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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저항의 정신

윤진섭

-1960- 70년대를 산 행위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의 기록들

-제2차 1960-70년대 행위예술 구술채록 사업의 의미-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들어가는 말

 1960-70년대 한국 행위예술가 구술채록 사업은 원로작가에 속하는 행위예술 주체들이 고령에 도달해 있다는 점에서 긴급성을 지니고 있다. 8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에 속하는 대다수 작가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한 증언을 채록한 제1차 생존 행위예술가 구술채록 사업은 그런 점에서 볼 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채록을 통해 저간에 잘못 알려지거나 오기(誤記)된 문헌상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사업이 올린 최대의 성과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미술사 기술에서 잘못 기술된 오류들은 수정되지 않은 채 지속될 것이며, 행위 당사자들이 작고한 상태에서 미래의 미술사 서술은 기존의 오류를 반복할 공산이 크다. 

 생존 원로 행위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한 제1차 한국 행위예술가 구술채록 사업에 이어 제2차 행위예술가 구술채록 사업은 이미 작고했거나 행방이 불투명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강국진, 박현기, 정찬승, 김용민, 대전 78세대, 대구 현대미술제의 주축이 된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제2차 사업은 1960-70년대 당시 한국에서 어떤 행위예술이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을 초점으로 삼아, 작고작가의 경우에는 문헌 조사와 주변 친지들의 증언을, 생존작가들의 경우는 직접 인터뷰를 통해 전개되었다. 

 제1차 구술채록 사업의 대상이 된 이승택, 김구림, 정강자, 이강소, 이건용, 성능경, 장석원, 김복영(평론) 등과 함께 60-70년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미술활동을 한 강국진(1939-1992)과 정찬승(1942-1994), 박현기(1942-2000)등은 한국 행위예술의 1세대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작가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1967년에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에서 큰 획을 그은 [청년작가연립전] 멤머에 속하는 이들은 ‘무’ 동인, ‘오리진’ 동인과 함께 이 연립전에 참여한 ‘신전’ 동인의 주요 멤버로서 60년대 초반의 해프닝을 주도한 바 있다.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70년대의 척박한 문화환경에서도 이 땅에 비디오 아트의 씨를 뿌린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그는 또한 비디오 외에도 퍼포먼스를 수행, 행위예술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세 작가에 대한 상세한 문헌조사와 함께 주변에서 이들의 예술활동과 일상적 삶을 지켜봤던 지인들의 증언은 기존의 미술사 서술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사업이 올린 최대의 성과는 그간 행불자로 처리되었던 70년대 이벤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김용민을 찾아내 인터뷰를 수행한 일이다. 연구자들이 서산의 한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는 그를 찾아낸 일화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이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다음 기회로 미루거니와, 아무튼 정신적 좌절을 겪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수용되기에 이르는 그의 삶과, 비교적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가 지난 수십년 간 겪은 정신적 질곡은 인터뷰에서 생생히 묘사되고 있어 귀중한 구술채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김용민을 제외한 강국진, 박현기, 정찬승의 경우, 당사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기 때문에 문헌자료와 주변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연구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면밀한 사료의 수집과 문헌 연구를 통해 가능한 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친지들의 증언과 일일이 비교, 검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에 작성하는 결과보고서는 지난 3개월에 걸친 활동내역서인 동시에 기존의 미술사 기술을 정정(訂定)한 일종의 연구일지이다. 따라서 이번에 행한 구술채록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미처 밝혀내지 못한 미흡한 부분은 차후에 있을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하도록 할 예정이다. 


Ⅱ. 사업의 개요와 목적 및 그룹과 개별 작가들의 활동내역 연구

 제2차 60-70년대 한국 행위예술 구술채록 사업은 2016년 6월 초부터 8월말까지 이루어졌다. 주요사업 내용은 1. 수집된 자료의 분석과 인터뷰를 통한 제1차 행위예술 구술채록사업의 보완 및 심화, 2. 각종 아카이브 자료 수집 및 문헌자료 조사연구, 관련 연구자 및 작가 인터뷰, 3. 행불자(김용민) 의 행방 추적과 그에 따른 구술채록 및 영상기록 시도, 4. 1차 사업 결과에 기반을 둔 아카이브 자료 개발 및 구술채록사업 자료집 출판 등이다. 

 사업의 범위는 60-70년대 한국의 주요 행위예술가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되 작고작가(강국진, 정찬승, 박현기) 3인외 미연구 작가 1인(김용민)의 활동기록 및 당시에 행해졌던 그룹 활동과 전국 단위의 행위예술에 대한 연구 등이다. 

 본 사업의 목적은 “초창기 행위예술가들 중 생존작가를 중심으로 벌인 구술채록사업을 진행한 1차 사업의 확장 및 아카이브 자료 개발”에 두어지며, 그 연장의 일환으로써 작고작가 및 행불작가, 나아가서는 전국 범위로 자료 수집 및 인터뷰의 영역을 확대하여 초창기 한국 행위예술의 광범위한 아카이브를 조성하는 하는 데 있다. 연구자는 책임연구자인 필자를 포함, 김수정, 이지은, 조성준, 양서윤 등 5인이다. 


1. 시대적 배경과 60년대 해프닝의 탄생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한국 현대사에서 급격한 전환을 이룬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4. 19 혁명(1960)’과 ‘5. 16 군사정변(1961)’이 연이어 터져 1950년대 자유당 정권에서 행해진 민초들에 대한 자유의 억압과 정치적 탄압에 저항한 전국적인 봉기가 이루어졌으며, 이승만 정권의 붕괴 이후 이어진 장면 정권의 무능과 윤보선대통령의 통치가 초래한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에 의한 제3공화국은 반공과 경제 부흥을 국시로 하여 과감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새마을운동을 비롯하여 창원, 여수, 울산 등지에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100억불 수출’을 달성, 경제입국의 꿈을 이루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정치적 탄압을 자행,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의 저항을 낳았다. 

 60년대의 해프닝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척박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배태된 예술가들의 저항운동이었다. ‘해프닝(Happening)’이란 용어는 1959년 미국의 작가 앨런 캐프로(Allen Kapraw)가 주창한 것으로,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열 여덞 개의 해프닝(Eighteen Happenings in Six Parts)>이란 제목이 암시하듯이, 칸막이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행위예술가들은 서양의 잡지에서 본 해프닝 기사를 참조, 사진 몇 장만 보고 해프닝을 자의적으로 해석, 독창적인 형식의 해프닝을 창안하는 결과를 빚었다. 예컨대 한국 최초의 해프닝으로 간주되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은 서구의 선례를 참고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어디선가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다.”는 말로 의외성과 독창성을 적시한 바 있다. 

 [청년작가연립전]에 참가한 작가들 중 ‘신전’ 멤버에 해당하는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양덕수, 심선희, 김인환 등과 ‘무동인’의 김영자, 이태현, 최붕현, 문복철, 진익상 등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 참가하였다. 오광수가 각본을 쓴 이 해프닝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동요를 부르며, 비닐우산을 들고 의자에 앉은 김영자의 주변을 돌던 동인들은 마침내 비닐우산을 짓밟아 산산이 파괴하는 동작으로 해프닝을 끝냈다. 이처럼 일정한 형식이 없는 해프닝은 이듬해에 벌어진 <한강변의 타살>(1968)과 함께 한국의 독특한 해프닝을 낳는 전기(轉機)가 되었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참가한 <한강변의 타살>은 당시의 척박한 문화적 환경과 정치적 불안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행위예술사상 커다란 의의가 있는 해프닝으로 평가된다. 이 해프닝은 문화적 테러리즘을 통해 새로운 문화의 건설에 대한 작가들의 여망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문화 사기꾼’, ‘문화 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부정 축제자’와 같은 문구가 적힌 비닐 띠를 어깨에 두른 행위자들은 행위가 끝나자 이들을 불태우고 땅에 묻는 행위를 통해 문화의 개념이 없는 정부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강국진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오프닝에서 전시장에 설치한 커다란 비닐 주머니에 색물을 집어넣고 이를 쏟아내는 행위를 하였다. 김미경은 한 연구논문에서 강국진의 이 행위를 가리켜 한국 최초의 행위예술로 간주되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에 앞선 해프닝이란 견해를 제기하였으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다소 미흡하고 설치의 연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닐봉지에 있는 색물을 쏟아내 작품의 상황 국면을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는 작가의 행위가 개입되었다는 측면에서 김미경의 견해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강국진은 70년대 들어서 회화와 판화로 전환, 해프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과연 어떻게 내려질까? 필자가 쓴 다음의 글은 강국진을 초기 해프닝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초기 활동이 보여준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강국진은 작업의 초기에 전방위적 성격의 작가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해프닝을 비롯하여 입체, 설치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는 5. 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한편으로는 경제 개발에 주력하여 산업입국으로의 발판을 다진 반면, 사회적으로는 억압과 더불어 각종 인권의 탄압이 자행되던, 실로 음양이 교차된 기간이었다. 유신헌법으로 대변되는 군정의 시대에는 문화예술에 대한 초법적 탄압이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었다. 이유를 불문한 연행과 구금, 고문이 많은 예술인들을 괴롭혔다. 그 과정에서 의식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뜻을 굽혔다. 저항의 정신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비판적 정신이 투철하지 못했던 예술가들은 점차 ‘개념의 유희’ 쪽으로 선회했다. 아마 강국진은 후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발언을 그치고 70년대 초반에 해당하는 3년간을 오브제와 판화에 몰두하다 1974년부터는 평면작업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작고할 때까지 18년간의 세월을 판화와 평면작업으로 보냈으니, 입체와 행위예술은 초기의 실험에 그치고 만 아쉬움을 남겼다. 바로 이점이 내가 그를 ‘영원한 실험예술가’ 혹은 ‘영원한 아방가르디스트’로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윤진섭, 강국진의 오브제와 해프닝의 비평적 의의,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 진경, 2012-


 정찬승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상은 ‘영원한 이단아’, ‘한국 최초의 히피’(김령, 화가)라는 말로 대변된다. 그는 “생활 자체가 무질서했으며 평생 돈이라고는 번 적이 없는”(한영섭, 화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동부이촌동에서 ‘피카소’라는 카페를 경영한 적이 있기도 하며, 확인된 사실을 아니나 포장마차를 운영한 적도 있을 만큼(김성구, 판토마임이스트) 생활에 대한 의지도 보여주었다. 

 무동인의 멤버였던 외교관 출신의 화가 임단(본명 임명진)의 주선으로(한영섭 증언) 미국으로 건너간 정찬승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곳에서 정찬승의 생활은 마리후아나의 흡입과 지속적인 음주 등 한국에서의 데카당한 생활 패턴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김령의 증언). 

 미국에서는 주로 거리에서 습득한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사용, 정크 아트에 몰입하였으나 작품의 대부분이 멸실, 그나마 현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기성의 선풍기를 이용한 오브제 작품 한 점이 소장돼 있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정찬승의 행위작품은 <한강변의 타살>, <투명풍선과 누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콘돔과 카바마인>, <<1/24초의 의미>(김구림 연출), <가두 마임극>, <삭발 해프닝> 등이 있다. 

 박현기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였다. 대구를 중심으로 이강소, 최병소, 김영진, 이명미, 황현욱 등과 함께 <대구미술제>의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비디오아티스트로서 비디오 아트의 정착과 확산에 큰 기여를 한 이 분야의 선구자이다. 1942년에 일본 오사카의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 대구에 정착하였다. 홍익대학에서 미술과 건축을 전공한 뒤 대구로 귀향, 인테리어 사업을 하며 비디오 아트에 몰입하였다. “다만 테크놀러지는 나의 손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변모되기 바란다”는 박현기의 말처럼, 40여 년에 걸친 비디오 아트 인생의 화두는 테크놀러지의 예술적 전환이었다. 비디오라는 테크놀러지의 기술적 측면에만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느냐 하는 것이 그의 화두였다. 그는 전통을 다시 공부하는 자세를 통해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올린 미학적 성과는 동양의 정서와 세계관을 현대적인 매체에 담는데 성공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행위예술과 관련시켜 볼 때, 박현기의 작품은 70년대 후반에는 개념적인 경향의 이벤트적 성격을 띠었다. <포플러 이벤트>(제3회 대구현대미술제, 1977)는 포플러 나무들이 열지어 선 강변에서 벌인 이벤트이자 설치작업이다. 나무들의 그림자 반대편에 흰 색의 횟가루로 그림자를 형성, 흑백을 대비시킨 개념적인 작업이다. <도심을 지나며>(1981)는 커다란 바위에 사각형의 거울을 부착, 이를 트럭에 싣고 대구 시내의 거리를 지나며 거울에 비친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거리 영상 퍼포먼스였다. 

 박현기의 비디오를 이용한 퍼포먼스 작업에서는 70년대 특유의 개념적 사유가 느껴진다. 지극히 정적이며 관조적인 이 일련의 행위작업은 비디오 모니터에 담긴 영상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반영한 것으로 동양 특유의 관조적이며 명상적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양손으로 들고 있는 비디오는 기울어졌으나 그 속에 담긴 이미지로서의 물은 여전히 수평을 유지, 카메라에 의해 미리 촬영돼 입력된 이미지와 실제 간의 트릭을 보여 준 작품이다. 

  김용민은 1996년 인사동에 위치한 21세기화랑에서의 초대전을 끝으로 화단에서 종적을 감춘 비운의 화가이다. 아무도 그의 소재를 모를 정도로 그는 점차 화단에서 잊혀져 갔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차에 우여곡절 끝에 연구진이 그를 찾아낸 것은 한편의 드라마에 속한다. 그는 서산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다. 필자는 그를 서산에 있는 서천사랑병원에서 두 차례 만나 인터뷰를 수행하였다. 1970년대에 이건용, 성능경, 장석원 등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이벤트를 선보인 그는 개념미술 경향의 오브제, 설치 작업으로 당시에 상당히 주목을 받은 작가였으나, 상파울루비엔날레 참가라는 경력이 무색하게 그 후의 삶과 예술은 화단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사장(死藏)이 된 불운한 작가이다. 이번에 수행한 그의 인터뷰는 평소 과묵하고 눌변인 김용민의 화법 특성상 제대로 의도가 전달이 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 그러나 세간에 잊혀진 작가를 재발굴했다는 사실에 본 인터뷰의 의의가 있으며, 이는 향후 그의 활동에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측면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 행위예술 구술채록 사업의 또 하나 성과는 ‘대전78세대’의 활동과 대구 현대미술제의 산파역을 한 작가들의 증언을 통해 행위예술이 지역에서 어떻게 발아하고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전78세대’ 창설의 주역인 행위예술가 안치인은 대전78세대의 창설과 전개에 대해 심도있는 증언을 해 주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대구에서 활동한 최병소, 김영진, 이교준, 박두영 등은 1970년대 당시 대구미술제를 중심으로 냉천과 강정 등지에서 이벤트가 어떻게 발생하고 전개되었는지 생생한 육성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이 두 인터뷰는 이제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기술, 평가된 해프닝과 이벤트가 미술사 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것과는 달리, 그간 소외된 지역의 이벤트가 미술사 속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는 측면에서 본 사업이 지닌 또 하나의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Ⅲ. 끝맺는 말

 본 사업을 통해 채집된 아카이브 자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별표 참조) 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연구자들은 한국 행위예술 아카이브의 초석을 놓는다는 심정으로 정성껏 사업에 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정보가 없어서 미처 찾아내지 못한 자료는 추후에 보완할 예정이다. 그리하여 1960-70년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행위예술가들의 투혼의 정신이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도록, 이들의 도전에 찬 예술활동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기초사료를 마련하는 것이 본 연구진의 공통된 여망이다. 

 본 사업이 국비로 진행된 만큼 그 열매는 국민들에게 되돌려져야 할 것이다. 애써 모은 아카이브 자료들과 소중한 인터뷰들이 디지털화하는 동시에 책자로 발간되어 이 시기의 행위예술을 연구하는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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