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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확장과 도전, 홍순명의 회화적 실험들

윤진섭

사유의 확장과 도전, 홍순명의 회화적 실험들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홍순명의 작업 전체를 조망해 보면, 한 사람의 작가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에 대한 깊은 사유와 만나게 된다. 철학자가 언어로 사유의 흔적을 남긴다면, 당연히 그는 화가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재료들을 사용해 사유의 결과물을 남긴다. 캔버스와 종이, 붓, 기름, 물, 흙, 기타 그가 작업의 범위를 좀 더 확장했을 때 나타나는 설치라든지 오브제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니까 홍순명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재료나 방법론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먼 훗날 세계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탐색이 마지막 귀결점에 당도했을 때 우리의 눈앞에 전개될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부분과 전체’를 작업의 화두로 삼아 추구해 나가고 있는 지난한 작업의 도정에 대한 나의 관심은 다름 아닌 홍순명 바로 그가, 이 시대의 삶의 조건과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동시대의 작가들 중 비중있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두어진다.   

 1959년생인 홍순명은 1970년대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트린 혹독한 군부독재 시기의 끝 무렵에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80년대 초, 중반에 화단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의 화단 이력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앙데팡당전](1981, 덕수궁 현대미술관), [서울 다큐멘타전](1982, 미술회관, 서울), [겨울 대성리전](1983, 경기도 대성리 화랑포 강변), [부산 청년비엔날레](1983, 부산 시민회관) 등이다. 

 그러나 그의 화단 이력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1985년 그가 26세 때 서울 아랍문화원에서 열린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전]과 [시대정신]에 가담한 사실이다. 홍순명이 준비는 마쳤으나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바람에 참여하지 못한 [힘전] 사태는 민중미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정부의 탄압을 촉발시킨 대대적인 사건으로 민중미술 계열의 작가들을 결집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시대정신]은 우파 정부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지닌 젊은 미술인들의 결집체였다. 이처럼 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청년작가의 시기에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을 고르게 체험한 홍순명의 내면의식은 현재의 작업을 관류하는 두 요소를 아우르고 있어 흥미롭다. 즉, 형식에 있어서의 모더니즘 내지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양상과 내용에 있어서의 사회비판적 의식이 그것이다. 

 한 작가의 작업을 이해할 때, 그 맹아가 되는 초기 활동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작업을 하게 되었는가? 만일 커다란 변화나 전환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시론이다. 


Ⅱ.

 [힘전] 사태가 일어난 해인 1985년 가을에 홍순명은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 유학은 대다수의 국내 미술인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떠난 프랑스 유학이었지만,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석판화를 전공한 그에게 있어서 당시 판화계의 상황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그러한 회의는 주로 기법과 표현을 둘러싼 것이었다. 이른바 정형화된 기법은 정형화된 표현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매체에 대한 회의는 결과적으로 매체에 대한 개방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회의 이후에 그가 판화를 중단한 사실이나, 그 반대급부로 미술의 다양한 매체에 대해 개방된 의식을 갖게 된 이면에는 이처럼 미술의 표현방법을 둘러싼 깊은 성찰이 있었다. 

 전공인 판화의 중단과 함께1)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증폭된 미술의 다양한 표현기법과 매체에 대한 관심은 훗날 홍순명을 한국 화단의 중요한 실험작가로 각인시키는 요인이 된다. 사실 그가 이번에 <제17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예술이 지닌 ‘실험성’이었다. 기법의 연마나 제한된 소재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자기 예술의 지향점으로 삼아 꾸준히 연마하는 일이야 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예술가의 태도라는 사실을 새삼 각인시켜 준 것이다. 

 큰 틀에서 볼 때 홍순명의 작업은 두 개의 범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인 작업으로써 회화, 오브제, 설치작업이 여기에 해당하며, 사회적 미술교육에 해당하는 학생들과의 협업은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 두 번째의 범주, 즉 사회적 미술교육의 맹아가 되는 것이 바로 1991년에 그가 실천한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깡(Caen)이란 특수구호센타(정신병원)에서의 협업이다. 홍순명은 이곳에 수용된 정신병 환자들과 공동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미술 작업을 펼친 뒤 완성된 작품들 을 가지고 전시를 하였다. 이때의 경험은 홍순명이 미술을 통해 ‘사회적 퍼포먼스’를 펼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Ⅲ. 

 예술가에게 있어서 매체를 비롯하여 소재, 주제, 재료에 대한 생각이 삶과 유리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마치 물과 음식물이 몸에 들어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종국에는 한 몸을 이룬다. 나는 왜 저 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저 풍경이 어떻게 나의 소재가 되었는가? 그 계기와 과정을 뚜렷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 예술의 신비란 바로 이를 일컬음이거니와, 이는 창작 심리에서도 마찬가지다. 

 1988년, 프랑스 유학시절에 홍순명이 제작한 일련의 석판화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인간에 대한 그의 진한 사랑과 애정을 느꼈다. 

 한 남자의 머리를 안고 비통한 표정에 잠긴 인물의 모습에서 보듯이,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그의 진한 사랑은 훗날 보도사진의 일부를 잘라내어 부분을 그린 <옆-풍경 Sidescape> 시리즈의 근간이 되고 있다. 컴퓨터로 인터넷을 검색, 수많은 보도사진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사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곁가지를 선택한 뒤, 이를 작은 화폭에 옮기는 그의 작업은 짐짓 기존의 풍경화 전통에 대한 반역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동안 풍경화의 관례로 간주돼 온 중심의 해체인 동시에 주변에 대한 가치의 복원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어떤 사건이든 힘의 역학2)에 의해 조종된다는 자명한 사실이 숨겨져 있다. 가령 그가 선택한 어떤 풍경의 중심은 이라크 전쟁이 야기한 한 도시의 폭격 장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보도한 한 장의 사진은 자명하듯이 사건의 전모와 그 이면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전해주지 않는다. 

 홍순명의 <First Collection> 프로젝트는 중, 고등학생들과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미술작품을 소유해 본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자는 소박한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산타페의 캐피탈 고등학교와 경기도 화성중학교를 세 차례씩 찾아가 이루어졌다. 수업 첫 시간에 홍순명은 현대미술 전반에 대해 강의를 한 뒤, 자신의 작품이 보도사진의 일부임을 말해주고 그 주변의 광경이 과연 어땠을 지 상상해서 그리도록 권유하였다. 둘째와 셋째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작게 프린트된 자신의 작품을 나누어 준 뒤, 그 사진을 참고로 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완성된 학생들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교환하였다.

 결과는 실로 다양했다. 어떤 학생은 돌을 그린 홍순명의 프린트된 작품에 잇대어 공룡과 컵을 들고 있는 다람쥐(?)를 그려 넣었다. 또 다른 학생은 나무 판자가 십자 형태로 교차된 홍순명의 작품에 잇대어 십자 형태의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새 둥지를 그린 뒤, 어린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면과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그렸다.3)

 ‘꿈꿀 권리’라는 프로젝트의 작업노트에서 홍순명은 다음과 같이 그 의도를 적고 있다. 


 “내가 하는 다양한 작업들은 바둑을 두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큰 집을 짓는 과정에서 한쪽에서는 ‘옆-풍경 Sidescape’을 짓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부분과 전체’를 짓고 있고 또 다른 구석에서는 ‘꿈꿀 권리’라는 집을 짓고 있다. 아마도 내년부터는 또 다른 구석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기구’라는 집을 짓기 시작할 것 같다. 바둑이 끝나갈 무렵처럼 이 모두가 모여 큰 집으로 만들어 질 때 그 모습이 어떨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나도 그 모습이 궁금하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그러니까 홍순명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재료나 방법론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먼 훗날 세계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탐색이 마지막 귀결점에 당도했을 때 우리의 눈앞에 전개될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라고 썼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섭렵하던 중 마주 친 앞에 인용한 문장만큼 홍순명의 작업의 미래에 대해 암시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홍순명은 거침없는 상상력과 떠오른 아이디어를 역시 거침없이 실천에 옮기는 자유로운 의식의 소유자이다. 그의 예술을 떠받치는 제1의 덕목은 무엇보다 열정이다. 하루 종일 인터넷을 서핑하여 마음에 드는 보도사진을 찾아내는 집중력과 이를 수천 점의 작은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열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현재와 같은 독창적인 그의 예술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Ⅳ.

 홍순명의 세계에 대한 사유가 인류 보편의 지평에 닿아있다는 증거는 그가 선택하는 소재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민족주의’라든지 ‘한국성 (Koreaness)’ 혹은 ‘아시아성(Asianess)’과 같은 편협한 이데올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들춰내는 세계적인 사건이나 정치 스캔들을 비롯하여 인류의 참혹한 전쟁이나 지진, 해일과 같은 지구촌의 대재앙 등 광범위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애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이 비단 세계적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수장된 팽목항을 비롯하여 밀양의 송전탑 주변, 혹은 미아리의 집창촌 등 국민적 관심을 촉발시킨 사건의 현장4)을 방문하여 그곳에 널려있는 다양한 사물들을 수집, 오브제 작품으로 만든다. 아마도 홍순명의 <사소한 기념비(Ordinary Monument)> 연작 가운데 가장 압권은 세월호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일 것이다.


 “이번 전시를 2014년 4월에 침몰한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바친다. 

 그림은 제단화의 형식을 빌려 삼면화로 그렸고, 사건 현장인 팽목항에서 가져온 오브제들로 작은 기념비들을 만들어 공간에 설치했다. 기념비들은 배 안 혹은 물속의 아이들 모습을 상상하며 홀로 있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있도록 배치해 보았다. 나의 작품이 이 사건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작가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어이 없이 죽어간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헌정한 작품이다. 전시 형태를 빌린 일종의 위령제의인 셈이다. 비록 오브제라는 현대적인 매체와 설치 형식을 빌려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작업노트를 참고하면 쉽게 이해가 가는 작품이다. 특히 서양 제단화(icon)의 고유양식인 삼면화 형식을 빌린 사실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지닌 제의적(ritual) 특징이 잘 드러난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습득한 사물들을 투명한 비닐 랩으로 수없이 감싸 반짝이는 은색 오브제로 전환시키는 홍순명의 <사소한 기념비> 연작의 특징은 익명성이다. 그것들은 사건의 역사적 온기를 간직한 ‘특정한 사물들’임에 분명하나, 홍순명의 행위를 통해 비닐 랩의 은색 외피를 둘러씀으로써,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익명적 오브제로 전환된다. 

 그것은 그의 작은 쪽 그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중성적인 느낌을 준다. 그것들은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사건들의 내용과 닮았다. 신문이나 T.V의 보도에서 흔히 보듯이, 사건의 본질을 피하기 위해 짐짓 물타기를 하거나, 본질을 흐리는 행위와 발언들은 홍순명이 흔히 쓰는 중성색의 애매한 흐리기 붓질을 연상시킨다. 아니 틀렸다. 사실은 그 반대로 홍순명이 보도의 행태를 예의 중성색을 동반한 흐리기 붓질로 은유적으로 비판한다고 보는 편이 보다 온당한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홍순명은 보도사진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의 일부를 선택하는 행위와 함께, 이 흐리기 붓질을 통해 보도사진의 맹점에 대해 정곡을 찌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인 익명성5)을 비롯하여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즉 원본 없는 복제의 무한증식(Simulacre)을 예의 보도사진 이미지를 빌린 그림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비판한다. 그의 작업은 익명적이며6) 진실에 대한 회의를 통해 현대 사회가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있음을 고발한다.


 “나의 작업은 인터넷이나 신문, 잡지 등에 보도된 사진 이미지를 모아 그 이미지의 한 부분을 선택한 후 잘라내어 회화로 다시 재현해 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홍순명이 인터넷에서 구한 보도사진의 이미지를 잘라 그림을 구성하는 행위는 얼핏 역사를 해석하는 사학자의 진지한 태도를 연상시킨다.7) 이 점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취재하는 사진기자의 촬영 행위에도 역시 은연중 사건에 대한 해석적 태도가 깃들 수 있다는 가정과도 맞물린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장의 한 복판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진기자는 사건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을 것인지, 사진미학적인 명장면을 남길 것인지 순간적으로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심치 않게 보도 내용이나 보도 사진들이 음흉한 인간들의 간계에 휘말려 결과적으로 거짓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8)

 

Ⅴ.

 작가도 언급한 것처럼, <옆-풍경 Sidescape>는 주제 면에서 볼 때 1990년대를 관류한 <부분과 전체>의 연장선상에 있다. 198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한 홍순명은 낯선 이국땅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살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난 책이 독일의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였다. 이 책의 제목을 자신의 작품의 제목으로 차용하면 서 그는 “작은 것과 큰 것, 중심과 주변,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등의 상호연관성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작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부분과 전체>가 화해와 조화, 공존에 대한 연구였다면, <옆-풍경 Sidescape>은 독립과 초월에 대한 추구”였던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회화적 형식에 대한 탐구이자 실험이었다.

 홍순명의 작업에 있어서 회화적 형식에 대한 탐구는 진열방식과 작품의 구성방식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진열방식은 다시 병치, 산포, 스펙타클 등으로 구분된다. 가령 병치는 1천 7백 점에 달하는 1호 내외의 작은 캔버스들을 선반 위에 일렬로 배열한 경우이며,9) 산포는 벽면의 모서리, 전시장의 천장 부근 등지에 수십 점의 작품을 집중, 혹은 산발적으로 배치한 경우이다. 반면, 스펙타클의 대표적인 경우는 2015년에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에서 한쪽 벽면 전체에 13줄의 선반을 설치하고 1,800점의 작은 소품들을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스펙타클한 광경을 연출한 전시를 들 수 있다. 

 작품의 구성은 각각의 단위들이 모듈을 구성하여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과 낱낱의 작품이 독립된 작품으로 기능하는 경우로 대별되는데, 이는 반드시 홍순명의 독자적인 방법론만으로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가령, 여수 엑스포에 전시된 수족관을 그린 대작 <Yeosu, May 29, 2012>(oil on canvas, 325x645cm, 2013)는 같은 크기의 캔버스 60쪽으로 이루어져 있다.10)

 홍순명의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의 원형은 바다를 소재로 한 <부분과 전체> 연작을 들 수 있다. 벽돌 혹은 두꺼운 책을 연상시키는 입체물로 구성된 이 대작은 일렁이는 파도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대한 화면의 중간 중간에 바다 풍경의 일부가 그려진 입체물을 끄집어내어 화면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오브제 위에 그려진 환영의 조합임을 보여준다.11)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전체와 부분이 갖는 공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한 후 이를 심화시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Ⅵ. 

 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홍순명은 <부분과 전체>라는 제목 아래 미술에 관한 수많은 형식 실험을 했다. 설치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일련의 실험은 쥐를 비롯하여 곤충, 물고기, 거북이 등 살아있는 생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도를 떠나며]12)라는 전시에서 쥐 30마리를 길렀는데, 전시 후에 다 죽이게 된 뒤부터 곤충에 대한 실험을 중지하게 된다.13)

 이상 살펴본 것처럼 홍순명은 미술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실행해 왔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삶의 현장에서 구한 사물들에 천을 씌운 뒤, 그 위에 유성물감으로 현장의 풍경을 그린 오브제 작품들이다. 아스토리아 호텔, 밀양, 노량진, 팽목항, 여수 등등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구한 물건들에 천을 씌운 뒤 그 위에 사고가 난 주변의 풍경을 그리는 행위는 오브제와 회화의 결합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오브제 회화인 셈이다. 홍순명 특유의 상상력이 낳은 이 일련의 오브제 회화 연작은 오브제가 지닌 현장성과 사건성의 양면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중의적이다. 그는 현장에서 습득한 사물들에 외피를 씌움으로써 의미를 무화시키는 한편, 다시 그 위에 현장의 일부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사건을 상기시키는 긍정/부정간의 이항의 대립과 이를 초월한 화해를 기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건을 둘러싼 모호한 지점, 즉 경계선 상의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14). 상당수의 보도가 그러하듯이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1)그 이후 홍순명은 다시 판화에 손을 대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이를테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을 사건을 비롯하여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갑과 을 사이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갈등 등은 모두 이러한 힘의 역학 관계에서 빚어지는 사태들이랄 수 있다. 

3)홍순명이 행한 <꿈꿀 권리> 프로젝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2012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열린 [우리(Woori)전]에서 프라하의 집시 어린이들과 행한 공동작업(My Dream, My Abata)일 것이다. 그는 체코의 집시 어린이 3명, 한국의 다문화 가정 어린이 1명, 한국의 정신지체아 1명 등 5명을 모델로 한 작업을 St. Giles 성당의 바로크 룸에 설치하였다. 홍순명화집, 현북스 발행, 2015년 연보 참조. 

4)기타 홍순명이 작업의 소재로 다룬 지명들은 다음과 같다. 전남의 봉두마을, 기름 유출 사고가 난 여수, 폭발 사고가 발생한 포천의 포사격 연습장 등. 

5)예컨대, facebook에서 영화배우 Brad Pitt를 검색하면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똑같은 대문 사진으로 올린 여러 명의 친구들을 볼 수 있다. 이 경우 누가 진짜 브래드 피트이고 가짜 브래트 피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6)홍순명의 그림만을 보고 보도 사진의 원본 이미지 전체를 연상하기란 매우 어렵다. 

7)소위 ‘가위와 풀’이 암시하는 역사가의 주관에 의한 역사 서술 방식을 가리킴. 

8)홍순명의 <Baby & John Gray>(100x80cm)는 영국에서 벌어진 충직한 개와 관련된 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개가 작고한 주인을 애타게 그리며 수년 째 묘지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소문이 벌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뎌들어 관광지가 됐는데, 사실은 관광수입을 탐낸 사람들이 날조한 이야기였다는 것. 팩트와 허구 사이의 간극을 지적한 그림이다. 

9)이의 대표적인 경우는 파주 출판단지에 소재한 Mimesis Art Museum에서 열린 개인전(2014)이다. 

10)모듈에 의한 격자형 구조를 지닌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데이빗 호크니의 일련의 모듈 풍경화와 인물화를 둘 수 있다. 그러나 호크니가 진한 색조로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린 것에 반해 홍순명은 제목으로 사건이 난 장소와 날짜를 표기할 정도로 사건을 중시하고 있으며, 또한 색조도 흐린 중성색 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한편, 여수 기름 유출 사고가 난 해인 2014년에 홍순명은 이를 소재로 한 Memorialscape 작품을 그린다. 

11)<부분과 전체 바다2(The Part and The Whole-sea2)>(Polyol, Acylic on canvas, 285x505x43cm, 1997) <부분과 전체 바다5(The Part and The Whole-sea5)>(Polyol. Acrylic on canvas. 192x396x45cm, 2001)

12)2000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재2회 부산아트페스티벌을 말함. ‘고도를 떠나며’는 이 전시의 주제이다. 이후 이 전시는 부산비엔날레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그 외에도 홍순명은 [의식주], [Insectopia] 등의 전시에서 거북과 곤충들을 혹사시킨 적이 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홍순명 화집, 2015년 현북스 발행. 연보 참고. 

14)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통해 홍순명은 은연중 에술의 힘을 믿고 있다는 신념을 드러낸다. 예술작품이 지닌 환기력은 미약할는지 모르지만 꾸준한 지속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지속성을 통해 무너진 사회를 복원할 수 있다는 작가적 신념은 그의 지난한 예술 행위를 지탱시키는 심리적 기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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