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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이후

윤진섭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이후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최근 들어 한지‘(Hanji)’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화단의 이러한 추세는 한지 특유의 조형적 가능성과 문화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튼 결과일 것이다. 화단에서 한지에 대한 연구 풍토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이나 그 이전에 선구적인 작업들이 있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권영우(1926-2013)는 일찍이 60년대 초반부터 화선지의 풍부한 조형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를 실험한 결과, 국전에 특선하는 등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서승원은 1971년 [A.G]전에서 가로와 세로가 각각 91센티인 14점의 정방형 한지 연작을 전시, 실험적인 작업의 선례를 보여준 바 있다.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1980년대 초반은 한지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다. 박서보는 캔버스에 유성물감으로 작업을 하던 기존의 <묘법> 연작으로부터 전환,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재료상의 일대 혁신을 꾀했다. 정창섭(1927-2011) 역시 <묵고(黙考)> 연작을 통해 한지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풍부한 가소성을 이용, 독창적인 작업을 일궈나갔다. 단색화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김기린은 그 보다 앞선 1970년대 초반부터 한지를 사용한 작품을 실험했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20-30겹 정도 겹쳐 바르고 검정색 물감으로 칠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은 한지의 풍부한 물성을 실험한 작품들이다. 정영렬(1934-1988)은 1970년대 후반부터 한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초기에는 한지를 일종의 대지로 삼았으나, 80년대에 접어들어 작고하기까지 한지 자체의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이항성(1919-1997)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던 1970년대부터 한지작업에 천착, 여러 종류의 한지를 자유롭게 콜라주하고 그 위에 한자에 근원을 둔 추상적 형태의 이미지들을 그리는 추상화 연작을 제작하였다. 

 위에서 예로 든 선구적인 작업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오래 전부터 한지에 대한 관심과 실험이 면면이 이루어져 왔음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지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와 창작이 보다 심층적이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한지가 작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받는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90년대 초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의 경제성장은 9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열었다. 타임과 뉴스위크를 비롯한 해외 주요 언론의 한국의 경제적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한국이 뉴스메이커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 비로소 한국은 명실공히 대중소비사회에 진입하였고, ‘소비가 미덕이 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때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백화점에는 질 좋은 상품이 넘쳐났고, 쇼윈도우를 장식하는 디스플레이 기술도 선진국 수준을 능가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브생로랑, 루이뷔똥, 베르사체, 샤넬과 같은 외제 상표는 이제 부의 상징이자 사회적 신분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1)



 이 무렵 미술계의 일각에서는 ‘한국적인 것’, ‘전통의 재발견’, ‘한국성’, ‘한국미술의 자생성’과 같은 한국 고유의 미감을 찾기 위한 모색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국제화 시대에 접어들수록 한국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알릴 수 있는 아이콘에 대한 수요와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하회탈이나 색동, 태극문양, 호랑이2) 등등 한국의 상징물들이 여러 형태로 빈번히 나타났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희조형관 주최의 ‘한국성’ 탐구 세미나와 ‘한국미술의 자생성’ 간행3) 등등은 현대적 관점에서 전통과 미술사, 미학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한국미술의 자생성과 국제성을 도모하려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폭넓게 보면 한지에 대한 연구도 미술계에서 일어난 그러한 모색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해 보이지만 연대적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선구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술계에서 한지작업의 맹아는 6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다양한 양상의 작품들이 나타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이하여 백송화랑은 [서울올림픽기념 닥종이 작업전]을 주최하여 한지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모인 한지작가들은 일회적인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결속체의 필요성을 느껴 한지작가협회를 결성, 1990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문철, 박은수, 이선원, 이종한, 조덕호, 최종섭, 최창홍, 한영섭, 함섭 등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지작가협회는 서양화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지의 물성표현에 주력한 작가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한지작가 모임이었다.4) 이들은 캐스팅을 비롯하여 콜라주, 프로타쥬 등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며 한지 고유의 성질과 물성적 특성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협회는 2013년에 해체되었지만 후배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지대했다.5) 



Ⅱ.

 박철은 대표적인 한지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한지의 풍부한 조형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의 표출을 위해 정진해 왔다. 그 이력이 무려 30여 년에 이른다. 화단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 박철은 광목과 화선지를 이용, 먹작업을 하면서 장차 나타나게 될 한지에 대한 실험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업은 한지의 물성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라기보다는 화선지와 광목을 추상작업을 위한 대지로 인식,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박철에게 있어서 한지가 본격적인 물성탐구의 대상으로 전개된 시기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이다. 이 시기에 그가 주목한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떠내는 캐스팅 기법에 적합한 한지의 가소적 성질이었다. 그는 오래전에 안동댐 수몰 예정 지구에서 본, 폐가의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는 맷방석, 멍석, 와당, 문짝 등등의 사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때 받은 깊은 인상을 훗날 한지를 통해 표현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지 캐스팅 작업이다.

 9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박철은 바이올린이라고 하는 서양 악기와 맷방석, 와당의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서 용해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서로 이질적인 조형성의 대비를 통하여 또 다른 미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의도로 해석된다. 전업작가로서 박철이 한지에 기울인 정성과 탐구 의욕은 지난 20여 년간 제작된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부조기법을 통한 다양한 소재와 재료의 변용은 그의 작품에 뚜렷한 미적 차별성을 부여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박철은 서양악기인 바이올린을 일종의 오브제 개념으로 받아들여 이를 캐스팅하는 한편, 뚜렷한 성격의 부조 회화로 승화시켜 나갔다. 날렵한 곡선미가 특징인 바이올린은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인 한지에 서양적 소재를 결합시킨 것으로써, 탁월한 미적 쾌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박철은 그 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의 국제전을 통해 해외에 작업을 알리는 일을 지속해 나갔다. 1990년 힐튼화랑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파리, 네덜랜드, 독일, 캐나다 등 국내외의 화랑에서 초대전을 연속적으로 가졌다. 이 일련의 전시를 통해 박철은 한국의 대표적인 한지작가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부조회화 기법은 특유의 조형성으로 인하여 다른 한지작가들의 작업과 뚜렷한 차별성을 얻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때 나는 박철의 90년대 작업을 가리켜 ‘생성과 소멸’이라는 표제어로 설명한 바 있다.6)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부조의 성질이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문짝, 와당, 맷방석, 멍석 등 그가 주로 등장시킨 사물들은 오랜 시간의 추이를 보여준다. 캔버스에 고정된 사물의 박제된 이미지를 통해 마치 이제 막 태어나거나 수명을 다해 사라지기라도 하듯이 각 개별 사물의 역사를 경험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폐기될 운명에 처한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처연한 인간의 운명을 연상하게 만드는 것 또한 박철의 부조작업이 지닌 힘이다.

그러한 사물의 사물 드러내기가 사물 ‘스스로’의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박철 작업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박철이 사물을 만드는 작업의 과정과 특유의 기법에서 비롯된다. 시멘트 판에 사물을 찍어서 틀을 만든 뒤, 이 판에 한지를 여러 겹 놓고 두드리는 고된 노동을 통해 완성된 부조판을 떼어낸 후 15일간이 작품 스스로 작업을 완성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한지는 온도와 물, 습도 등 자연적 요소의 작용으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박철은 그 과정을 작품이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점에 대해 박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한지가 마를 때까지 자연(自然), 우연(偶然), 고연(古然)을 기다린다.”  

 박철의 이러한 창작 방법론은 한국의 전통 발효문화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위 숙성에 의한 다양한 전통 음식들-가장 대표적인 것들로 메주를 비롯하여 막걸리, 간장, 고추장 등등-은 자연의 이법에 완성을 맡긴다. 박철의 작업은 작품 스스로가 만들어가도록 일체의 개입을 삼간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전통 발효문화와 그 맥이 닿아있다. 박철은 말한다. “그들(자연)이 작품을 잘 완성시켰으면 만족한다.”7)

 사물이 자연과 더불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8)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노자의 사상은 인위를 줄이고 자연의 이법을 존중하는 자연 존중 사상의 핵심이다. “사물을 스스로 있게 하라”는 어사(語辭)에는 될 수 있으면 자연을 다치지 않게 한 선조들의 자연관과 지혜가 함축돼 있다. 한국 전통의 축성술, 건축술, 풍수지리, 조원술, 취락, 의술 등등 광범위한 인문과 과학, 예술이 바로 이러한 자연 존중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가 화학 염료를 쓰지 않고 오배자, 빈낭, 도토리, 밤, 쑥, 소목, 홍화, 황백, 애기통풀 등등 전통염료를 쓰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자연 존중 사상과 관련이 있다.9)   

 이번 큐브미술관 초대전을 통해 박철은 기존의 다색에서 단색으로 선회해 간 시기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행위성이 강조되고 동세가 강한 부조작업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징후로 보이며, 이는 다가올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스타일의 모색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오래 전에 박철의 작업에 대해 쓴 다음의 문장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여겨져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는다.   



 “시간의 흐름을 사물의 존재 양태를 통해 압축적으로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박철의 한지 부조회화의 요체다. 천연의 염색 재료를 사용하여 친환경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박철의 한지 부조작업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상태를 동경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박철초대전 학술세미나 원고>



1) 윤진섭, <한국의 팝아트 1967-2009>, 에이앤에이, 2009, 55쪽. 
2) 가장 희화적인 일화로는 88올림픽을 위해 서울시가 발주한 대형 호랑이 조형물일 것이다. 이 조형물은 한 동안 한강에 방치돼 있었으나 ‘흉칙하다’는 여론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3) ‘한국미술의 자생성’ 기획위원회(위원장 윤범모), <한국미슬의 자생성>, 한길아트, 1999.
4) 박철과의 인터뷰, 2018. 3. 28
5)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지 작가들은 한지작가협회 창립 멤버 외에 김희경, 권영구, 류재구, 박동윤, 박은수, 이건희,  이선원, 이재복, 이종한, 정경연, 조덕호, 등등이 있다.    
6) 박철, “화면의 물체들이 사라졌다 생겨나고 생겨났다 사라지는 여운을 화면에 남겨 생성과 소멸의 영원한 반복과 어떠한 물질이든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퇴화되어 반드시 사라진다는 시간의 진리를 표현하였다.”
7) 박철과의 인터뷰, 2018. 3. 23
8) 노자, <도덕경> 25장.
9) 박철, 작가노트, “우리의 전통 종이인 한지 만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30여 겹의 한지와 자연 재료인 황촉규(천연 접착제)를 혼합하여 견고하게 제작 되었으며 오배자, 홍화, 도토리 등의 천연염료를 사용하여 자연 친화적으로 표현하였다. 멍석의 세부적 형태는 일일이 수작업(手作業)으로 된 인고(忍苦)의 결과물이다. 그 인고의 형태들이 반복되어 오늘의 한국 현대 회화의 특징인 반복, 단순, 간결, 단색 등을 보는 듯하다. 이와 같은 멍석의 형태만을 Canvas에 옮겨보니 멍석이라는 기능적 의미는 사라지고 Texture와 색(色)만 보여 지는 추상성으로 변모 되고 있다.”
이 그림은 이와 같은 한국적 추상성의 표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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