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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과 연상, 그리고 반(反)개입

윤진섭

지각과 연상, 그리고 반(反)개입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양홍섭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10대 중반에 조각 분야에 뛰어들어 4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장인의 위치에 올랐다. 미술계에 잘 알려진 정밀주물공장의 경영자이기도 한 그는 젊은 시절에 품었던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50대의 늦은 나이에 미술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쳤으며, 현재 주조의 실제와 이론을 겸비한 조각가로서 정열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양홍섭의 예술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의 사항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작품을 주물공장에 맡기는 대부분의 조각가들과는 달리, 그는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주조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정밀주조에 따른 까다로운 공정은 물론 이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실력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Ⅱ.
 이번 개인전에서 양홍섭은 기존의 정밀 주조 작업에 사진을 덧붙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인다. 신소재 재료를 비롯하여 다양한 합금 재료로 이루어진 초내열 합금인 항공부속품의 재료를 활용하여 기존의 작업에 서로 다른 금속의 조직을 광학현미경으로 확대, 이의 사진을 컴퓨터상에서 미세조직에 칼라를 덧입히는 작업을 해 만든, 마치 회화작품을 방불케 하는 사진을 병치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번에 출품하는 주조조각 작품과 사진작품이 동시에 전시되는 것이다. 광학현미경에 비친 서로 다른 금속의 미세한 조직은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다워 보이는데, 양홍섭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 미세한 이미지들에 색채를 가해 가일층 화려한 세계를 창출한다. 이 미시세계를 추상의 세계로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실재의 세계라 불러 마땅하다. 현미경에 나타난 미시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금속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양홍섭은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가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허구가 아니라,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임을 입증해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시도가 의미있는 이유는 그것이 회화나 사진으로 제시될 때와 달리 ‘오브제’로서의 구체적인 작품과 병치돼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양홍섭이 이번 전시 타이틀의 부제를 ‘안과 밖(Inside/Outside)’으로 정한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그것은 안에서 본 세계가 바로 밖에 존재하는 오브제의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의 존재 양태로서의 ‘안과 밖’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홍섭이 제작한 ‘오브제로서의 작품’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또한 현대조각의 지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작품의 형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양홍섭은 이미 2012년에 연 첫 개인전에서 다수의 오브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2014년에 가진 두 번째 개인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러한 경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앞서 나는 ‘제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양홍섭 작품의 경우에 과연 ‘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양홍섭은 항공기 부품이라는 오브제를 선택한 뒤, 이를 섭씨 1700-1800도의 고온에 녹여 용액이 자연스럽게 흐른 상태에서 굳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이다. 금속의 용액이 자연스럽게 흐르다 굳어져 만들어진 형상이 바로 양홍섭의 오브제 작업일진대, 우리는 여기서 다다(Dada) 이후 익숙한 현대미술의 ‘우연성’의 개념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좀 더 확대 해석하자면 모더니즘의 선형적이며 환원적인 관점과는 다른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줄기(Rhizome)’와도 같은 ‘예측불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즉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모르는 비정형의 세계가 바로 양홍섭의 오브제 작품의 특징인 것이다. 주지하듯이, 섭씨 1700-1800도의 고온에서 녹은 금속의 용액이 흐를 때 그 방향이나 나타난 결과로서의 모습은 자연조건에 따른 필연일 수 있지만, 조각가의 의도나 손길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우연’인 것이다. 따라서 물, 불, 공기, 온도, 습도 등 자연이 조각품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볼 때, 양홍섭의 조각은 차라리 ‘자연의 조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 싶다. 이와 관련하여 양홍섭은 작업노트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더니즘(Modernism)과 고전물리학이 일맥상통하고, 구축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선형적인 단순한 유클리트 기하학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현대물리학에서는 해체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비선형적인 복잡한 프랙탈 기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양홍섭의 이러한 현대조각에 대한 이해는 ‘조각예술의 재구축(Reshaping the art of sculpture)’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조각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조각가로서 양홍섭의 야심을 은연중 보여주는 것이리라. 물론 가공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조각의 선례는 그가 최초는 아니지만, 정밀 주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지닌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나름대로 세계의 철리(哲理)를 꿰뚫는 예리한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그의 발언을 경청해 보도록 하자.  

 “작품에 나타나는 순리적 언어는 우리의 현실에 내포된 불신과 갈등의 구조, 자연적이지 못 하고 인위적인 면들, 자기 자신과 잘못된 사회적 구조의 틀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계로 재탄생할 수 있는 수사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Reshaping’은 이미 형성된 어떤 것(shaping)을 다시 빚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태 A에서 상태 B로의 이동에는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반성을 통한 계기가 전제된다. 그것은 개인의 반성(reflection)일 수도 있고, 사물의 변형이나 사회의 개조일 수도 있다. 따라서 양홍섭이 신소재 재료를 활용하여 작업하는 행위는 물리적인 오브제의 ‘Reshaping’을 통해 자신 혹은 사회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반성적 메시지가 된다. 주지하듯이, 조각과 같은 예술작품의 제대로 된 감상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태를 넘어서서 그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감상자가 끌어낼 때 완성된다. 이 점이 단지 심미적 만족에만 그치는 감상과 다른 점이다. 이는 언어학의 일반의미론에서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orzpbski)가 예로 드는 ‘추상 사다리’처럼 단어의 추상화(抽象化)가 심할수록 대상의 가시적 실체가 사라지면서 점차 개념화되는 이치와도 같다.    
 양홍섭의 작업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해체’이다. 리좀적인 속성과 함께 드러나는 해체적인 특징은 그의 작업을 포스트모더니즘의 문맥에서 해석할 수 있는 비평적 근거(criteria)가 된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작품들은 청동이 아닌 주로 SUS 계열과 Carbon Alloy 계열을 이용한 정밀주조, 세라믹 셀 캐스팅 기법”에 의존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 재료들은 섭씨 1700-1800도의 고온에서 새빨갛게 녹은 쇳물로 변한다. 그 쇳물이 “세라믹 셀 몰드에서 터져 분출돼 흘러내리면서 고체 상태로 서서히 변해 점차 회색조의 무채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양홍섭의 항공기 부품을 이용한 오브제 작품에서 극히 일부는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반면, 녹아 흘러내려 자연스런 형태를 유지한 커다란 덩어리는 해체된 모습을 보이는 특징을 눈여겨보도록 하자. 관객들은 양홍섭의 작품들을 보며 서있는 사람이나 폐허로 변한 건물의 잔해, 또는 머리를 풀어헤친 버드나무를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오성에 의존한 지각작용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렇게 보도록 유도했을 뿐, 사물은 오로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의 항공기 부품, 즉 하나의 기성품(ready-made)을 해체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문맥으로 전치시키는 양홍섭의 조각적 기법은 특유의 초현실적 풍경들을 낳는다. 그리고 다소 상투적인 표현을 빌면, 그것들은 한계에 도달한 현대문명의 폐해에 대한 완곡한 은유이다. 그는 그러한 풍경을 야기한 국면을 가리켜 ‘틀을 깨다(Breaking the Mold)’라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양홍섭은 정형의 세계에서 비정형(informel)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가 이용하는 세라믹 셀 몰드 기법은 이 두 세계를 매개하는 매개항이며, 그것을 촉매로 하여 ‘바슐라르’적 의미에서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한 연금술적 변화가 일어난다. 예술가의 위대한 점은 어떤 변화를 통해 물질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말을 관객들에게 건네게 한다는 것일 게다. 양홍섭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건물의 잔해, 혹은 도시의 폐허나 머리를 풀어헤친 버드나무, 도시의 고독한 인간군상으로 표상된다. 도대체 한 덩어리의 항공기 부품에 지나지 않는 사물을 가지고 어떻게 저런 풍경을 연출한단 말인가?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작가의 불간섭,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질적 상상력을 위한 대리자로서 작가의 반(反)개입의 역설을 그러한 풍경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과 연상작용을 둘러싼 신비에 양홍섭은 또 하나의 시금석을 보태고 있다. 

Ⅲ.
 제30회 한국조각가협회 주최의 아카이브전에 양홍섭은 80년대 구상작품과 90년대의 정교한 공예조각 작품을 전시한 바 있으며, 홍익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학원 청구 개인전에 오브제와 자신이 제작한 조각품의 일부를 간 작품과 함께 전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좌대 위에 놓인 작품들 밑에는 미세한 쇳가루들이 흩어져 있다. 항공기의 부품이나 소총,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모사한 이 작품들은 반전(소총)이나 반핵(원자력발전소 설비 부품), 남근중심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페니스처럼 생긴 커다란 총알)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모두 조각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다. 기성의 사물이나 혹은 작가가 직접 주물을 떠 만든 이 작품들은 작가의 반복적인 노동에 의해 소멸된다는 점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언젠가 소멸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전쟁이나 반핵, 또는 남성성 등등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작을 간 행위에서 보듯이 명작에 대한 부정 혹은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된다. 
 앞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조각에 대한 양홍섭의 입장과 태도는 개념적인 측면이 짙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 전시한 바 있다. 축소된 모형을 전시한 <인생의 방>은 신산한 삶을 겪은 양홍섭이 인생을 4개의 방에 비유한 것이다. 흰색, 검정, 노랑, 그리고 자개의 영롱한 무지개색 등으로 꾸며진 4개의 방에는 서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모형작품은 갤러리에 4개의 방을 설정할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이 작품이 구현되면 사람들은 직접 방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4개의 방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과정에 대한 비유이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흰색의 방은 ‘불안의 방’으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머릿속이 하얗게 될 때 느끼는 충격과 공포의 방이다. ‘황금의 방’을 의미하는 노란색 방은 가족애를 비롯하여 사랑, 정신적 안정과 같은 자기만족의 방이다. 물질보다는 정신세계를 나타낸다. 검정색 방은 절대침묵과 어둠의 방이다. 관객들은 이 방에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성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무지개의 방은 ‘꿈의 방’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그에 따른 고뇌와 갈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방이다. 관객들은 이처럼 성격을 달리하는 삶의 비유이자 축도인 방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양홍섭은 그밖에도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관의 틈 사이로 밖의 풍경이 보이는 작품이다. 굵은 나이테가 인상적인 낡은 목제 관에 난 외씨(瓜) 모양의 구멍 사이로 숲의 일부가 보이는데, 살아있는 싱싱한 자연의 풍경이 낡은 관과 대비돼 스산한 인상을 주고 있다. 매우 강렬한 인상의 작품이다. 양홍섭은 또한 하늘을 향해 세워져 있는 높은 사다리 끝에 달린 하얀 깃털이 나부끼는 새의 날개를 부착함으로써,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에 나오는 장면을 풍자한 작품을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들은 모두 미발표 작품들로써 다음 기회에 소개가 될 것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양홍섭의 작품들 중 일부는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겪은 신산한 삶에 토대를 두고 있다. 생노병사와 오욕칠정 등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과 감정을 일종의 상징과 은유를 통해 작품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처럼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동시에 자신의 작업의 중심인 오브제 주물 작품을 통해 조각의 본질 문제를 천착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것이든 소홀히 할 수 없는 작품의 중요한 테마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작품의 경향이 다음 전시에서는 과연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 그의 다음 작업이 기대되는 바이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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