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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큰 기교는 서툴러 보인다

윤진섭

아주 큰 기교는 서툴러 보인다

                                              윤진섭(미술평론가)
                          
                                            
 자연이나 인물 혹은 사물 따위의 눈에 보이는 대상을 화폭에 옮길 때조차 사색을 한다는 점에서 화가는 일종의 철학자이다. 화가는 물감과 붓, 파렛트, 기름, 연필 등등 다양한 화구를 통해 대상과 나눈 대화를 화폭에 풀어놓는다. 대상적 존재의 본질에 육박하기 위해 화가가 사용하는 기법은 다양할 수 있지만, 목적은 오직 하나다. 대상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시적 진리’을 밝히기 위해 봉사하듯이, 화가는 ‘회화적 진리’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풍경을 대한 세잔의 태도가 그러했으며, 해바라기 등의 정물을 대한 고흐의 자세 역시 그러했다. 그렇다면 추상의 경우는 과연 어떠한가? 외부적 현실이 아닌 내면의 세계에 대한 작가의 진술이 ‘회화적 진리’를 옳게 드러낼 수 있는가?  
 샌정의 추상화를 분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질문은 매우 타당하다. 그 이유는 시인이 내면에 떠오르는 시적 이미지를 적절한 시어(詩語)를 통해 현재화하듯이, 그 역시 내면에 이는 풍경을 추상적 언어를 통해 현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내면에 이는 풍경’이란 곧 경험의 축적인 바, 이를 좀 더 세밀히 분석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축적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오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외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의미가 파생되는 것이다. 의미의 전달자로서 예술가는 다양한 매체를 빌어 이를 표현한다. 시인은 시어(詩語)로, 화가는 물감과 붓으로, 무용수는 몸을 사용한다.  

 샌정의 그림은 다소 모호하며 엉거주춤하다. 최근 들어 부쩍 추상화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인 프레임과 전시 공간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회화의 조형요소에 대한 실험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중에 있다. 여기서 그의 그림이 ‘모호하며 엉거주춤하다’고 표현한 까닭은 그가 작품 제작에 있어서 분명한 컨셉트를 드러내길 꺼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샌정의 작품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사색의 침전물 또는 생각의 응어리’와도 같다.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명제는 ‘A는 A이다’라는 선명한 컨셉트가 아니라 ‘A는 A일 수도, B일 수도, C일 수도 있는’ 모호함을 지닌다. 그는 회화의 기본적인 조형요소인 선과 색, 점을 다루는데 있어서 선과 형태가 분명한 기하학적 성격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모호하며, 다소 엉거주춤한 태도의 일면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 가세하고 있는 것이 바로 캔버스 바탕의 붓질이다. 여기서 샌정의 붓질은 흐리기 기법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나 동양의 문인화를 연상시키는 그의 붓질 회화는 여러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덧칠되는 가운데 그 특유의 회화적 느낌을 드러낸다. 검정색 바탕은 깊은 심연과도 같고 회색조의 바탕은 슬픈 애상조(哀傷調)의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를 관조하는 관객은 이러한 감정의 진원지가 다름 아닌 작가의 삶에서 우러난 깊은 사색과 감정임을 깨닫게 된다. 
 샌정의 화면에 나타난 기하학적 도상의 형태들이 선이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그가 의도하는 것이 미니멀 회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세계의 원소로서의 기하학적 형태의 구현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마음의 풍경’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추상화에 대한 분석의 초점은 외부의 세계, 즉 대상이 아니라 그 반대급부로서의 내면세계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곧 주관의 미학이자 마음의 분비물인 것이다. 샌정은 색이 서로 다른 사각형들을 형태가 가늘고 모호하며 흐릿한 선으로 연결시켜 관계를 드러내는가 하면, 크거나 작고 색이 서로 다른 기하학적 도형들을 일정한 법칙이 없이 화면에 배열함으로써 의외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풍경은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탈주의 몸짓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러한 탈주의 몸짓이 아주 세련된 것이 아니라 약간 눌변에 가까운 어눌한 제스처, 다시 말해서 약간 서툴러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깊은 맛을 지닌 초(超) 세련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자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한 구절, 즉 “아주 큰 기교는 서툴러 보인다”는 의미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동양의 지혜를 보여주는 이 말의 의미를 샌정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 큰 행복이 아니겠는가!
 샌정의 작품은 한두 번 봐서 명료하게 판단되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다. 곁에 두고 여러 번 음미해야 한다. 그의 그림은 오래 된 벗과도 같은 존재이다.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겪은 뒤 비로소 볼 수 있는 그런 혜안을 갖추고,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그림이 바로 샌정의 그림인 것이다. 

                                        <샌정 화집 서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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