 문화의 영향, 예컨대 명상센터를 비롯하여 선방, 요가 등등이 서양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동양적 직관과 마음이 중심이 되는 명상의 세계로 전이되는 문화적 상징임을 체험적으로 파악하였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하는 윤양호는 예술의 창조와 감상이 곧 마음의 작용임을 굳게 믿는다. 이것이 그의 회화의 바탕이며 특성이다.

 윤양호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원형상의 출처가 자연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진이 그의 팜플렛 한 면에 실려 있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그것은 호수의 수면에 떨어진 물체가 원형의 자취를 남기는 장면이다. 어떤 무거운 물체가 물에 떨어지자 그 충격으로 물방울들이 솟구치는 이 장면은 하나의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윤양호는 거기에서 세상의 어떤 이치를 본 듯하다.6) 그가 도형적 완벽의 극치랄 수 있는 원에 관심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은 곧 우주의 본질에 대한 표상적 접근을 원형을 통해 가시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것이 보다 고양된 예술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비단 형뿐만 아니라 색, 공간,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예술가 자신의 높은 정신적 품격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아우라가 관건이다. 그러니까 윤양호의 저 단순한 구성과 순수한 색채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결국 이러한 요소들을 앞에 놓고 작가가 벌이는 싸움인 것이다. 한국 단색화의 요체 가운데 하나가 정신성임을 감안한다면, 전기단색화건 후기단색화건 간에 수많은 작가들 작업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바로 이 고양된 정신성의 확보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정신성의 성패 여부를 가르는 요인이 바로 작품의 품격인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말한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의 정신과 흡사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 윤양호는 매우 오랫동안, 그리고 매우 집약적으로 원을 모티브로 한 작업에 매진했다. 표현 방법론이나 재료, 색채를 달리하면서 다양한 시도와 접근을 꾀했다. 그러한 시도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현대회화의 문맥에서 볼 때 그의 작업을 순전히 동양적 선(禪)이나 명상의 측면에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른바 모더니즘 회화의 맥락에서 형식주의적 접근의 가능성도 열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폭넓은 해석은 이처럼 양가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때 보다 풍부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나친 선(禪) 중심적 해석은 작품의 가치를 협소하게 가두는 역기능을 할 소지가 있다.

 윤양호가 사용하는 주요재료는 돌가루, 모래, 안료 등이다. 특히 청색은 이브 클랭이 발명한 IKB(International Yves Klein's Blue) 안료를 사용한다. 그는 이 안료를 구입하여 적당한 비율을 섞어 직접 물감을 제조한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이 물감을 사용하면서 체득한 경험을 살려 매우 다양한 색가(色價)를 지닌 청색을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카메라는 윤양호 작품의 원래 색을 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관객들은 불편해도 직접 원화를 봐야 색채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윤양호는 한지를 찢어 수없이 중첩시키는 가운데 캔버스에 원형을 그리는 작업을 비롯하여 먹의 번짐을 이용한 원형 작업 등 다양한 방법론을 구사하였다. 평평하게 다진 모래판 위에 꼬챙이로 원을 그린 작품에 기원을 둔 이 연작을 통해 윤양호는 어김없이 원형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근작은 그 연장으로써 체로 거른 고운 모래를 미디엄에 섞어 캔버스에 바른 뒤 그 위에 청색 안료를 수십여 차례에 걸쳐 칠해 독특한 질감을 얻어낸 것이다. 윤양호는 그처럼 조성된 바탕에 수많은 붓질을 통해 행위성이 강조된 화면을 창출하거나, 꼬챙이로 원을 그어 깊은 흔적을 만들고 그 위에 물감을 덮어 예리한 흔적의 표면을 완화시킨다.

  깊거나 옅은 혹은 밝거나 짙은 청색의 다양한 변주를 이룬 대형 작품들을 비롯하여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운 금색 바탕에 활달한 필치로 휘두른 청색 원들, 혹은 역시 금색 바탕에 엷게 흔적만을 남긴 원형의 궤적 등을 특징으로 하는 윤양호의 근작들은 후기 단색화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Ⅴ.

 갤러리 비선재에서 열리는 이번 초대전에서 윤양호는 주로 청색 단색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청색 단색화는 윤양호가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이다. 물론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붉은색과 금색, 갈색 등 다른 색채의 그림도 그린 바 있으나, 이번 전시는 주로 청색 그림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집중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 이전에 살펴봐야 할 것은 윤양호가 왜 그림을 그리는가 하는 점을 알기위해 작가의 발언을 경청하는 일이다. 그는 작가노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수행의 미학이다. 출가자에게 수행은 기본이듯이 나에게도 수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수행은 인식의 확장이고, 그 인식을 통하여 자연과 교감하며 영혼과 소통한다. 

둘째,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사라진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사상과 철학, 문화로 인하여 서로 다르다고 인식돼 왔다......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하고자 하였다.

셋째, 교감의 미학이다. 우리는 복잡다단한 현대생활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내가 작품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서로 공감하는 것.’이다. 안다고 하는 생각을 놓으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혼란스럽지 않다. 우리가 혼란스럽고 불안한 것은 너무 많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감은 아는 것을 내려놓고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윤양호가 자신의 작가노트 속에서 언급한 수행, 동서양의 구분 소멸, 교감의 미학 등은 예술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약 25년에 걸친 윤양호의 작업이 오랜 탐색 기간을 거쳐 이번에 선보이는 것과 같은 청색의 세계에 집중된 정신성을 통해서이다. 자신의 작업이 미술의 현대성의 맥락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이 세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야 하는데, 그 발현이 바로 청색을 통한 교감의 미학인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윤양호는 자신이 사용하는 청색에 대한 참조 물로 이브 클랭의 작품에 대해 언급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이브 클랭의 청색 작품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정신이 ‘허(虛 : void)’에 대한 탐색이었음에 주목하였다. 이는 그가 이브 클랭의 발명품인 IKB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나 그의 정신을 참고삼아 ‘빈 것(空)’의 개념을 자신의 선수행과 연결시켜 작품화한 것 등 자신의 작화 행위에 대한 변(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하에 배태된 관념적 구분을 완화시킴으로써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브 클랭이 일본에 오래 체류하면서 유도를 배운 사실을 주목하고, 그의 유명한 청색 물감(IKB)을 사용한 여성 인체 퍼포먼스가 유도에서 비롯된 사실에 주목한다. 윤양호가 자신이 사용하는 물감이 IKB 안료가루임을 밝히길 꺼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당당함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그가 선 수행이 인식의 확장이며 영혼의 소통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럴진대 그의 영혼은 IKB 물감의 발명자인 이브 클랭과 소통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 공개된 작품은 또 관객과 소통을 이루리라는 희망을 그는 품고 있는 것이다. 이 교감의 미학은 관객참여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더욱 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윤양호가 이번에 발표하게 될 작품은 대형의 청색 그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작품과 관객 간의 교감과 소통, 그리고 나아가서는 치유의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청색을 희망의 메시지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할 때 사람들은 공기 좋은 시골을 찾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그러할 때, 사람들은 반드시 시인이 아니라도 마음속에 이는 상념을 표현하고 싶은 감정에 휩싸인다. 비록 그럴 듯한 문장 한 구절은 표현하지 못 하더라도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분주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뭔가 치유가 되었음을 느낀다. 끝없이 투명해 보이는 청색 하늘이 치유의 효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윤양호의 작품을 보며 하늘을 연상할 수 있다. 커다란 대형의 화면을 가득 채운 청색은 바라볼수록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편안히 호흡을 하는 가운데 멀리 혹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며 천천히 관조를 하면 어느덧 자신이 평상심의 한 가운데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관조는 마음에 이는 잡다한 상(象)과 잡념을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명상의 상태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선(禪)이 추구하는 그 청정무구한 상태에 돌입할 때 제대로 된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선은 인간의 마음이 지닌 기존의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백지상태(tablo rasa)로 돌아간다. 오랫동안 간화선을 수행한 윤양호의 말을 빌리면 “아는 것을 내려놓은 상태”, 곧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화면에서 이미지의 연속된 제거는 결과적으로 텅 빈 화면을 남겨놓게 되는데, 이것이 19세기 중반 인상파의 출현 이래 서양미술이 추구해 온 추상회화사의 골자이다.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에서 출발해 몬드리앙(Piet Mondrian)을 거쳐 이브 클랭(Yves Klein)에 이르는 순수 추상회화의 역사는 훗날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으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그러나 말레비치에서 이브 클랭으로 이어지는 정신성은 미국의 미니멀리즘에 오면 사물의 즉물성으로 대치되기에 이른다. 대량생산을 통한 후기산업주의 체제 아래서 색이나 면, 입체 등은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물감의 사물성이 상기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가 서양 미술사와 다소 겹치는 대목이 있다면 말레비치나 이브 클랭을 비롯한 작가들이 추구한 ‘정신성’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한국의 단색파(Dansaekpa) 작가들이 추구한 것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이브 클랭은 허공을 탐색하기 위해서 몸을 통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자 한 반면, 한국의 전기 단색파 작가들은 금욕이라는 유교적 윤리를 바탕으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수행성을 강조했다.

 윤양호가 작품 제작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 역시 동양회화적 미학과 수행임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는 90년대 중반에 이미 이러한 실험을 숱하게 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물과 언어에 기반을 둔 개념적 요소는 점차 제거되고 반복적 행위에 의한 정신성이 단색에 스며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에는 검정색에 집중하다가 뒤로 갈수록 청, 적, 금색 등 제한적인 색에 몰입하게 된 것은 색이 지닌 정신의 환기 기능에 주목하면서부터이다. 특히 다년간 청색에 몰두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청색이 지닌 치유의 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윤양호의 이번 전시는 작가 개인에 있어서 국제적 도약을 위한 무대이다. 화집 출판과 동시에 대형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이번 전시를 위해 윤양호는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를 해 왔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지난 25년의 화업을 중간 결산하는 이 자리가 화단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게 될지 속단하기에는 이르나, 윤양호는 더욱 세련되고 고양된 작품의 질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줄 안다. 또한 국제화단에서 많은 활약을 기대하며 거기에 상응하는 결실이 맺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윤양호 화집 도록 서문, 비선재갤러리, 2018>  



1) 1976년 아쿠다카와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
2) 윤양호는 독일 유학시절에 퐁피두센터에서 본 이브 클랭의 청색 작품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필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3) ‘깨달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4) 윤양호에게 있어서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선수행.
5) 윤양호와의 인터뷰. 2018년 1월 24일.
6) 그 밖에 윤양호가 원형성의 개념을 상기시킨 물건으로 들고 있는 것은 원형의 필름통 뚜껑과 선창가에서 볼 수 있는 원형의 커다란 선박 고정용 쇠고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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