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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예술, 그리고 기존가치의 폐기처분

윤진섭

일상과 예술, 그리고 기존가치의 폐기처분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왕성하게 퍼포먼스를 하는 현역의 원로작가 성능경을 주목해 보자. 그는 1974년에 첫 이벤트를 했다. 이벤트란 용어를 알지도 못 한 채 행위를 수행했던 것.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S.T]전에서 열린 <신문 1974.6.1 이후>란 작품은 단지 ‘이벤트’란 용어를 붙이지 않았을 뿐, 사실상 국내 최초의 이벤트에 해당한다. 이제까지 한국미술사에 이벤트란 용어를 사용하여 행위를 한 작가는 이건용으로 기술돼 왔다. 이건용은 1975년 4월 19일, 백록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동일면적>과 <실내측정>이란 제목의 이벤트를 행한 바 있다. 이 때 이건용은 자신의 행위가 ‘이벤트(Event)’에 해당한다고 분명히 선언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사상 첫 이벤트 작가로 기술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성능경은 이보다 1년 전인 1974년에 이벤트를 한 실질적인 첫 이벤트 작가이다. 성능경의 첫 이벤트 <신문 1974.6.1 이후>는 전시가 열리기 두 달 전부터 신문을 오리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집에 배달된 신문의 기사를 매일 오려서 기사 내용은 사각의 흰색 투명 아크릴 박스에 담고, 신문의 여백 부분은 파란색 아크릴 박스에 담는 분리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이 두 개의 박스들은 8면의 하루치 신문이 펼쳐진 채 부착된 전시장 벽 앞에 나란히 놓여졌다. 성능경은 전시기간 동안 매일 새로 나온 신문을 가져와 전시장 벽에 붙이고 기사를 오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전시장에서 그날의 신문을 사다 벽에 붙여놓고 면도칼로 기사를 오리는 ‘행위’를 한 것이다.
 
Ⅱ. 나는 성능경을 1976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서대문 굴레방다리 근처 육교 옆에 이건용 화실이 있었다. 이건용은 1974년에 파리비엔날레에 심문섭과 함께 한국 대표작가로 참가했는데, 이 때 발표한 <신체항>이 히트를 쳐 일약 유명작가가 돼 있었다. 이 작품은 사각 입방체의 흙더미 위에 거대한 나무둥치를 올려놓은 것으로 파리 현지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고, 그 여파로 국내 신문들이 문화면 톱으로 일제히 보도를 했다. 당시 실험적인 그룹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S.T>의 회장이 바로 이건용이었다. <S.T> 그룹에는 이건용을 비롯하여 성능경, 김용민, 김용철, 신학철, 김장섭, 김용익, 김홍주, 장석원, 강용대, 장경호, 강창렬 등등이 회원으로 활동 중이었으며, 미술평론가 김복영이 이론적 지지를 하고 있었다. 당시 미술대학 학생이었던 나는 이건용 화실에 들러 이벤트의 트리오인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과 자주 만났다. 장발에 파이프 담배를 피던 성능경은 말을 아끼는 스타일로 달변인 이건용이 하는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편이었다. 당시 이건용 화실의 벽에는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이 행한 [3인의 이벤트]와 이들 3인 외에 장석원이 참여한 [4인의 이벤트] 포스터가 부착돼 있었다. 나는 1977년에 이건용과 함께 서울화랑에서 이벤트를 발표하였으며, 같은 해에 [S.T]의 회원이 되었다. 
 성능경의 <신문 1974.6.1 이후>는 정부의 언론탄압에 대응하여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벌인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태동한 1974년 10월 24일 이전에 발표됐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작가가 시사문제에 눈길을 주었다는 점에 있다. 개념미술적 경향으로 분류되는 성능경의 이 작품은 엄혹한 군부통치가 만들어낸 70년대 당시의 살벌한 정치상황 속에서 아주 민감한 부분을 터치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작가의 발언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능경은 70년대 말에 나타난 ‘현실과 발언’ 그룹의 회원들이 보여준 과격하며 생경한 화풍과는 달리, 개념적이며 은유적인 방식을 통해 대(對)사회적 발언을 이어갔다. 당시 성능경의 이러한 행위가 서슬 퍼런 정부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의 이면에는 그의 표현 방식이 지닌 이러한 난해성이 한몫을 했다. 김지하와 황석영으로 대변되는 70년대 중반 당시의 참여문학과는 달리, 미술계에는 그 어떤 반정부적 저항도 시도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에 언론 상황을 감지, 이를 작품화했던 것이다. 훗날, 성능경은 당시 미술평론가 방근택만 유일하게 자신의 작업에 주목, “왜 성능경은 광고에 주목하지 않는가?”라고 질타한 바 있다고 술회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70년대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성능경을 꼽는다. 1074년 이후 그의 작품은 주로 언어와 신체, 그리고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의 이면에는 늘 일상이 놓여있다. 그는 이벤트, 오브제, 설치, 그리고 훗날 90년대 들어서 시작한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작품의 모티프를 얻고 이를 작품화 했다. <S씨의 반평생>(1977), <특정인과 관련없음>(1977), <사과>(1976), <위치>(1976), <끽연>(1976), <수축과 팽창>(1976), <현장1>(1979) 등등, 성능경의 작품들은 모두 일상에서 도출된 소재들이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일상을 이야기한다.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 삶의 도정에서 만난 친구들 혹은 가족을 둘러싼 추억의 단면들(<S씨의 반평생>)을 비롯하여 신문에서 선택한 여러 인물들의 초상(<특정인과 관계없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작들(<사과>, <끽연>), 오브제로 선택한 미술잡지(공간)를 자신의 신체 일부와 접촉시키는 동작(<위치>) 등등, 성능경은 사물과 사회에 자신의 신체와 의식을 결합시켜 이를 ‘사건화’ 했다. 70년대의 미술 공간에서 아마도 성능경 만큼 사건의 개념화에 투철했던 작가도 드물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는 <S.T> 그룹의 회원들이 당시 개념미술의 정전으로 간주되던 조셉 코주스(Joseph Kosuth)의 ‘철학이후의 미술(Art after Philosophy)’을 번역, 스터디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개념미술에 대한 정보가 주로 ‘공간’를 통해 소개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일본의 모노하를 비롯하여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와 같은 신사조들에 관한 정보가 ‘미술수첩’이나 ‘아트 인 아메리카’와 같은 해외서적을 통해 화단에 유포되고 있었다. 그러나 소위 ‘정보로서의 미술’을 가리키는 개념미술이란 용어가 화단에 정착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당시 한국 화단에는 가히 ‘이우환 신드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열풍이 불고 있었다. 이 무렵 화단에서 오브제에 대한 관심과 설치가 급격히 늘어난 데에는 이우환을 비롯하여 세끼네 노부오(關根申夫), 스가 기시오(관(菅 木之雄)와 같은 일본 모노하 작가들의 영향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의 대다수는 일본에서 발행하는 미술수첩을 정기구독, 모노하 작품을 적당히 카피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오늘날 성능경에 대한 국내외 미술계의 관심이 점증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화단의 이런 풍토와도 무관치 않다. 
 내가 성능경을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이다. 그의 작품은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석이 전혀 없다. 성능경은 오로지 성능경일 뿐이며, 성능경의 작품은 오로지 성능경의 작품일 뿐, 그 선례가 없다. 이는 바로 성능경 작업의 독창성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작품을 둘러싼 그의 의식의 치열성을 말해준다. 70년대 중반부터 성능경은 신문에서 사용하는 소위 사회적 약호(code)에 주목했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흔히 등장하던, 인물들의 눈을 검정색 직사각형으로 가려 익명성을 보장하는 코드나(<특정인과 관계없음>), 사건 현장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흰색의 점선과 화살표와 같은 코드에 주목함으로써(<현장1>), 성능경은 사회적 약호를 자신의 작품 속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코드’의 수용은 그의 작품을 더욱 개념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문> 연작이 그러했듯이, 정치적 검열의 시선을 교묘히 피해나감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Ⅲ.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충돌을 일으키던 1980년대의 공간에서 성능경은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오가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은 그의 작품 활동의 기반이 되었던 <S.T> 그룹이 해체되고, 그는 ‘아무도 불러주는 곳이 없는’ 둥지 잃은 새의 신세가 되었다. 이벤트를 같이 하던 이건용은 군산대 교수가 돼 서울을 떠나 있었고, 김용민 역시 행방이 묘연했다. 김용민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던 그는 끝내 종적을 감추었다. 최근에 나는 충남 서천에 있는 모 정신병원에서 그를 찾아내 인터뷰를 했다. 이 사연 많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자. 
 1990년대 초반에 성능경은 ‘품바’식의 퍼포먼스로 무장하고 다시 화단에 나타났다. 여행용 가방에 모자, 수영복, 고무줄 새총, 훌라후프, 면도용 거품통, 탁구공, 부채, 맥주컵 등등, 퍼포먼스에 필요한 소품을 가득 담고 나타나즉흥이 가미된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의 작품은 ‘버라이어티’를 방불케 할 만큼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언어와 행위, 노래가 결합된 성능경 퍼포먼스의 모태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시골의 장터에서 벌어지는 ‘일인극 품바쇼’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은 이미 예술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디 예술 아닌 것이 있소?”라고 묻는 성능경은 유치찬란한 복장을 하고 촌철살인의 경구를 적은 탁구공을 고무줄 새총으로 관객을 향해 날린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관객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 날린 것이리라. 그렇게 함으로써 과도한 상업주의에 의해 빈사상태에 빠진 예술을 소생시키고, 예술이 지닌 풍자와 비판의 기능을 회복시킴으로써 사회를 좀 더 살맛나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 도중 1000CC짜리 호프 잔에 오줌을 가득 누어 마시는 그의 극단적 행위는 필시 썩어가는 사회에 대해 던지는 단말마적 신체의 저항이 아닐까? 

                                      <Public Art,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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