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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의 탄생 백 주년과 우리의 전통 찾기

윤진섭

<샘>의 탄생 백 주년과 우리의 전통 찾기

                                           윤진섭(미술평론가)

 올해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 1887-1968)이 <샘(Fountain)>을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그는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에 변기를 출품하여 조용하던 미국 화단에 난데없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남성용 변기가 심사의 대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뒤샹은 1913년에 열린 [아모리 쇼]에서 발표한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미국독립미술가협회의 디렉터를 맡았다. 그는 자신이 이 협회에서 주최한 첫 전시인 [앙데팡당]전의 작품배치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 사건이 더욱 의미있는 것은 <샘>이 지닌 모호성 때문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의문투성이였다. 새하얀 변기의 한 면에 명기된 ‘R. Mutt 1917’이란 서명이 그런 의문을 촉발시켰다. 도대체 ‘R. Mutt’가 누구인가? 나중에야 그것이 변기회사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만 해도 이 이름의 출처는 오리무중이었다. <샘>은 당시 화가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시한폭탄’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으며,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심사에서 떨어진 뒤 행방이 묘연해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작품의 작가가 다름 아닌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는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도록 한 이 전시에 필라델피아 출신의 머트(Mutt)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을 출품했고, 이는 규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심사부위원장인 마르셀 뒤샹이 이 작품을 탈락시키기로 한 이사회의 결정에 항의의 표시로 이사직을 사임하기에 이른 것이다. 뒤샹은 전시 개막 후 한참이 지나도록 전시장 칸막이 뒤에 처 박혀 있던 변기를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하는 291화랑으로 가져가 사진을 찍었다. 스티글리츠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90도로 뉘어져 위를 향한 변기의 바닥 부분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이 작품 사진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1917년 5월, 마르셀 뒤샹 자신이 간여하던 <장님(The Blind)>이란 잡지를 통해서였다. 아무튼 그 뒤로 <샘>의 원작은 사라졌으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 후 이 작품의 부본이 세 차례에 걸쳐 나타났는데, 시드니 제니스에 의한 1950년 판과 1963년의 울프 린데 판, 1964년 아르투로 슈바르츠 판이 그것이다. <샘>은 현재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 소장돼 있다.  
 알다시피 마르셀 뒤샹은 종적이 묘연한 <샘>의 운명처럼 신비스런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1913년에 <자전거바퀴>를 제시하여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이른바 기성품을 의미하는 ‘레디메이드(ready-made)’의 서곡이었다. 그는 이어서 병걸이(1914), 부삽(1915) 등등 기존의 일상적 사물을 ‘선택’한 뒤 이를 제시하는 ‘제시의 전략’을 구사하다가 1917년에 이르러 문제의 <샘>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망막에 의존하는 회화를 부정함으로써 종국에는 레디메이드의 선택이란 ‘반(反)’미학을 수립한 그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일은 자신의 작품이 자본주의의 체제 속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물론 그도 아렌스버그와 같은 저명한 소장자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팔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프랑스어 강의나 남의 작품을 사고 파는 중개 행위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기존의 미학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통해 상업주의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의 본질이 숨겨져 있다.  
 이미 그에 관한 논문이 수천 편에 이를 정도로 신화화된 뒤샹의 삶과 예술은 그 온기가 아직도 식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환되고 있다. 다다(Dada) 백 주년을 맞은 작년에 이어 올해가 <샘>의 탄생 백 주년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서구에서는 다다 백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지만 우리의 경우 조용하게 지나갔으며, 과문이지만 <샘> 탄생 백 주년을 기리는 행사는 어디에서고 없는 것 같다. 생존 시에 다다이스트들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던 그는 좋아하는 체스나 두면서 은둔생활을 즐겼다. 그는 자신을 그냥 ‘숨쉬는 사람’으로 부르며, ‘그림조차 그리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기 원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무려 이십 년 동안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주어진 것>(1946-66)이란 작품의 제작에 몰두했다. 유언에 따라 사후에 공개된 이 작품은 작은 문구멍을 통해 본 기이한 광경을 골자로 한다. 낡고 두꺼운 나무문에 난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면 가스등을 손에 쥔 나체의 여인이 덤불 위에 누워있는 광경은 에로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비스럽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여자로 분장한 로즈 셀라비(Rrose Sēlavy)는 남녀 양성에 대한 마르셀 뒤샹의 신비스런 독자적 버전이다. 예명이 드문 서구의 전통에서 그는 왜 하필이면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을 고안했을까? 더구나 그 이름은 ‘에로스, 그것이 삶이다(C'est la vie)’란 뜻이 아닌가? 
 툭하면 마르셀 뒤샹을 거론하지만 국내의 작가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한 없이 난해해 보이기만 하는 뒤샹의 작품들 중 상당수가 서구의 오랜 전통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에서부터 <상자 속의 가방>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서구의 오랜 문화적 전통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맹목적으로 서구의 미술을 추종하는 한국의 작가들에게 한국의 고전을 뒤질 것을 암시해 준다. <샘>의 탄생 백 주년을 맞이하여 뒤샹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부디 우리의 것에서 뿌리를 찾을 것을 권하고 싶다.    
                    
                                          <미술세계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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