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우주와 인생에 대한 통찰:조성희의 한지작업에 대하여

윤진섭

우주와 인생에 대한 통찰:조성희의 한지작업에 대하여


                            윤진섭(미술평론가)


 한국 화단에서 한지(Hanji)가 예술의 주요 표현 매체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 이전에는 주로 동양화 분야에서 화선지를 사용하였으나 그것은 단순히 대지(帶紙)로서의 기능에 국한돼 있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지의 풍부한 물성적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면서 수제(手製) 한지가 작가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권영우, 정창섭, 박서보와 같은 70년대의 단색화 작가들이 한지에 주목,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갔으며, 최창홍, 함섭, 한영섭, 한기주, 박철, 유재구 등등 일관되게 한지만을 다루는 한지 전문의 작가들이 등장하여 한지작가협회를 결성,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한지는 한국의 독특한 정서를 표출하기에 적합한 전통적인 매체로 풍부한 가소성(可塑性)을 장점으로 꼽는다. 즉, 물에 불리면 어떤 형태로든 조형이 가능한 재료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조각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조성희가 이 한지에 주목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측면이 있다. 작가로서의 활동 초기에 섬세한 구상화로 출발하여 점차 추상화에 몰입한 그녀가 2000년대에 들어서 한지의 표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조성희의 작품은 인생의 축도이자 지나온 삶과 세월의 응축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나 연못 위에 가득 찬 연잎, 혹은 초원 위를 뒤덮은 클로버처럼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무수한 작은 원형의 한지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작가의 상념을 담고 있는 듯 하다. 그것들이 하나의 집합적인 양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읽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지닌 독특한 존재 양식은 작가와 관객간의 소통을 위한 매개물이다.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작가와 기나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런 엄청난 열정을 불러일으켰는가? 우리는 작가의 지난한 삶의 분비물인 작품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섬세한 내면과 작업을 향한 불굴의 의지, 무쇠도 녹일 듯한 예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감지할 수 있다. 

 

 조성희의 작품은 풀잎, 은하수, 버섯 등 자연물에 대한 하나의 유비(analogy)로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연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바라봤을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해 자연의 이미지를 뇌리에 떠올린다. 그것은 초원을 가득 뒤덮은 클로버 잎이나 연못 위에서 하늘거리는 연잎이어도 좋고, 또는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이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모습이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마주치게 될 강렬한 인상이 일순 스파크처럼 일어나 작가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삶 또한 반추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예술작품이 지닌 이처럼 신묘한 힘은 주지하듯이 작가의 투철한 ‘예술의욕’에서 비롯된다. 조성희의 기나 긴 예술적 편력을 되돌아볼 때 어떻게 해서 그녀가 오늘과 같은 한지를 이용한 단색 혹은 다색의 다양한 ‘오브제 회화’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행성 속의 삶(Life in the Gallaxy)>(132x270cm, 2012)과 <떠오르는 태양(Floating Sun(132x270cm)>은 조성희가 제작한 대작으로 우주와 삶에 대한 그녀의 통찰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보이는 우주의 광활한 표상은 그녀가 걸어온 인생에 대한 하나의 축도로서 그것은 곧 작가적 삶과 동일한 등식의 관계를 이룬다. 이 작품들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관조적 죽음(Contemplating Death)>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청색과 검정, 적색을 주조로 하여 깊은 공간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둠처럼 깊은 침묵의 세계’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준다. 삼각형, 사각형, 원, 입방체 등 다양한 기호를 등장시켜 우주와 삶의 원리를 상징화하고, 그 배면에는 드리핑 작업으로 현란한 우주의 세계를 가시화한 것이다. 그녀는 화면을 가득 채운 드리핑 작업과 함께 한지를 잘게 찢어 그 위에 색을 입혀 우주와 인생, 그리고 일상적 삶을 하나의 비유로 체계화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조성희는 한지와 유채를 겸용하여 독자적인 한지의 세계를 개척해 왔다. 그것은 경이로운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실로 노동집약적인 세계이다. 다색과 단색(최근에는 단색으로 점차 수렴되는 것이 특징이다)의 한지작업을 통해 내면에 이는 상념들을 한지의 파편에 담고자 한 것이다. 한지가 지닌 풍부한 물성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 조성희의 작업은 회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회화적 부조에 가깝다. 그것은 그녀가 조각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사실을 감안할 때, 필연적인 만남인 것이다. 그러나 조성희의 작품이 지닌 우월성은 그것이 단지 부조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매우 다양한 회화적 표현술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한지를 꼬아 작은 막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위로 오린 둥근 한지 조각을 붙이는 작업은 매우 지난한 작업에 틀림이 없으되, 나타난 결과는 놀라운 ‘시각적 잔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푸른 이끼 사이에 서식하고 있는 버섯들처럼 자연과 인생에 대한 하나의 유비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반추(Reflection)>(60.6x72.2cm, 한지 콜라주와 유채, 2014)는 이의 대표적인 경우로 다양한 사연과 일화들로 가득 찬 인생의 한 축도이자 자연을 통한 삶의 비유이다. 그것은 그녀의 동일 계통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생의 환희와 고통, 열락의 국면을 형해화(形骸化)하여 원이라고 하는 하나의 조형적 언어로 치환한 것이다. 


 그러나 조성희가 반드시 한지를 가위로 오려 만든 작은 원반으로만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지가 지닌 물성을 더욱 풍부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녀는 

한지를 손으로 찢어 작은 파편을 만들고 이를 캔버스 화면에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사용한다. 그 위에 청색, 녹색, 적색 등 다양한 색깔의 채색을 가해 다양한 색채의 바리에이션(계조)을 드러내고, 그와 동시에 손으로 찢을 때 나타나는 한지의 불규칙한 물성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다(多)’와 ‘하나(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단색을 사용한 조성희의 한지작품들은 가까이 다가가서 볼 때는 복잡하고 많은(多) 수의 국면을 노출하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볼 때는 하나(一)의 색으로 보이는 특수한 국면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반복과 행위, 촉각성을 특징으로 하는 ‘단색화(Dansaekhwa)’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노동집약적인 수공(手工)에 의해 제작되는 조성희의 한지 작품은 반복되는 수작업(手作業) 특유의 아우라를 지닌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혹은 극기(克己)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류(類)의 작업은 시간의 축적 혹은 과정으로서의 예술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수행(Suhaeng:performance)’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 국제적으로 부상되고 있는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는 유교, 도교, 불교가 어울려 혼효(混淆)되는 가운데 형성된 한국 특유의 문화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조성희의 한지 작업에 대한 이해와 평가도 이제는 이러한 문화적 준거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