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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행위예술의 흐름과 대전의 새로운 미술운동

윤진섭

한국 행위예술의 흐름과 대전의 새로운 미술운동
[19751225]그룹의 활동을 중심으로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들어가는 말

 현대미술에 관한 한, 대전미술도 이제 천천히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차제에 대전시립미술관이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현대미술의 태동-시대정신전]은 아카이브 중심의 실증적 자료보고전의 성격이 짙다. 과거의 미술을 회고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전 현대미술의 기점을 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를 ‘역사화’하는 일이 이번 전시의 성격과 기능이다. 이러한 사업은 기존에 확보된 역사적 자료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새로 발굴된 자료를 덧붙이거나 혹은 틀린 사항들을 수정, 보완함으로써 보다 엄밀하고 체계적인 ‘대전현대미술사’를 확립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 대전 현대미술 운동의 주역인 작가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함은 물론 미술운동이 벌어졌던 장소들에 대한 탐사와 기록이 필요하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전 국토가 나날이 황폐화돼 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장소’에 대한 아카이브 차원의 기록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다. 

 실험정신에 토대를 둔 전위미술운동과 연관시켜 볼 때, 지역미술은 서울 중심의 현대미술사 기술에서 현저히 배제돼 왔다. 작년에 열린 한 미술사 세미나에서 나는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1) 마치 서울의 미술사가 한국 전체의 미술사이기라도 한 것처럼, 한국 현대미술을 다룬 미술사 분야의 대다수 저작들은 지역의 전위미술을 언급조차 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정보의 부족인가?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어서 인가? 아니면 시기가 아직 미술사가 다루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2)  

 최근에 대구, 대전, 청주, 수원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열린 전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형태이다.3)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세 개의 전시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열렸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역미술이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존의 ‘중앙(서울)과 지역’이라는 양분된 구도를 허물고자 하는 ‘해체’의 징후가 아니겠는가. 서울의 한 변방이 아니라, 스스로 자생력을 갖춘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최근에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동향은 미술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4)   



Ⅱ. 70년대의 이벤트-개념과 행위

 최근 들어서 비평과 미술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한국의 전위미술이다. 비평과 미술사학, 전시기획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 중에 있는 바, 그 중에서도 특히 1960-1970년대의 전위미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시기의 전위미술이란,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점유한 ‘비정형 회화(Informel)’를 극복하고 이른바 ‘탈(脫)평면’을 주장하며 등장한 [청년작가연립전](‘무’, ‘신전’, ‘오리진’ 그룹) 세대를 비롯하여 그 후속으로 등장한 ‘해프닝(Happening)’과 ‘이벤트(Event)’ 등등 일련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활동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니까 최근에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시기의 한국 전위미술에 대한 재조명 사업은 한 편으로는 현재적 관점에서 이 일련의 미술운동에 대한 탐색 내지는 재구성을 통해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묻는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서구의 전위미술과 차별되는 한국 전위미술만의 독자적인 가치와 성격을 구명(究明)하는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질 때 한국 전위미술의 문화적 정체성의 수립은 물론 존재의 당위와 미래적 비전의 설정이 가능하다.

 이 일련의 과업에는 무엇보다 ‘소환’이 필요하다. 소환이란 오늘의 입장과 현실에서 과거의 작가들과 미술운동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아카이브 자료들을 불러내 다시 검토하고, 재해석하며, 기술 내지는 평가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령 70년대의 전위미술은 현재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는지 하는 문제 등등을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에 일고 있는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 등등 작고작가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와 전시기획, 아카이브 구축, 비평 등등은 이런 ‘소환’의 한 예가 될 것이다.5)

 1975년, ‘S.T그룹’의 회장인 이건용이 백록화랑에서 행한 일련의 이벤트‘(Event)’는 1970년에 김구림을 중심으로 한 ‘제4집단’이 사직공원과 광화문 일대에서 벌인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이후, 약 5년간의 공백을 깨고 등장한 행위미술이었다.6) 그보다 1년 전에 성능경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S.T그룹’전에서 전시기간 동안 신문을 벽에 부착하고 기사를 반복적으로 오리는 행위를 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이 ‘이벤트’에 해당하는지 조차 몰랐다. 이건용은 1975년 4월 19일, 백록화랑에서 열린 [오늘의 방법전]에서 두 개의 이벤트를 발표하였는데,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이 그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사물과 행위주체,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서로 교호하는 가운데 벌어진 이 두 작품은 향후 이건용의 트레이트 마크가 된 ‘논리적 사건(Event Logical)’의 맹아가 되었다. 그 후 이건용은 <손의 논리>, <장소의 논리>, <건빵먹기> 등 일련의 이벤트를 통해 신체의 의식, 장소에 관한 논리적 전개를 지속하는 가운데 자신의 방법론을 숙성시켜 나갔다. 그는 배재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논리학을 바탕으로 언어와 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트겐쉬타인(L. Wittgenstein) 등의 저작을 읽는 등 지적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 바, 이는 당시 유행한 개념미술과도 무관치 않다.7)

 한편, 성능경의 <신문 1974 6. 1 이후>는 처음에 오브제 개념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이벤트로 변화해 갔다. 성능경은 이건용, 김용민과 함께 한 [3인의 이벤트]에서 신문을 읽고 면도칼로 오리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신문을 매개로 ‘사건화’하는 작업에 주력해 나갔다. 당시 성능경의 이러한 행위는  현실비판적인 것으로 해석, 서슬퍼런 공안당국에 의해 연행될 소지가 없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난해성이 그런 사태를 피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 시기가 동아일보 광고사태가 난 시점(時點)임을 감안할 때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이벤트를 시작한 이건용과 성능경은 그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점과 예술의 행로를 걸어가게 된다.8) 이건용은 ‘논리적 이벤트’를 기반으로 신체성이 강조된 드로잉을 거쳐 예술가의 의식이 현실과 맞부딪치는 가운데 발생하는 포괄적인 ‘삶’의 문제로 이행해 갔다. 이건용의 이러한 관심은 비단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회화, 오브제, 설치 등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성능경은 ‘신문’을 통한 사회적 비판에서 80년대에 닥친 개인적 질곡과 불안의 시기9)를 거쳐 점차 축제와 놀이정신 속에 감추어진 예리한 사회비판 쪽으로 서서히 선회하고 있다.



Ⅲ. 1970년대 대전의 실험미술-19751225

 황사바람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70년대의 삼엄한 공안정국 하에서 도전과 저항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실험과 전위미술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저항과 도전’이 이루어졌던 시기는 60년대의 해프닝에 해당할 뿐, 70년대의 이벤트는 이러한 정신을 개념과 현학으로 포장, 공안정국의 예리한 검열을 피해나간 일종의 위장술이었다. 가령 이건용의 <이리 오너라>와 같은 이벤트는 그 자체 왕조적 언어가 내포한 ‘절대 권위’에의 풍자로 읽힐 가능성이 있었으며, 성능경의 <신문>은 보기에 따라 정부의 언론 검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위험을 피해나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이들이 사용한 언어와 당대 사회의 평균적인 예술의 독해력 사이에 일종의 ‘코드’의 불일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당시 일반적인 교양의 수준으로 이들이 구사한 예술의 내용을 해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한국 현대미술사 서술에서 배제돼 온 <19751225>그룹의 존재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비로소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는 이번 전시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르뽀동인회>(1976년 창립), <대전 ’78세대>(1978년 창립), <금강현대미술제>(1980-1981)와 함께 향후 한국 현대미술사 서술에서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다.

 교육과 교통의 중심지인 대전에서 현대미술이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싹텄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한국처럼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인간활동의 제부문이 서울에 집결된 근대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볼 때 그 배경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대전이 자체적으로 미술인을 배출하게 된 것은 목원대에 미술과가, 숭전대(현 한남대)에 미술교육과가 창설된 1973년 이후이다.10) 이는 그 이전의 미술인들이 서울을 비롯한 다른 고장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그 만큼 자생력을 갖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대전에서 현대미술의 발생과 정착이 늦었던 이면에는 이러한 사정이 개재돼 있었던 것이다.

 실험과 전위의 입장에서 볼 때, 대전의 1세대 토착 미술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4개의 그룹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대전 출신이면서 대전의 미술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통칭 ‘대전작가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대전에 거주하면서 미술을 연구하는 동시에 향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대전에서 서울은 불과 서너 시간이면 닿을 거리였지만심리적 거리는 매우 멀게 느껴졌다. 문화예술의 중심인 서울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심리적 고립감은 이들을 불안케 했지만, 그 반면에 토착성에 기반한 자생적 가능성 또한 상존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다른 도시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대전 화단 역시 국전풍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화단은 경직되고 작가들 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엄격한 위계가 형성돼 있었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작가들은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혹은 화실의 스승이란 긴밀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지에서 앞선 세대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대전에서 가장 먼저 ‘탈평면’을 주장하며 도전을 감행한 실험집단 <19751225>11)의 존재 의의가 두드러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75년 12월 25일 정오를 기해 이종협, 정장직, 정길호 등 3인이 고루한 평면작업을 박차고 대전역 광장에서 행위를 벌이기까지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기법을 답습하여 작품제작을 하던 고리타분한 관행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12) 당시 이들이 접한 미술잡지는 ‘공간’이나 ‘미술과 생활’이 전부였으며, 정장직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미술수첩’을 통해 해외의 미술동향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19751225>란 그룹의 작명에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1975년 당시 이들 3인은 그룹 이름을 짓는 일에 고심하던 중, 숭전대의 스승인 김수평 교수를 찾아갔더니 ‘조형미술연구회’가 어떤가 하여 이를 사용할까 하다가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에 그룹의 결성 시점을 중요히 여겨 1975년 12월 25일을 합쳐 19751225라는 이름을 부여했다”13)는 것이 이종협의 증언이다.

 ‘조형미술연구회’라는, 제목을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는 진부한 명제와는 달리 이벤트가 벌어진 연도와 달, 날짜를 조합하여 그룹명으로 정한 이들의 의식은 개념적이며 그만큼 ‘모던’해 보인다. 정장직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들은 미술수첩을 통해 개념미술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다같이 캔버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전에는 실험적인 전통이 부재했다. 그런 가운데 ‘S.T그룹’의 멤버인 남상균의 예총회관 개인전은 자극이 되기에 충분했다. 국전 풍의 진부한 구상이 주류를 이룬 당시 대전의 기성 화단은 전위미술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해 있었고, 선후배 간의 인맥과 학연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전위미술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애초에 참여하기로 했던 정길호가 불참한 가운데 이종협과 정장직은 1975년 12월 25일 정오, 대전역 광장에서 사이렌 소리를 신호14)로 행위를 벌였다. 제4공화국의 삼엄한 군부통치 하에서 억눌린 감정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이들은 대전역 광장에 미리 가져간 종이를 여러 장 펼쳐놓고 양 팔을 벌려 소리를 지르거나, 바람에 날리는 종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주변에서 구한 돌을 올려놓는 등 즉흥적인 행위를 벌였다.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들의 이상한 행동에 호기심이 발동한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와중에 누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세 차례나 출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오포 소리에 맞춰 묵념을 올렸다. 언론통제를 비롯하여 검열, 통행금지에 의한 이동의 부자유, 사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 경범죄 단속과 같은 사회적 억압, 반공을 둘러싼 좌우 간의 이념 갈등 등 모든 것이 억압된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보고자 한 즉흥적 행위였다.

 경찰이 물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작가 왈, “예술하는 거다.”, 경찰이 말했다. “이게 무슨 예술인가? 모이면 큰 일 나니, 어서 빨리 가라.”15)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이라 당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대전역 광장 맞은편에 있는 사진관의 사진사를 불러 급하게 찍은 사진 몇 장이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16)  

 <19751225>그룹 멤버들은 1975년과 1976년 두 해에 걸쳐 총 3차례의 행위작업을 수행했다. 첫 번째 행위인 대전역 광장의 퍼포먼스가 해프닝에 가까운 즉흥적인 성격의 것이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퍼포먼스는 보다 짜임새 있고 기획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러한 성격의 차이는 현존하는 사진 자료들로 미루어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전역 광장에서 행위를 벌인 이들은 1976년 1월 18일 대평리에서, 같은 해 2월 15일 내탑에서 두 차례의 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그들은 1976년 5월 7일 대전 소재 홍명미술관에서 열린 <19751225> 창립전 팸플릿에 자신들의 행위가 ‘Event’임을 명기했다. 이 팸플릿에는 대전역 광장의 행위 사진이 빠져있다.

 대평리 행위에 참가한 작가는 유근영, 이종협, 정장직, 정길호 등이다. 1976년에 창립된 ‘르뽀동인회’의 멤버인 유근영이 참여한 것이 이례적이다. 차가운 날씨의 한 겨울에 벌어진 이 행위에서 유근영은 시체 역할을 했다. 높이 치솟은 고가도로 밑에서 전개된 이 행위에서 네 명의 행위자들은 곡괭이로 얼어붙은 땅을 파고 회가루를 뿌린 뒤 구덩이 안에 롤 휴지를 둘둘 감은 시체를 묻었다. 얼핏 이들의 행위는 1968년 제2한강교 밑에서 행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 행위는 내탑에서 이루어졌다. 역시 한 겨울이었다. 서진호, 유근영, 이종협, 정길호 등 네 명의 행위자들이 내탑에서 두 개의 행위를 선보였는데, 첫 번째는 자갈로 이루어진 언덕 중턱에 11개의 나무기둥을 세운 뒤 크기가 서로 다른 종이를 감고 불을 붙이는 행위였으며, 그 결과가 설치미술로 남는 작품이었다.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야외 설치미술은 훗날 1981년에 결성된 [대성리전]과 [야투]에 빈번히 등장한다는 점에서 설치미술의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17) 

 내탑에서 벌어진 두 번째 행위는 강을 향한 바닥에 전체 길이 약 20여 미터에 달하는 전지 종이를 잇대어 깔아놓은 뒤 불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불에 타버린 종이의 파편들은 바닥에 남거나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종이를 눌러놓은 돌들만 남은 흔적이 인상적인 작품이다.18)



Ⅳ. 나가는 말

 대전에서 실험미술의 관심을 가장 먼저 촉발시킨 [19751225]그룹은 선구적인 위치를 지닌다. 이 그룹의 멤버들은 당시 구상 위주의 고답적인 대전 화단에서 도전과 저항의 정신으로 행위를 실행에 옮겼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명칭으로 불러야 하는지 조차 모호한 상태에서 무작정 실행에 옮긴 감이 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진지한 방법론을 모색해 나갔다. 대전역 광장에서의 행위와 이듬해에 대평리와 내탑에서 벌어진 행위가 서로 다른 것은 이러한 모색의 결과에 기인한다. 이들은 세계 화단은 물론 서울의 화단과도 절연한 채 파편화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행위를 펼쳐 나갔다.

 대전역 광장에서의 행위가 미처 정체성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혈기 하나만을 믿고 막연한 감정으로 체제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것이었다면, 대평리와 내탑에서 행한 두 개의 행위는 자연이라는 물리적 토대 위에서 환경을 의식하고 벌인 인간과 자연 간의 대화였다. 이들이 벌인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 자연, 환경, 제도 등등을 둘러싼 인간의 원초적인 갈등과 정서, 감정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이 행위들은 197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대전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시대적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고민과 방황은 동시대 다른 지역의 작가들과 어떤 사유의 공통점을 지니며 어떤 차별점을 지니는지 하는 미술사적 과제에 대해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보다 심도있는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나아가서 이번 아카이브 전시가 지닌 의미라면 바로 이 전시가 이런 궁금점에 대해 해소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은 향후 더욱 심대한 연구로 이어지게 될 것이란 희망을 준다는 점에 있다. 

               <대전현대미술의 태동-시대정신전 학술세미나 원고, 2018>



1) 윤진섭,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미술사학보』, 2017. 12, 미술사연구회, 10-11쪽 참조.
2) 윤진섭, 위의 책, 11쪽에서 재인용.
3) [현대미술의 태동-시대정신전](대전시립미술관, 2018. 1. 19-3. 11),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1부 한국의 아방가르드미술:1960-80년대의 정황, 2부 한국 행위미술 50년, 1967-2017, 대구미술관, 2018. 1. 16-5. 13), [어느 누가 답을 줄 것인가-1980-1990년대 청주미술, 청주시립미술관, 2017. 11. 9-2018. 2. 18), [1980-1990년대 수원의 실험미술-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017. 6. 6-2017. 9. 3) 
4)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1980년대부터 몇몇 미술잡지들은 지역미술에 대한 조명작업을 해 왔다. 『공간』은 1983년 10월호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미술거점도시’를 연재하기 시작해서 부산(1983년 11월호), 전주(1983년 12월호), 광주(1984년 1월호) 등 지역의 대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술현장을 소개하였으며,『미술세계』또한 80년대 중반부터 <이즘과 그룹>, <지역문화의 검증> 시리즈를 통해 전국에 산재한 도시 미술을 다룬 바 있다. 1990년대 초반에 금호미술관은 ‘미술문화의 중앙집중화’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의 작가들을 선정하여 서울에 소개하는《지역미술전》을 지속적으로 개최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197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미술사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는 현상에 비쳐볼 때, 지역미술에 대한 미술사학계의 관심은 여전히 미흡하다 할 수 밖에 없다. 아방가르드 미술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현대미술의 거점도시로 알려진 대구를 비롯하여 대전, 공주, 수원은 눈여겨봐야 할 곳이다.” 윤진섭, 앞의 글, 10-11쪽에서 재인용.    
5) 1960-70년대에 이루어진 전위미술, 그 중에서도 특히 해프닝과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행위미술에 대한 소환의 구체적인 예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주최한 아시아문화아카이브 구축사업을 들 수 있다. 필자는 책임연구원으로 위촉돼 김구림, 이건용, 이승택, 성능경, 이강소, 정강자, 장석원, ST그룹에 관한 구술채록사업을 수행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간행한 아시아문화아카이브 보고서 권4 <해프닝과 이벤트 : 1960-70년대 한국의 행위미술>(2016)을 참고할 것. 1970년에서 1975년에 이르는 시기에 벌어진 해프닝으로는 이강소의 <화랑내 술집>(1973, 명동화랑)이 유일하다.   
6) 이건용은 이 때 이벤트를 벌이면서 ‘Event’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공식적으로는 이건용이 이벤트의 첫 주자지만, 내용적으로는 성능경의 <신문 1974. 6. 1 이후>이다.
7) 당시 이건용의 화실 서가에는 철학 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예컨대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변형생성문법의 이론과 실제>(이환묵 역)은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Art in America> 최신호와 바꾼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 
8) 70년대에 이벤트를 한 주요작가로는 이건용과 성능경외에도 김용민, 장석원, 강용대 등이 있으나 지면 사정상 이들의 작업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필자의 다음 글을 보라. 윤진섭, <1960-70년대의 한국 행위예술>, 아시아문화전당 발행, 앞의 책.   
9)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사이에 전개된 전환의 시기에 성능경은 극도의 불안과 신경쇠약에 기인한 공황장애를 겪은 바 있다. 이 불안과 질곡의 시기를 거쳐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품바풍의 퍼포먼스를 전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능경의 작품세계는 점차 조명을 받는 추세에 있다.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등등 한국의 1세대 전위예술가들이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조명을 받는 현상은 도전과 저항을 업으로 삼아 온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사회가 수여하는 훈장에 비견될 수 있다.
10) 이보다 앞선 1971년에 대전실업초급대학에 생활미술과가 신설되었는데, 이는 대전 최초의 미술과이면서 미술 실기교사 자격증을 수여했다, 조상영,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38쪽, 다빈치기프트, 2009.  
11) 1975년 12월 25일 결성, 1992년에 해체된 서양화 비구상 그룹이며, 회원으로는 정길호, 이종협, 정장직, 신동국, 유병호, 이정훈, 이창인, 윤주용, 심재구, 최장한, 방효성, 신현대, 함상호 등 13명이다. 조상영, 앞의 책, 40쪽.
12) 당시 이들은 숭전대 미술교육과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종협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들이 ‘이벤트(Event)’란 용어는 1975년 서울에서 이벤트란 용어를 쓰고 행위를 한 이건용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사전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Event’라는 용어로 명시한 것은 1976년 홍명미술관에서 열린 [19751225]의 창립전에서 였다. 이 용어는 제1회전 팸플릿에 기록돼 있다. 이종협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브 클라인의 해프닝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행위를 해프닝으로 부르기에는 다소 저어되어 1975년 12월 15일에 벌어진 대전역 광장의 행위는 명칭을 정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13) 조상영, 같은 책, 41쪽.
14) 당시에는 오포라 하여 전국적으로 매일 정오에 약 1분 동안 사이렌을 울리는 제도가 있었다.
15) 이종협과의 인터뷰, 2018. 3. 7. 경찰의 이러한 반응은 1970년 8월 15일,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 부근 국회의사당 앞에서 파출소로 연행된 제4집단의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해프닝에 대해 경찰이 보인 반응과 유사하다. 경찰이 관을 발로 툭 차며 ‘웃기지 마쇼’한 것과 같은. 
16) 이종협과의 인터뷰. 2018. 3. 7
17) 물론 이것은 작품의 유사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야외 설치미술의 형식에 대한 것이다.
18) 이종협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내탑이 모래사장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현장에 당도해 보니 모래를 채취해가 바닥이 온통 자갈 투성이었다. 그래서 흔한 자갈을 주워 종이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올려놓고 불을 붙이니 네 개의 시커면 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2018. 3. 7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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