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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통한 축적의 세계

윤진섭

수행을 통한 축적의 세계

                                   윤진섭(미술평론가)
                                  
 세간에서는 정경연을 가리켜 흔히 ‘장갑의 작가’라고 부른다. 이는 그가 무려 40여 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동안 오로지 장갑만을 모티브로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붙여진 애칭일 게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해 온 작업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의 작업이 단순히 ‘장갑’이라는 특정의 소재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갑을 둘러싼 다양한 기법과 다원적 표현 방법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전모를 알 때, 비로소 우리는 감탄을 하게 되며, 창작의 역사가 40년에 이른 한 작가의 내면의 세계가 이렇게 다채로울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정경연이 그동안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의 방법론으로 장갑이라는 매체를 선택하였고, 그가 축적해 온 그간의 예술창작의 내용은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다양한 세계로 점철돼 있기 때문이다. 즉, 모티브는 단일하되 거기에서 파생된 세계는 매우 폭이 넓고 깊어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기술은 별도의 기회를 필요로 한다. 
 정경연은 섬유예술에서 출발하였으나 긴 창작의 과정을 통해 회화는 물론, 판화, 조각, 오브제, 설치, 비디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촉수를 뻗어 광범위한 조형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갑’이라는 그 특유의 모티브가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장갑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보고 느낀 세계를 묘파(描破)할 수 있는 화두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경연의 작품세계를 관류하는 조형 방법론은 ‘축적’이다. 일종의 아상블라주라고도 할 수 있으나, 아르망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단순히 기성품의 축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작가의 손길이 덧붙여진다는 점에서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다. 물론 정경연의 경우 역시 면장갑이라는 기성의 제품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거기에 채색이 가해진다는 점,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손가락 부분을 길게 늘이거나 다른 변형을 가해 전혀 다른 조형적 질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구의 아상블라주 작품들과 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정경연의 경우에 있어서 그를 가리켜 단순히 장갑이라는 기성 사물의 축적에 의한 아상블라주 작가 정도로 치부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보다 온당한 가치의 부여는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회화적 기법의 세계에 대해 주목할 때 비로소 적확(的確)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의 전공인 염색에서 시작하여 <하모니>, <블랙홀> 연작을 통해 시도한 바 있는 섬유공예와 회화의 접맥은 “작업은 나의 화두이며 도반이다”라는 작가의 진술에서 엿볼 수 있는 삶과 종교 간의 일치를 보여준다. 정경연은 검정과 흰색,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중간색들이 보여주는 색의 스펙트럼을 통해 불교에서 말하는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사상을 도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이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를 미루거니와, 개체(장갑)가 모여 전체(화면)를 이루고 전체가 다시 하나로 수렴되는 과정을 정경연은 원환적 도상 구조를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정경연의 이 고도로 추상화된 알레고리 기법은 따라서 이를 잘못 해석할 경우 그의 작품세계를 단순히 서구의 아상블라주 계열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경우와 비슷한 예를 여러 편의 단색화(Dansaekhwa)에 관한 글을 통해 밝혔거니와, 특히 촉각성이 두드러진 정경연의 경우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경쟁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앞으로의 활동이 주목된다. 
 정경연의 채색 입체, 설치, 평면작품에 있어서 흑백 단색조 계열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채색작업 또한 만다라로 통칭되는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특이한 점은 정경연의 채색작업은 한국의 오방색 보다는 티벳 계통의 만다라에 나타나는 색채에 가깝다는 점이다. 오방색보다는 한결 밝고 화려한 점이 그것이다. 이 차이는 염료의 특성에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느낌상으로 그렇다. 이 또한 그가 추구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경연이 근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오브제와 설치, 평면작품이다. 90년대의 사각 입방체 작품이 다시 등장돼 병풍처럼 설치되며, 여기에 신작인 검정색 설치작품이 덧붙여진다. 전자는 흑백 단색조로 염색된 수많은 장갑들이 결합된 것이고, 후자 역시 검게 염색된 장갑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진 사각 입방체의 구조물들이다. 이 구조물 안에는 비디어 모니터가 내장돼 있어서 관객들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이번 개인전은 새로 제작한 평면 작품들이 주로 출품된다.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신작들은 아크릴 칼라로 장갑을 그린 뒤, 그 위에 염색한 실을 잘라 붙인 것이다. 기존의 염색된 장갑을 직접 붙인 작업과 반대의 컨셉으로 이루어진 것이 이번에 공개되는 신작의 특징이다. 화려한 자태를 보이는 신작들은 채색 위에 금은색의 반짝이 가루를 바니쉬와 섞어서 칠한 것이다.   정경연의 이번 전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여는 것이어서 그간에 축적된 조형적 성과를 가늠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40여 년간 축적된 개성있는 정경연의 조형세계가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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