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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에 대한 미술사적 재평가 작업의 개가

윤진섭

김구림에 대한 미술사적 재평가 작업의 개가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아마도 한국의 전위미술 1세대 작가로 김구림을 꼽는데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구림은 회화를 비롯하여 오브제, 해프닝, 대지미술, 메일아트, 바디 아트, 실험영화, 판화, 비디오 등 미술의 전 영역에 걸쳐 실험을 거듭해 왔고, 무용을 비롯한 무대미술에도 관여한 바 있다. 1950년대 후반이후 약 50여 년에 걸친 그의 활동은 나이 80을 바라보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서에 열린 그의 회고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전방위 작가인 그의 예술과 인생, 그리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 헌정된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김구림이 차지하는 위상은 60년대 후반에 비롯된 해프닝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을 가리켜 ‘실험’ 혹은 ‘전위’라고 명명한다면 그 본격적인 현대미술의 전개과정에서 김구림이란 이름 석 자는 단연 미술운동의 최 일선에 위치한다. 해방 공간과 6. 25 전쟁, 그리고 60년대의 근대화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앵포르멜’ 작가들의 회화적 실험은 점차 주류미술로 자리 잡아 나갔다. 이른바 앵포르멜의 선두주자인 <현대미협>, <벽전>, <60년 미협>, <악뛰엘>의 회원들 대다수가 70년대에 이르러 단색화 쪽으로 방향을 트는 반면, 김구림을 비롯한 일단의 해프너들은 ‘타블로’ 밖의 세계에 천착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앵포르멜 작가들이 전위적 실험으로부터 점차 거리가 멀어지면서 급격히 제도화되기 시작한 이면에는 미협을 중심으로 한 화단의 정치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 무렵 화단의 관심은 국전에서 국제전으로 그 중심이 점차 옮겨가고 있었다. 미협의 국제분과위원회는 상파울루비엔날레, 파리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의 출품작가 선정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고, 국제전 참가는 미협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일부 작가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 미협의 중심세력이 바로 ‘70년대의 단색화’ 작가들이었으며, 그 전신이 ‘앵포르멜’인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미술평론가 이일이 명명한 ‘확산’과 ‘환원’만큼 이 시기의 미술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도 흔치 않다. 방법적인 면에서 볼 때 김구림을 비롯한 일단의 해프너들이 미술의 ‘확산’을 꾀했다고 한다면, 단색화 작가들은 회화 중심의 밀도 있는 ‘환원’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전혀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공과를 논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굳이 규정을 짓자면 전자가 미술의 외연을 확장시킨 반면, 후자는 백색을 중심으로 고유의 미학을 내면화시켰다는 점에서 ‘환원’에 값하는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단색화 운동이 80년대 정치적 격변의 상황에서 민중미술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화단의 중심으로 굳건히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자적인 미학의 정립과 전개에 대한 단색화 작가들의 뚜렷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바, 이는 90년대 이후 70년대의 단색화에 대해 현대미술사 학계와 비평계가 보인 도저한 관심과 학술적 성과가 말해주고 있다. 
 이 단색화를 중심으로 한 주류권의 밖에 위치하는 작가가 바로 김구림이다. 주지하듯이 김구림은 국내 최초의 메일아트 작품인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 김차섭과 공동작업)을 비롯하여 서구의 대지미술과 동일한 시간대를 보여준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제4집단의 결성과 함께 시도한 해프닝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 실험영화의 효시인 <24분의 1초의 의미>(1969) 등등 전위작가로서 전 방위적 활동을 전개해 왔다. ‘미술의 이단아’, ‘전위예술가’, ‘한국의 아방가르드’ 등등 오늘날 김구림에게 따라붙는 다양한 수식어는 전위예술가로서 그가 보여준 프로메테우스적 삶에 대한 헌사이다. 그의 삶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십 년간 그에 대해 내려진 미술계의 평가는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2011년에 김달진미술연구소가 실시한 한 앙케트에서 그는 재조명해야 할 작가 리스트 2위에 오른 적이 있는데, 이는 그의 작가적 역량에 비해 저평가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 김구림의 회고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년 홍상수 감독의 동일 제목에서 차용)는 제목이 말해주듯 그간 저평가돼 온 김구림의 작품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명시적으로 ‘재평가’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여준 전시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는 화랑 차원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매머드급 작품들이 재현돼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전위예술에 대한 이해의 부족, 또는 이런 저런 사정에 의해 당시에는 실현이 어려웠던 작품들이 재현된 일은 이번 전시가 올린 개가임에 분명하다. 작가를 괴롭히는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가 작품의 실현임을 감안할 때 미술관 전시는 그런 작가의 상상력을 구현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 전시는 작가인 김구림 개인에게 있어서나 그동안 미실현된 그의 작품을 보기를 갈망해 온 관람객에게 있어서나 중요한 기회였다. 
 이번 전시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어려운 창작 조건에도 불구하고 실험 혹은 전위적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많은 작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는데 있다. 이는 특히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업주의의 횡포 앞에 작가정신을 포기하는 작가들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는 오로지 작가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무언의 교훈에 다름 아니다. 
 나는 1995년에 기획한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5-1995]전의 도록 서문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의 작가들을 겨냥해 작업 초기의 맹렬한 실험을 그친 몇몇 작가들의 행적을 돌아보면서 작가정신의 포기가 작가로서의 삶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의 전시는 단순히 물리적인 행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파장과 울림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이번 김구림 회고전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값지고 중요한 전시였다.     
                                                                     <아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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