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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관조를 통한 사색과 명상의 미학

윤진섭

자연 관조를 통한 사색과 명상의 미학


                 윤진섭(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Ⅰ.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서승원이 차지하는 위상은 기하학적 추상과 관련이 깊다.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에 재학 중이던 1963년  출범한 <오리진 그룹>1)을 통해 미술활동을 시작, 70년대 초반에는 <A.G>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상, <오리진> 그룹이 지닌 미술사적 평가는 기하학적 추상의 집단적 발현이라는 점에 두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초반이 지닌 정치사적 의미는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과 이듬해에 발생한 ‘5.16 군사정변’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는 전후 10여 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도 관계가 깊다. 소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로 일컫는 자유당 정권의 부패는 변혁을 요구당했고, 이에 부응하여 일어난 것이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에 의한 ‘4.19 혁명’이었다. 그러나 ‘4.1 9 혁명’의 여파로 탄생한 장면 정권은 무능했기 때문에, 반공과 구악 일소,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삼은 ‘5.16 군사정변’의 주체 세력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한다는 미명 하에 쿠테타를 일으킨 뒤 정권을 잡고 이후 강도 높은 통치술을 발휘하였다. 

 무력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박정희 정권의 통치력은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다양한 사회적 부작용을 낳았지만, 경제를 부흥시키는 등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보수적인 한국사회를 국제화 시대로 이행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962년을 원년으로 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소위 자유당 정권으로 대변되는 구제도의 폐해를 일소하고 ‘새마을운동’이 말해주듯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위한 첫 발자국이었다. ‘수출 100억 불 달성’이란 구호가 대변해 주듯, 당시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정책은 전근대에 머물렀던 한국사회를 근대사회로 이끄는 동인이었다. 제3공화국에 의한 공업화와 산업화 정책의 수립은 과감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낳았으며, 그 여파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한국 최초로 집단적인 기하학적 추상의 미학을 표방한 <오리진> 그룹의 출범은 당시 한국사회가 처한 경제적 현실과 도시화 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른바 고층빌딩의 건설, 아파트, 현대식 호텔, 커피숍, 경양식당의 등장으로 대변되는 현대적 디자인의 수요는 보다 세련된 미적 감각을 요구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 등 <오리진> 그룹의 멤버들이 시도한 기하학적 추상은 산업사회나 도시화의 형성2)과 깊은 연관이 있으면서도 작품의 모티브 측면에서 각기 그 기원을 달리 한다. 가령, 서승원의 경우는 산업화나 도시화 보다는 한국의 전통 한지를 비롯하여 창호(窓戶), 백자 등등의 소재에서 작품의 주요 모티브를 얻었다고 말한다.3)   



 “나의 고향은 서울이다. 대대로 이어온 한옥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랐다. 한옥의 자연스러운 한지인 창호지 문, 기하학적인 완자문양의 문 창살, 달빛이 드리운 창호지 문의 은근한 미, 그리고 안방, 건넌방, 사랑방 문창살에 바른 창호지의 흰색의 여유, 덧붙여 겹쳐진 한지의 흰색의 유연함.” 

                                    -서승원, 작업노트 중에서-



 서승원의 이러한 진술은 비록 그러한 사고가 담고 있는 개인적 소회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감이 있지만, 작가 개인 역시 작품이 탄생되는 사회적 배경이나 경제적, 정치적 토대와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발언의 외연을 싸고 있는 당시 한국의 도시화 내지는 산업화 현상과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Ⅱ. 

 서승원이 서울 토박이라는 사실은 모던한 감각을 일찍 내면화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60년대 당시 서울의 도심에 즐비했던 현대식 건물의 이미지와 자신의 거처인 한옥에서 겪은 유년시절의 미적 체험이 융합을 이루면서 <동시성>4)이란 명제가 생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서승원의 작품에서 ‘동시성’이란 명제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65년이다. 자료상으로 볼 때 캔버스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굵은 띠의 정방형과 그 아래 가로 놓인 긴 띠가 있는 작품에서5) 동시성의 명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동시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자에 따라 다 다를 수 있으나6) ,  정작 작가 자신은 “‘동시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으로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나를 통해서 동시에 발현”될 수 있도록 하며 “동일하고 균등한 시간과 공간의 추구”라고 밝힌 바 있다.7)  

 서승원의 이 진술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보이지 않는 것은 가령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넘어선 물리적 현상이나 실체 혹은 정신적 측면을 가리킨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려면 화가의 눈과 신체라는 매개물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는 신체를 빌려줌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비로소 드러낸다. 그런데 화가의 신체 역시 시간의 축(x)과 공간의 축(y)이 동시에 상호교차하면서 벌어지는 물리적 사건의 주체이다. 아마도 그래서 서승원은 저 너머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화가인 나를 통해서 발현되기를 바라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동시성’이란 그 자신이 진술하고 있듯이, “동일하고 균등한 시간과 공간의 추구”에 다름 아니다. 

 동시성이란 동일한 명제 하에 탄생한 서승원 작업의 50여 년에 이르는 회화적 궤적은 일견 단조로워 보일 수 있다. 60년대 중반이후 비롯된 날카로운 선과 면에 의한 화면분할과 그로 인한 형태상의 다양한 변주는 199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서면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해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Ⅲ. 

 서승원의 작업 이력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71년 당시 [A.G전]에 출품한 <동시성> 연작이다. 이 전시에서 그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91센티인 정방형 한지 오브제 작품 14점을 출품하였다. 작가 자신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그가 이 작품을 출품하게 된 배경에는 유년시절에 집에서 봤던 한지에 대한 추억이 깃들어 있다. 앞에 인용한 작업노트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서승원은 한지에 유달리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유년시절에 한지가 주는 은은한 미감에 매료당한 적이 있다.

 작품의 아이디어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이 의식의 심부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돌출된다는 창작심리학의 일반론을 받아들인다면, 서승원이 한지를 오브제로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한지를 여러 장 겹쳐 14개 패널의 오브제 시리즈로 만든 것은 기하학적 추상의 평면작업의 구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2000년대 이후의 후기 동시성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빛의 반투과 성질을 지닌 한지의 특성상 종이가 겹칠 때 생기는 은은한 미감이 서승원의 후기 동시성 연작에서 나타나는 여백과 색의 중첩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빛의 바리에이션의 요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전후(戰後) 한국 현대미술사의 문맥에서 볼 때, 서승원이 차지하는 위상은 (反) 앵포르멜 미학의 선구 세대, 다시 말해서 [청년작가연립전]으로 대변되는 실험과 전위의 선두주자라는 사실에 두어진다. 서승원이 활동하던 1960년대 중반이라는 시공간은 <현대미술가협회>, <벽동인>, <60년미협> 등 전쟁세대가 주도한 앵포르멜 미술이 지리멸렬해 지면서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요청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4.19세대’로 통칭되는 신세대의 등장은 기성세대의 무기력을 돌파하고 화단에 새로운 수혈을 감행할 주체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청년작가연립전]을 구성한 <무>, <신전>, <오리진> 그룹은 탈(脫) 평면을 주장하며,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적 미술사조로 등장한 팝아트, 옵아트, 네오다다, 해프닝 등등의 영향을 받아 전위적 실험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세 그룹 중에서 평면을 유지한 것은 <오리진> 그룹이었지만, 이들마저 선배 세대의 앵포르멜 화풍을 거부, 새로운 양식인 기하학적 추상에 경도되었다.  

 서승원은 <오리진> 그룹의 일원이면서 1969년에 출범한 <A.G> 그룹에 가입8),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당시 서승원이 <A.G> 그룹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그가 전위적인 실험의식에 경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승원은 앞서 언급한 한지 오브제 작품을 1971년에 열린 [A.G전]에 출품,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이 지닌 미술사적 의의는 일찍이 한지라는 물성에 주목, 여러 장의 한지들이 겹칠 때 드러나는 은은한 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두어진다. 이는 가령 동양화가 출신의 권영우가 일찍이 60년대 초반부터 화선지의 물성에 주목, 겹칩의 미학을 펼친 것과는 달리 서승원은 한지를 오브제 자체로 제시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는 14점의 시리즈 물을 통해 한지가 겹쳐질 때 드러나는 미묘한 물성과 색의 차이를 설치작품으로 보여주었다. 비록 단발로 그치긴 했지만, 서승원의 이 작품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 화단에 집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한지의 수용과 관련,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지를 이용한 이 작품이 왜 단발에 그쳤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서승원이 정방형의 한지 오브제를 사용한 것은 그의 전 작업과 관련, 해명에 따른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것은 기하학적 추상으로 표상되는 ‘동시성’ 연작이 서승원의 평생에 걸친 화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각형이 작품의 기조가 돼 왔다는 사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나타나는 ‘해체의 시기’에 색의 계조(gradation)가 작업의 중심적인 테마로 등장한다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다. 



Ⅴ.

 1969년에 서승원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두 점의 작품9)을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 화면의 상단부에 비스듬히 기울은 검정 사각형이 있는 작품은 1969년에 발행된 <A.G> 잡지의 표지에 실린 것인데, 이는 70년대 단색화의 등장에 앞서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한 작품은 가는 실선에 의한 기하학적인 형태만 제외한다면, 역시 단색화의 선구로 평가될 수 있는 작품이다. 서승원의 이 일련의 단색화 작품들은 1972년 [앙데팡당전]에 출품, 단색화의 맹아로 평가되는 이동엽의 <상황>과 허황의 <가변의식>에 앞서는 것들이다.10)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서승원의 업적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에의 참가이다. 일본 동경화랑의 사장인 야마모토 다카시11)는 일찍이 한국의 단색화에 주목, 이에 관한 전시회를 기획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5인의 한국 단색화 작가들이 초대된 이 전시는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와 한국의 미술평론가인 이일이 서문을 썼다. 

 이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은 일본이라는 타자적 시선에서 바라본 한국 단색화 최초의 풍경이란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주목을 받은 전시12)이다. 나카하라 유스케는 한국의 회화 중에서도 특히 “어느 화가들 작품에는 다른 나라 현대회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질이 현저히 나타나 있다”고 파악한 뒤, 특히 “중간색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화면이 지극히 델리케이트하게 마무리져 있는 회화”13)에 주목하였다. 이것이 바로 미술평론가 이일이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하나의 ‘빛깔’ 이상의 것”14)으로 파악한 단색화의 내용이다. 

 서승원의 ‘동시성’ 연작은 비록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그림의 중심 내용이긴 하지만, 색의 차원에서는 중간색을 사용함으로써 나카하라와 이일이 서술한 ‘중간색’과 ‘백색’의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60년대 초기의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60년대 후반 이후 서승원의 동시성 연작은 파스텔 톤의 중간색으로 돼 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백자와 창호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서승원의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특히 극단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심성이 일종의 유전자로 <동시성>의 색채에 스며들어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작의 제작 동기에 대해 서승원은 노을이 질 때의 아스라한 빛깔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어느덧 노경에 접어든 작가가 오십여 년에 걸친 화업(畵業)을 진행해 오면서 느낀 소회의 일단이다. 선이 분명하고 각진 초기와 중기(1965-1980)의 기하학적 형태에서, 해체의 과도기(1990년대)를 거쳐 기하학적 형태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해체기(2000년대 이후)에 와서 이루어진 자연 관조를 통한 심상적 풍경은 근작에 이르러 더욱 추상화되기에 이른다.

Ⅵ. 

 “집안의 여기저기에 놓인 도자기, 특히 백자의 형, 선, 흰색, 그리고 그 담담한 자세, 또 다락방 문풍지 벽에 붙어있던 민화며 앞마당 우물가 정원에 핀 갖가지 꽃들, 장독가에서 된장, 고추장이 익는 냄새. 잊을 수 없는 엄마의 다듬이 두드리는 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이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 귀의되었다.”

                                               -서승원, 작업노트 중에서-



 서승원의 이같은 유년시절의 추억에 관한 술회는 <동시성> 연작에 관한 관람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그가 자기 작업의 미학적 배경으로 들고 있는 한국 문화의 기저에 대한 사항들은 곧 서승원 작업의 특질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는 초기의 원색적인 기하학적 추상을 거쳐 중기의 파스텔톤의 중성색, 그리고 1990년대의 과도기적 해체기를 겪은 후, 2000년대의 해체기라는 오늘의 지점에 서 있다. 70대 중반의 노경에 이르러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부터 생성되기 시작한 서승원의 심상적 풍경은 연한 파스텔 톤의 중성색을 사용, 화면이 지극히 미묘한 색면들의 겹침으로 발현되고 있다. 캔버스에 여러 번 밑칠을 거듭 한 후, 넓은 평붓을 사용, 서로 다른 색의 물감을 수십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칠해서 나타나는 단색조의 뉘앙스가 바로 서승원이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추상적으로 풀어낸 그림의 내용이다. 

 서승원의 그림은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 고유의 ‘한(恨)’에 대한 미의식의 결정(結晶)이다. 그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회화에 내재된 색은 색상 자체보다 색이 걸러진 상태에 의해 표백되어진 담백한 정신이 담긴 색으로써, 금욕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 고유의 ‘한(恨)’에 대한 미의식이 나의 얼, 내 정신으로 승화된 것이다.” 



 따라서 원색의 측면에서 볼 때 청색, 적색, 황색을 비롯하여 무채색인 백색과 회색 등 극도로 제한된 금욕적인 색의 선택은 근작으로 올수록 점점 더 백색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일러 ‘자연에의 귀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륜이 깊어질수록 회화 자체의 내재적 자율성이나 논리보다 자연의 이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리라. 기하학적 추상의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회화 자체의 내재적 자율성이 지닌 엄격성을 지켜온 서승원이 일련의 과도기를 거쳐 해체의 국면을 맞이한 후, 이제 그 해체마저 극복하고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이 무려 50여년에 이른다. 



 작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절제의 감성, 자기 회복의 감성, 자유의 감성을 통해 심미적이자 관조적 여운이 있는 ‘사색과 명상’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 최근 몇 년간에 걸쳐 서승원이 추구하고 있는 작업의 내용이다. 선, 형, 색채의 탐구로 점철된 과거 수십 년에 걸친 회화적 족적이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한 명상과 수행으로서의 그림에 머물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서승원의 근작이 보여주는 세계인 것이다.





1)1963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결성한 그룹이다. 창립회원은 김수익, 서승원, 신기옥, 이승조, 최명영 등등으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기하학적 추상을 표방하였다.  

2)1960년대 후반 당시 기하학적 추상화를 추구한 하종현의 작품 <도시계획백서>(1967)에서 이같은 도시화, 산업화에 대한 징후를 느낄 수 있다. 

3)2016년 9월 13일, 필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같은 <오리진> 멤버인 최명영의 경우 산업화, 도시화 현상   이 기하학적 추상의 등장에 사회적 요인으로 작용한 바 있다고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1999년, 날짜미상).

4)서승원이 65년대 중반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시성’이라는 명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의 이면에는 행위의 지속성 내지는 항상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명제를 평생에 걸친 화업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러한 관행은 1970년대 단색화 작가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가령, 박서보의 <묘법>, 하종현의 <접합>, 윤형근의 <엄버 블루>, 이동엽의 <사이>, 허황의 <가변의식>, 정상화의 <무제> 등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이러한 명제들의 일관된 사용은 전기 단색화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수행성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즉,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가운데 고유의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데, 이때 물감은 행위의 매개물인 작가의 신체와 함께 정신성을 드러내는 직접적 매개체가 된다. 

5)서승원, <동시성>, 162.2x130.3cm, 캔버스에 유채, 1965-66.

6)가령 서승원의 1977년 개인전 서문을 쓴 이일의 경우 “회화에 있어서의 형태, 색채, 공간의 등가적 동시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복영은 이일의 이같은 논지에 반박, “‘화면은 화면일 뿐이다’라는 자기 횐원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화면은 화면 이상의 것이라’는 ‘전일주의(Holism)’를 주장하며 “서승원의 <동시성>이 지향하는 것은 바탕과 공간의 전일적인 만남이자 그것들의 ‘동시적인 발현의 장(場)’으로 보았다. 김복영, <동시성>, 그 후기시대의 표정 : 서승원의 근작전에 즈음하여, 2000년 갤러리현대 도록 서문 중에서. 

7)서승원, “내 그림을 말한다.”, 작업노트 중에서, 연대미상.

8)학연과 지연, 그리고 계파를 초월하여 모인 <A.G> 그룹은 훗날 미술사가 및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한국 현대미술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미술단체로 평가되었다(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앙케트). 1970년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환원과 확산의 역학전]에는 김구립,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신학철, 심문섭, 이승조, 이승택, 최명영, 하종현 등이 참가, 이 ‘환원과 확산의 역학’이란 주제는 당시 김인환, 오광수 등과 함께 미술평론가로서 <A.G> 그룹의 멤버인 이일이 정한 것이다. 여기서 ‘환원’이란 현대미술이 속한 자기환원적 속성, 예컨대 평면으로의 복귀와 같은 원초적 지향의식을 지칭한 것이며, ‘확산’은 미니멀리즘 이후의 다원주의적 경향을 가리킨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A.G> 그룹의 회원들이 보여준 오브제, 평면, 설치미술 등 다양한 형식과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개념미술, 기하학적 추상, 옵아트 등의 제경향은 이 두 개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연구, 재원, 2000, 99쪽에서 인용.

9)서승원, ‘동시성(Simultaneity)-69-H’, 112x145.5cm, 1969, ‘동시성(Simultaneity)-69-I’, 112x145.5cm, 1969

10)필자는 한국의 단색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2012) 서문에서 이동엽의 <상황>과 허황의 <가변의식>을 한국 최초의 단색화 작품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라는 글을 통해 서승원의 <동시성>이 이들 작품보다 앞서는 것으로 수정하였다. 이 점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서진수 편저, 마로니에북스, 2015년, 79쪽을 참고할 것.

11)야마모토 다카시(山本 孝)는 일제강점기때 원산에 머물며 조선의 백자에 매료되었는데, 이런 추억을 지닌 그는 1970년대에 이우환과 함께 빈번히 한국을 방문, 박서보를 비롯한 단색화 작가들과 교유하였다.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에서 이동엽의 백색작품을 본 그는 “조선 백자 냄새가 난다”며 단색화의 미적 가치에 주목하였다. 1975년에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의 기획은 그의 이같은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12)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기획한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전](2016. 7. 5-10. 29)에서 이 전시는 미술전문가가 평가한 전시 1위에 선정되었다.

13)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 전시 서문, 동경화랑, 1975

14)이일, 백색을 생각한다.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 전시 서문, 동경화랑,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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