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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과 현실: 70년대 한국 미술평단의 풍경

윤진섭

이념과 현실: 70년대 한국 미술평단의 풍경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상황은 ‘본격 모더니즘에의 진입’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이는 1950년대 후반,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의 효시로 간주되는 ‘비정형회화(Informel)’의 등장 이후 약 20여 년의 시차를 둔 것으로 그동안 한국 현대미술은 비약적인 질적 도약을 가져왔다. 이 기간에 벌어진 여러 미술사적 사건들을 뭉뚱그려 요약하면 이른바 ‘국전의 쇠퇴’와 ‘국제전에의 진출’로 대변된다. 일제강점기에 창설된 [선전](1922-1944)에 이어 해방 후에 창설된 [국전](1949-1981)은 한국미술의 저변확대와 확산, 그리고 대중적 관심의 제고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심사를 둘러싼 잡음과 소동, 그리고 학연과 지연을 둘러싼 파행적 운영으로 인해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처럼 국전을 둘러싼 갈등과 파행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4인전]1)을 통해 터진 바 있으나, 이러한 화단의 분위기는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했다. 1967년 12월 11일, [청년작가연립전]의 개막일에 ‘무’와 ‘신전’ 동인 10명이 행한 <가두시위>에서 이들은 ‘좌상파 국전’, ‘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 ‘추상이후의 작품’ 등등의 피켓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또한 이듬해인 1968년 10월 17일에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제2한강교 밑에서 <한강변의 타살>이란 해프닝을 했는데, 이들은 ‘문화 부정축재자’, ‘문화 사기꾼’ 등등의 문구가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행위를 하다 불에 태우는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당시 전위미술을 신봉했던 신세대 작가들이 보인 이처럼 과격한 행동은 화단이 국전 중심에서 전위미술, 곧 현대미술 중심으로 급격한 전환을 이루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들이다.

 ‘탈(脫)평면’을 주장하며 당시 서구에서 유입된 네오다다, 팝아트, 구체음악, 오브제, 설치미술, 해프닝 등에 경도된 ‘무’와 ‘신전’동인 멤버들2)이 벌인 일련의 해프닝은 사회의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일례로 <한강변의 타살> 해프닝에 대한 보도를 접한 인사들이 보인 ‘정신병원에 집어넣어야 한다’(이기영 동국대 교수)거나, ‘서양에서는 이미 한물 간 것’(남관, 화가)과 같은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미술이 대중적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측면에서 보면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단단히 본 셈이다.

 비평사적 측면에서 볼 때, [청년작가연립전]의 개최는 한국 화단이 국전중심의 패러다임에서 국제전 내지는 전위미술 중심의 패러다임에로의 이행을 불러온 기폭제가 됐다는 측면에서 중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즉 구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통해 반동을 일삼은 신세대 작가들의 연이는 거사는 비록 신체제를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3), 이들이 촉발한 전위정신은 70년대를 통해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회화제’ 등등 국제전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70년대 초반은 60년대 후반에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일, 유준상, 임영방, 유근준 등 해외파 미술평론가들이 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동시에 미술현장에서 활발히 필봉을 휘두르던 시기이다. 이일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1월 15일에 ‘한국청년작가연립회’ 주최 세미나에서 ‘추상 이후의 세계미술 동향’이란 주제로 세계 미술의 흐름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이 세미나 이후 총 3회의 세미나가 이어졌다. 이듬해인 1968년 2월 10일에는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두 번째 세미나가 열렸으며, 같은 해 5월 2일에는 서울 명동의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현대미술과 해프닝의 밤’이란 주제로 세미나가 열려 전위미술의 분위기를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신세대 작가들이 연이어 세미나를 개최한 것은 동시대 미술과의 교감을 통해 비정형 회화의 주도세력인 전쟁세대와는 다른 자신들의 전위의식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4)

 청년작가연립회 주최 세미나에서 있었던 이일의 강연을 필두로 이후 오광수의 ‘현대미술에 대하여...’와 ‘현대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유준상의 강연5)이 이어졌는데, 이는 신세대 주도의 화단에서 전위의 등장과 함께 작가들이 해외정보에 대한 갈증을 평론가들의 입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미술평론가들을 연사로 초청하는 관행은 70년대에도 이어져 ‘S.T’그룹은 미술평론가의 초청 강연은 물론, 수많은 토론 프로그램과 자체 스터디를 통해 미술이론을 진작하는 기풍과 연구의 풍토를 다져나갔다.

 미술비평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처럼 활발한 미술평론가들의 활동은 이들의 역할이 미술전문서의 번역과 평론집 출판을 비롯하여 전시리뷰와 서문 집필을 통한 보조적 차원을 넘어 작가들의 활동에 동참하는 적극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69년에 결성한 <A.G>그룹6)의 창설이다. 이 무렵이면 1950년대 후반의 ‘비정형회화(Informel)’ 운동을 선도하며 직설적으로 필봉을 휘둘렀던 비평가로서 방근택의 존재감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7)

 이일, 오광수, 김인환은 ‘A.G’그룹의 일원으로서 선언문을 작성한 것을 비롯하여 기관지 <A.G>의 원고 집필은 물론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기획전8)에 깊숙이 관여했다. “비평의 기본자세, 그것은 곧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과의 대결의식, 더 나아가서는 동참의식이라 할 것이다. 평론가도 모름지기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대결하듯이 작가의 작품과 대결해야 할 것이며, 또한 작가의 제작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것”이란 이일의 발언9)은 미술평론가가 전위적 미술운동의 진원지로부터 동떨어진 국외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동반자요 창조자임을 대변한다.10) 그러나 이처럼 특이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70년대를 통틀어 미술평론가들이 비평적 쟁점을 통해 화단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가령,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도모한 뚜렷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1970년대의 전시기획 양상은 작가 주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일, 오광수, 김인환과 ‘A.G’그룹, 김복영과 ‘S.T’그룹은 창립초기부터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나머지 비평가들은 기댈만한 언덕을 별로 갖고 있지 못했다. 1974년, 유준상은 당시 명동화랑이 발행한 <현대미술>지의 주간으로 근무하면서 비평의 활성화를 꾀하고자 했으나 이 잡지는 아쉽게도 2호를 내지 못하고 종간되고 말았다. 그보다 한 해 앞선 1973년, 명동화랑의 김문호 사장은 한국 현대미술사상 기념비적인 전시를 선보여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추상=상황/조형과 반조형/한국현대미술 1957-1972]전11)은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일개 상업화랑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전시였지만, 유근준, 유준상, 이일 등 3인을 선정위원으로 위촉, 작가선정의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Ⅱ.

 197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의 미술비평계는 본격적인 전문비평가의 시대에 돌입하는 징후가 역력했다. 이러한 기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이경성이   “미술 때문에 고등문관시험을 포기하고 같은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의 미학과에 입학해서 아이쓰 야이치 선생”12)을 만남으로써 미술비평을 위한 학문적 배경을 갖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전문비평가로서 이경성의 등장은 1955년 4월 13일자 서울신문에 기고한 ‘미술비평의 과제’에서 비롯되는데13), 그의 존재는 최순우와 함께 그보다 훨씬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우현 고유섭의 비평적 맥을 잇는 것이다. 이는 물론 전공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만, 아무튼 이경성은 1956년에 김영주, 최순우, 한묵, 김중업, 정규와 함께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창립하게 되는데, 이 협회는 평론상의 시행을 비롯하여 기관지의 발행 등 스스로 내건 공약을 지키지 못한 채 1년 만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70년대의 비평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미학 내지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귀국한 이일, 유준상, 임영방, 정병관, 박래경, 유근준 등 유학파 비평가들과 국내에서 미술을 비롯하여 미학, 미술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을 전공한 이구열, 오광수, 김인환, 김복영, 김윤수, 원동석, 박용숙, 김해성 등 국내파 비평가들이 주도하였다. 70년대의 비평은 겉으로는 모더니즘 비평이 강세를 이루며 화단을 주도해 나갔지만 그 이면에는 80년대를 점유한 민중미술 비평이 잠재해 있었다.14) 김윤수의 <한국현대회화사>(한국일보사, 1975)를 비롯하여 원동석의 <수화 김환기론>(1977, 계간미술 여름호),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1975, 원광문화 제2집) 등은 민중적 시각에서 미술을 해석, 비평한 이 시기의 대표적 문헌들이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70년대 비평계를 점유한 모더니즘 비평은 과연 어떤 양상을 띠었는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른바 단색화와 관련된 비평이다. 70년대 당시 단색화는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비롯하여 백색파, 모노크롬, 단색파, 백파, 단색주의 등 다양한 용어로 통용되고 있었다.

 현재 ‘단색화(Dansaekhwa)’란 용어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모노크롬 회화는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화단의 주류라고 하기에는 다소 미약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화단의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1972년에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 전시에 출품한 이동엽과 허황의 백색 회화작품15)이 심사위원인 이우환에 의해 파리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1960년대 초반, 동양화가 권영우가  화선지를 사용하여 물성적 실험을 한 이래, 한국의 단색화는 1972년 [앙데팡당]전에서 이동엽과 허황의 백색 작품이 등장하기까지 김형대, 이반, 서승원, 최명영 등이 백색 혹은 흑색 단색 작품을 선보인 바 있으나, 화단의 주류로 부상하기까지에는 좀 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심사위원인 이우환과 동행하여 [제1회 앙데팡당]전의 전람회장을 둘러본 동경화랑 사장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는 훗날 이동엽의 작품을 본 인상을 ‘마치 조선백자를 대한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한국ㆍ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의 등장을 예고했다. 이 전시는 일제강점기에 원산에 거주하면서 골동품을 수집하는 등 조선의 백자에 심취한 야마모토 사장의 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는 이 전시에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을 초대하고 한국의 미술평론가인 이일과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명동화랑의 사장인 김문호와 야마모토 다카시, 나카하라 유스케가 상호 협력하여 기획된 이 전시의 서문으로 이일은 ‘백색은 생각한다’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백’ 또는 ‘백색’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실상 백색은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과는 깊은 인연을 맺어 온 빛깔이다. 그리고 이 빛깔은 우리에게 있어 비단 우리 고유의 미적 감각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사고(思考)를 규정짓는 가장 본질적인 하나의 언어이다. 요컨대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하나의 ‘빛깔’ 이상의 것이며, 백색은 스스로를 구현하는 모든 가능의 생성(生成)의 마당인 것이다.”16)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일은 ‘백색’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성을 발견했다. 권영우, 김기린, 박서보,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정상화 등 70년대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에 내재된 이 정신성은 유교적 전통과 자연 존중 사상에서 배태된 것으로 이일은 이를 가리켜 ‘원초적인 것으로의 회귀’라고 불렀다. 그는 한 글에서 “미술적 문맥으로서 보다는 정신적 기조로서의 이 ‘원초적인 것으로의 회귀’ 그것을 우리는 ‘원초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17)라고 썼다. 70년대의 단색화를 바라보는 이일의 이러한 입장은 물론 하나의 딜레마를 그 안에 품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같은 글에서 개진하고 있는 것처럼 ‘평면성’을 비롯하여 ‘자기 비판’과 ‘자기 한정’으로 요약되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비평이론을 용인할 때 필연적으로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한국적’ 미술의 정립문제를 놓고 전개된 이일이나 김복영과 같은 논자들의 논의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가한 바 있다. 다소 길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그런데 이일의 이러한 주장은 미적 특수성을 유지하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주지하듯이 미적 특수성을 견지하면서 보편성을 흭득하는 문제는 한국미술의 오래된 화두와도 같은 것. 이 양수겸장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야말로 한국미술이 넘지 않으면 안 될 산맥과도 같은 것인데, 그것에 대한 일말의 모색의 징후가 70년대 모노크롬 회화에서 어렴풋이 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70년대를 가리켜 ‘위대한 시대’로 명명한 김복영은, 그 타당한 이유로 개인주의의 발로를 들고 있다. 그는 한국 근ㆍ현대미술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들면서, 전반기에 해당하는, 8.15해방에서 1960년에 이르는 기간은 ‘수직적 체계’에 의한 단조로운 화단구조를,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수평적 체계’에 의한 복합적인 화단구조를 드러내었다고 보았다. 이 70년대를 그는 일종의 전환기로 파악하면서 ‘근대적 시각이 질적으로 개화된’ 이념의 시대로 간주한다.”18)



 70년대 미술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김복영의 이 같은 시각은 “기예에 바탕을 둔 전통적 가치관을 타파하고 ‘이념’에 근거한 새로운 가치관의 수립, 즉 문화의 선진적 담당자로서의 아방가르드 세력의 출현”에 대한 기대의 산물이며, 그러할 때 “70년대 백색 모노크롬은 이의 한 방법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19)

 모더니즘의 옹호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광수 역시 이일이나 김복영과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그는 “70년대 미술의 핵심인 단색조 회화와 개념미술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면서 서구미술의 변주적 수용 양상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이때 오광수가 취하는 입장은 수용의 개념을 해석된 것으로 파악, “수용자체가 단순한 이입이 아닌, 문화적으로 특수한 반응관계 하에서 이루어졌음”에 주목한다. 그의 논지는 중심과 주변이 파생시킨 문화적 종속관계를 극복하면서 한국미술에 독자적인 시각이 나타난 것으로 요약된다.



 “미니멀리즘과 컨셉추얼 아트의 한국적 변형으로 개념지을 수 있는 것이 구조로서의 평면(평면주의)과 정서로서의 모노톤(단색주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와 정서에서 똑같이 검출되는 것이 다름아닌 비물질화이다.”20)



 오광수는 이 두 개념이 가장 잘 구현된 작품의 예로 수화 김환기의 청색 모노크롬 경향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들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구조적으로는 평면에의 환원과 정서적으로는 단색주의로 특징되는 경향’을 띤 것으로 보았다.21) 

  여기서 잠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국외자적 시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빈번히 드나들었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접하고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델리키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22)을 알았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런 회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색채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써 반(反)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이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23)이라고 썼다. 여기서 나카하라가 예로 든 ‘색채 이외의 것’은 한국 단색화의 특질을 색을 초월한 ‘정신’으로 파악한 이일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를 일본인이 먼저 주목한 사실은 민족감정을 부추긴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통해 심리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한국의 이론가들은 단색화의 백색 미학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비애론’과 연결시켜 문화적 종속을 우려했다. 이들이 주장한 골자는 한국의 단색화는 한국인이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타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는 논리인 바, 여기에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야기한 피해의식이 내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24)

 

Ⅲ.

 70년대를 관류하는 한국의 전체적인 상황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언론통제와 검열, 인권탄압 등 반(反)민주적인 폭정이 자행되고 있었다. 1971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날, 김지하의 ‘오적(五賊)’ 필화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사회적으로는 ‘도둑촌’,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이 유행하는 가운데 거리에는 패티김의 ‘사랑하는 마리아’가 울려 퍼졌다.25)

 그렇다면 70년대 미술의 상황은 과연 어떠했는가? 다음의 글이 이 시기의 사회현실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여겨져 여기에 인용한다.



 “한국의 1970년대 미술현상에서 사회현실을 반영한 실제적인 미술활동은 미세한 지엽적 현상에 불과하다. 더구나 1969년 ‘현실동인’ 창립전이 그 선언문만 남긴 채 좌초된 후 1970년대에는 유신체제라는 어두운 정치적 현실 속에서 사회 현실을 반영한 어떠한 형태의 예술도 용납되지 않았고, 미술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야 간헐적으로 사회비판적 내용의 작품들-김경인의 문맹자 연작이나 권순철의 얼굴 연작, 이상국의 허수아비, 오윤의 삽화 정도의 판화 작품 등-과 ‘제3그룹’이나 ‘12월전(展)’의 작품전이 있을 뿐이다.”26)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술평론 역시 사회 현실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모더니즘 미술비평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현실주의 비평은 김윤수, 원동석 등에 의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한 목록작성에 의하면 1970년대를 통틀어 발표된 민중미술 관련 글은 총 39편에 불과하다. 필자별 글의 편수를 보면 원동석 16편, 김윤수 13편, 임영방 3편, 박용숙, 성완경, 최민, 이태호, 임범택이 각 1편씩이며, 매체별로는 ‘미술과 생활’ 11편, ‘계간미술’ 4편, ‘창작과 비평’ 3편, ‘한국현대회화사’ 3편, ‘대화’ 3편, '신동아‘ 2편이며, 기타 ‘상록’, ‘다리’, ‘원광미술’, ‘공간’, ‘한국의 근대미술’, ‘한국현대미술전집’ 등이 각 1편씩이다.27)

 1969년, 현실동인에 의한 ‘현실동인 제1선언’을 필두로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 비평문으로는 박용숙의 ‘식민지시대의 미학 비판’(월간 다리 1972년 5월호), ‘민족적 리얼리즘은 가능한가’(공간, 1974년 2월호), 김윤수의 ‘화단풍토의 반성-작가와 비평가의 자세’(창작과 비평, 1974년 가을호)28), ‘선전 잔재와 극복’(미술과 생활, 1977년 11월호), 원동석의 ‘미술의 사회적 기능’(월간 대화, 1977년 9월호), ‘민족주의 예술의 이념과 방향’(미술과 생활, 1978년 12월호), 임영방의 ‘삶과 멀어질 때 미술은 사치’(미술과 생활, 1977년 5월호), 성완경의 ‘미술과 돈’(미술과 생활, 1977년 4월호), 최민의 ‘부르조아에게 먹히는 미술’(미술과 생활, 1977년 5월호), 임범택의 ‘회화의 사실 리얼리즘’(미술과 생활, 1979년 9월호) 등등이 있다.29) 

 앞에서 열거한 논저목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70년대에 생산된 민족ㆍ민중미술 계열의 비평문들은 모더니즘 계열의 방대한 양에 비하면 수적으로 열세이다. 그러나 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자행된 언론 검열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1979년 ‘현실과 발언’이 창립되며, 그것은 80년대에 들어서 민족ㆍ민중미술의 대대적인 발흥을 이끈 도화선이 되었다. ‘현실과 발언’ 그룹은 1979년 12월 6일, 원동석, 성완경, 최민, 윤범모 등 민중미술 계열의 평론가들과 손장섭, 김경인, 주재환, 김정헌, 오수환, 김정수, 김용태, 오윤 등 작가들 총 12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 발기인 대회가 이루어졌다.30)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풍경은 일종의 다원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가장 강세를 이룬 것이 단색화일 뿐, 극사실주의를 비롯하여 개념미술, 오브제(입체), 설치미술, 비디오 아트, 이벤트, 실험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의 다원주의는 70년대의 시공간을 점유했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지면에서 다양한 매체와 장르에 대한 수많은 비평문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은 무리라 여겨져 생략하기로 했다.

 이 글은 1970년대에 나타나 한국 미술의 지형도를 이룬 미술운동에 대한 비평적 논저들을 중심으로 기술된 것이다. 그 기간에 가장 큰 쟁점으로 부상한 단색화와 관련된 비평적 논의를 중심으로 다루다 보니 다소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거대한 얼음장 밑을 흐르는 작은 개울의 흐름이 훗날 그 또한 거대한 얼음장으로 변해가는 단초가 된 것은 70년대 미술이 보여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그 과정에 대한 간략한 비평적 역사의 서술이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주최 비평의 역사전 수록글, 2018>


1) 1956년 동방문화회관에서 열린 전시임. 참여작가는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 
2) ‘무’동인 : 김영자, 문복철, 이태현, 임단, 진익상, 최붕현. ‘신전’동인 : 강국진, 김인환, 심선희, 양덕수, 정강자, 정찬승. [청년작가연립전]은 ‘무’와 ‘신전’ 동인에 ‘오리진’이 합쳐진 것으로 ‘오리진’의 회원은 김수익, 서승원, 신기옥, 이승조, 최명영 등이다. 
3) 구세대에 해당하는 ‘현대미술가협회’, ‘60년미협’, ‘벽동인회’ 등은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동안 화단을 점유한 ‘비정형회화(Informel)’의 주체세력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1960년대 말 [청년작가연립전]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의 반란이 신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70년대 공간에서 단색화로 변신하며 등장한 구세대에 의해 다시 굴복당하는 긴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박서보의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1970-1977)과 이사장(1977-1980)의 오랜 집권은 국제전의 주도와 [앙데팡당], [에꼴드서울], [서울현대미술제] 등의 창설과 관련, 단색화의 확산과 획일화에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기간은 미협 부이사장과 이사장으로서 박서보의 무소불위의 영향력이 집중된 시기이다.
4) 윤진섭,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90s]전 도록 글에서 재인용, 국립현대미술관, 미출판.
5) 1968년 5월 2일 ‘현대미술과 해프닝의 밤’에서 권대웅의 사회로 오광수의 현대미술에 대한 강연이 있었으며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에 의한 <투명풍선과 누드> 해프닝이 끝난 뒤 유준상의 강연이 이어졌다.
   김미경, 한국: 1960년대 후반 그룹운동의 의미-<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대한 소고-한국미술100년(2부) 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간. 2008, 297-300쪽. 
6) “전위 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젼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선언문이 <A.G>잡지 맨 앞에 명시돼 있다. 참고로 1971년 기준, ‘A.G’그룹의 회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구림, 김동규, 김청정,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송번수,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조성묵, 최명영, 하종현 및 이일, 오광수, 김인환(이상 평론)
7) 그러나 방근택은 1977년에 창간된 ‘현대예술’지의 주간을 맡아 [앙데팡당]전의 리뷰를 쓰는 등 70년대를 통해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공간’ 1974년 9월호에 기고한 ‘허구와 무의미-우리 전위미술의 비평과 실제’, 시문학 1976년 12월호의 ‘박서보의 묘법이란!’ 등의 글을 통해 기호론적 입장에서 ‘백파’의 작품을 분석하는 동시에 박서보의 묘법을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8) [확장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
9) 이일, 나의 미술비평,「공간」, 1992년 8월호, 61쪽.
10) 이일은 1969년 ‘A.G’ 1호에 ‘전위미술론-그 변혁의 양상과 한계에 대한 시론’을 발표함으로써 당시 전위미술을 신봉하며 활동하던 신세대 작가들에게 이론적 지원을 했다.
11) 팜플릿에 수록된 명동화랑 김문호 사장의 인사말에 의하면 원래 이 전시의 타이틀은 [한국현대미술 15년]전으로 정해졌으나 장소 관계상 현대미술의 전모를 소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을 비평적 용어로 바꾸고 재평가의 기회로 삼아 ‘73년을 하나의 이정표’로 세우는 것에 전시기획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전시는 1부(1973. 2. 17-2. 24)와 2부(1973. 2. 25-3. 4)로 열렸으며, 참여작가는 다음과 같다.
   1부(추상=상황) : 권옥연, 김영주, 김정숙, 김종학, 김찬식, 김창열, 김형대, 남관, 박서보, 박종배, 윤명로, 이종각, 전상범, 전성우, 정창섭, 정영렬, 조용익, 최기원, 최만린. 2부(조형과 반조형) : 권영우, 김구림, 김차섭, 박석원, 서승원, 심문섭, 엄태정, 이강소, 이건용, 이동엽, 이반, 이승조, 최명영, 하동철, 하종현, 허황. 
12) 이경성, 아름다움을 찾아서, 삶과 꿈, 2002, 18쪽.
13) 서성록, 미술비평의 나이테,「공간」, 1992년 8월호, 43쪽.
14) 오광수, 한국현대미술비평사, 미진사, 1998, 184쪽.
15) 1백호 3점으로 이루어진 이동엽의 <상황>은 컵 속에 든 얼음이 녹는 과정을 백색 바탕에 갈색의 단순한 선묘로 형태만 간략히 묘사한 것이며, 허황의 <가변의식>은 베개를 소재로 역시 백색의 단색조로 단순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 작품들은 주최 측인 미협이 파리비엔날레에 추천했지만 오브제와 설치, 퍼포먼스 등 비엔날레의 전시 경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미협은 다시 이들을 1974년에 열린 [제6회 카뉴국제회화제]에 추천한다. 
16) 이일, 백색은 생각한다.「이일 미술비평일지」, 미진사, 1998, 260-261쪽.
17) 이일, ‘70년대의 화가들-원초적인 것으로의 회귀를 중심으로,「공간」1978년 3월호(원전). 이일 저, 정연심, 김정은, 이유진 편저,「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미진사, 2013, 474쪽.
18)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도서출판 재원, 2000, 142쪽.
19) 윤진섭, 앞의 책, 143쪽.
20) 오광수, 70년대 한국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에꼴 드 서울 20년ㆍ모노크롬 20년」
21) 윤진섭, 앞의 책, 145쪽.
22) 나카하라 유스케, [한국ㆍ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 도록, 동경화랑. 1975. 
23) 나카하리 유스케,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 전평,「미술수첩」1977년 9월호.
24) 이우환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론에 대해 야나기 혼자에 의해 날조된 산물일 수 없다며 이를 부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높은 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말하듯이 예술의 본성은 비애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덧붙이자면 ‘한(恨)’의 개념이 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니듯이 비애의 개념이 야나기의 날조물일 수는 없다.” 윤진섭, 이우환과의 대화,「한국의 단색화」전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12,
25) 개항 100년 연표ㆍ자료집, 신동아 1976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출판사, 278-279쪽.
26) 김재원, 1970년대 한국의 사회비판적 미술 현상-‘현실동인’에서 ‘현실과 발언’ 형성까지-, 한국미술 100년(2부) 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간, 2008, 671쪽.
27) 최열(미술평론가) 책임작성, 민족민중미술 관련 문헌 총목록,「민중미술15년 1980-1994」, 최열ㆍ최태만 엮음. 삶과 꿈, 298-299쪽.
28) 비평가의 역할과 관련하여 ‘계간미술’ 1979년 발행 통권 10호는 ‘작가들을 재평가한다’라는 제하에 미술평론가 11명에게 앙케트를 실시했다. 김윤수, 김인환, 박래경, 박용숙, 석도륜, 오광수, 유근준, 유준상, 원동석, 이경성, 이일, 임영방이 참여한 이 앙케트에서 과대평가된 작가로는 김은호, 이중섭, 고희동, 천경자, 이종우, 장욱진, 주경, 이인성, 박승무, 김인승, 이응노, 서세옥 등이 거론되었으며, 과소평가된 작가로는 이용우, 김종태, 구본웅, 정규, 오지호, 전혁림, 이규상, 함대정, 김정, 김종영, 백남준 등이 리스트에 올랐다. 이 앙케트는 이른바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과는 함수관계가 별로 없으며,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 할 뿐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 기획물은 당시 미술전문지와 비평가의 관계와 기능을 상기시키는 앙케트였다.
29) 최열, 앞의 책,
30) 윤범모, <현실과 발언> 10년의 발자취, 「민중미술을 향하여-현실과 발언 10년의 발자취」, 과학과 사상, 1990, 535쪽. 당시 창립 발기인대회가 이루어진 장소는 청진동에 있는 중국집 ‘유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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