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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대중의 사이에서

윤진섭

미술사와 대중의 사이에서


                                 윤진섭(미술평론가)


 2012년, 초빙 큐레이터의 자격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을 기획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소장품의 질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란 적이 있다. 초대 대상인 1세대 단색화 작가 17명의 전체 작품 중 약 90퍼센트에 해당하는 물량을 소장품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작품 동원에 관한 한 그다지 큰 어려움은 느끼지 못 했다. 게다가 선정된 작품들이 크기와 질은 물론 보관상태도 양호해서 덕분에 좋은 전시를 꾸밀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활용한 전시를 자주 선보이고 있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립기관인 만큼, 엄격한 선정절차를 거쳐 구입한 작품들을 활용, 기획전을 꾸미는 일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학예연구팀이 평소에 소장품에 대한 현황 파악은 물론, 개별 작품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통해 미술사적 위상을 파악하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일과 관련된다. 전시기획이란 담당 큐레이터의 눈을 통해 전시가 목표로 하는 특정시기 시각예술의 흐름과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일에 다름 아닐 진대, 해당 작품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소장품과 관련하여 그 전에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소장품의 중장기 계획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플랜을 가지고 작품을 소장할 것이냐 하는 원칙과 관계된다. 이는 특히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무제(Untitled)]처럼, 소장품에 대한 현황 분석을 통해 공통적인 ‘핵심어(keyword)’를 뽑아내고 거기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소장품 중에서 선별하여 전시를 구성할 경우 필수적인 사항이다. 

 이번 전시의 도록에는 소장품 중 ‘무제’라는 제목을 단 작품들에 대한 정보가 수록돼 있는데, 이 통계는 ‘무제’라는 핵심어를 가지고 전시를 기획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준다. 이른바 근대의 산물인 ‘무제(Untitled)’나 ‘작품(Work)’과 같은 제목들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입장에서 볼 때 앵포르멜 이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낳은 50년대 후반의 냉혹한 사회현실에서 서구미술의 산물인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인 당시 20대 중후반의 젊은 화가들은 구체제와 서구에서 발원한 새로운 물결(모더니즘) 사이에서 방황하던 세대였다. 예컨대 거리를 표현할 때 ‘한 마장’이니 ‘한 식경’과 같은 전근대적인 표현술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모던한 언술행위를 해야 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정부가 국제적 표준에 따라 도량형과 미터법을 공포한 것이 10년도 더 지난 60년대 중반이니, 말하자면 앵포르멜은 모던한 의식이 체화되기 이전에 벌어진 일종의 서구추수적 모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화단에서 앵포르멜이 발흥하기 시작한 1957년 화신화랑에서 열린 [제2회 현대전]에 출품된 작품의 제목은 ‘탁상정물(장성순)’, ‘정물 A(문우식)’, ‘언덕에서(정건모)’, ‘벽(박서보)’, ‘마을(김창렬)’ 등이었다. 그런데 1년 뒤에 열린 전시회에서는 ‘작품A(Work A)’와 같은 제목이 등장, ‘종전의 대상지시적인 것에서 비지시적인 것으로의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전자의 제목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대상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추상적인 형태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앞서 든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의 제목은 시대적 산물이다. 이른바 작명은 한 때의 유행일 수도 있지만,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사회문화적 기호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통해 기획자가 이 문제를 좀 더 심도있게 파고들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김환기, 김창렬, 정상화, 김봉태, 박종배, 윤형근, 문신, 이승택, 임충섭, 하종현, 이건용, 이반, 이강소, 김홍주, 최병소, 김용익, 신학철, 장화진, 윤동구, 원경환, 오원배, 이일, 이형우, 장승택, 정경연, 정현, 황인기, 김명숙, 김범, 김정욱 등 화단의 원로, 중진, 중견을 망라하여 구성한 작가 명단은 일견 한국 현대미술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이들 중 대다수는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이 된 작가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무제’라는 제목 하나를 통해 보더라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질적 수준에 있어서 대표성을 띤다고 유추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제’의 현황은 어떤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도록에 명시된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2015년 4월 현재 7천 4백 여 점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무제’라는 제목의 작품은 약 520여 점, 전체의 7%가 넘는다. 여기에 단순한 동어반복적인 제목인 ‘작품’이나 단순한 일련번호 등 ‘무제’에 준하는 제목까지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10%를 훌쩍 넘어선다. 소장품 열 점 중 한 점은 ‘묘사적인’ 제목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어지는 분석은 ‘무제’라는 제목이 특히 80년대에 치중돼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통계에 의하면 1980년대에 1962점에 달하는 소장품 중 ‘무제’라는 제목을 단 작품수가 282점에 이르러 전체 무제 작품의 50%를 상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분석자는 “1950년대 이전이나 200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는 ‘무제’라는 제목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전제한 뒤, ‘무제’라는 제목이 1980년대에 쏠린 이유로 “1970년대부터 추상회화, 더 구체적으로는 ‘단색화’ 경향이 국내 미술계에 주류를 형성했고 그 결과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편입될 개연성이 높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추정한다. 

 나는 1980년대에 소장된 ‘무제’ 작품이 무려 280여 점에 달하는데, 1950년대를 제외한 1960년대에서 2012년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상을 확산시킨 기획의도가 궁금하다. 특히 이 통계자료에 의하면 1950년대, 즉 앵포르멜 시기에 해당하는 ‘무제’의 작품 수가 무려 18점에 달하는데 본 전시에 단 한 점도 선정하지 않은 것은 더욱 의아할 뿐이다.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구상과 추상이 교차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무제’라는 제목을 단 작품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 그 중요성을 기획자는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것이 앵포르멜 시기의 작품이라면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일 것이요, 50년대 앵포르멜의 작품이 희귀한 실정을 감안하면 그 작품들이 추상이거나 구상이거나를 막론하고 이른바 근대와 관련하여 당시 작가들의 의식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시의 전체적인 배열이나 작가의 편성, 관객들에게 제목을 붙이게 한 이벤트, 작가 인터뷰를 담은 동영상 자료 등등으로 미루어 볼 때, 기획자의 의도는 미술사보다는 관객의 입장에 기획의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렇다면 가령, ‘관계의 미학’(니꼴라 부리오)의 입장에서 본, 창작의 주체가 아니라 관람자의 입장을 고려한 친절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다. 현대미술에서 관객은 늘 불청객이었고, 특히 나날이 개념화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추세를 고려하면, 현대미술은 이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대미술의 상황을 둘러싸고 파생되는 기획자의 고민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읽혀진다. 


 “관객이 느끼는 소외감은 ‘무제’가 단지 ‘제목이 없다’는 중성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목을 달지 않겠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임대근, ‘무제를 위한 변명’(도록 서문) 중에서-

 

 이른바 관객이 불청객인 현실에서 관객에게 관람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자발적으로 미술관을 찾게 하는 전략은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한 미술관이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고육지책인 것이다. 특히 매사를 계량화, 수치화하길 좋아 하는 우리네 공적 사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불가피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비판의 화살은 어디를 겨냥해야 할까? 얼마 전 나는 관람객의 숫자를 중시하여 한 공공미술관의 정책을 억압하고 블록버스터 전시를 강제하는 시의희의 처사에 항의하는 글을 한 SNS 매체에 올린 바 있다. 그 효과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술관의 꽃인 전시의 기능을 둘러싸고 정책과 제도 등에 대한 새로운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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