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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가교, 이우림의 그림이 지시하는 것들

윤진섭

꿈과 현실의 가교, 이우림의 그림이 지시하는 것들

 

윤진섭(미술평론가)

 

꿈과 현실을 잇는 가교로서의 그림. 이우림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행복에 대해 논할 수 있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꿈꿀 수 있는 권리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비단 현실뿐만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세계, 다시 말해서 몽환적이며 환상적인 세계로 우리를 안내함으로써, 현실이 주는 심리적 아픔과 육체적 고통을 잊게 해 주는 특별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그의 그림이 지닌 특수한 장치들-가령 포근한 솜이불과도 같은 연두색 풀밭이라든지, 잔잔한 물결이 헤살 짓는 수면 등은 그의 그림을 바라볼 때 느끼는 평온함과 관계가 있다. 그의 근작들 대부분이 수평구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거니와, 이는 평온한 심리적 상태에 기반을 둔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거칠게 포효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낄 수 없듯이, 끝없이 펼쳐진 양귀비 꽃밭이나 노란 유채꽃밭을 바라보며 행복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것이다.

마치 전원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이우림의 그림들은 일종의 숲의 연가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겉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들이다. 가족 혹은 연인으로 보이는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우림의 대부분 작품들이 비현실적이며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그가 화면에 베풀어놓은 몇몇의 특수한 장치들 때문이다. 그것은 가령 흰색 혹은 노란색의 비현실적인 얼굴 색깔이나 하늘을 날거나 심지어는 물 위에 누워있는 동작들에 해당한다. 당연한 이야기이듯 우리가 이런 장면을 현실에서 목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경 연극의 분장이거나 마술에서의 눈속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우림의 그림들이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임에 분명해 보인다. 등장인물과의 관계를 살펴보거나 인물의 포즈와 동작 등 비현설성을 유발하는 장치들을 제거하고 풍경 자체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현실적 풍경이 아니라고 단언할 그 어떤 합당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우림 작품의 특징이다. 고즈녁한 관조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평온한 숲을 비롯하여 화려하게 핀 양귀비꽃이 지천으로 깔린 들판, 온통 노란색 일색으로 칠해진 유채밭 등은 비록 사실적인 필치로 그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감을 느끼게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거기에 인물이 덧붙여짐으로써 어긋나게 된다. 가혹한 현실로부터 우리를 끌어올려 이상향의 세계로 밀어넣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급기야 비현실적인 특유의 장치를 고안해 내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가령 샤갈의 악사라든지 폴 시냑의 정지적인 풍경화 기법의 차용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이지만, 물 위에 턱을 괴고 누워있는 여인의 뒷모습에 이르면 매우 독자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우림은 이런 일련의 회화적 장치를 통하여 일견 현실과의 거리두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을 바라볼 때 대부분의 관객들이 낯설게 느끼는 원인은 등장인물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에 있다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회화적 장치들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단 현실로부터의 거리감을 획득한 그는 화면에 베푼 또 다른 장치를 통해 관객을 초현실적 지평으로 이끌어 낸다. 그것은 가령 다정히 손을 잡고 허공을 나는 한 쌍의 남녀라든지 꽃다발을 든 여성에게 날아와 키스를 나누는 남자의 휘어진 몸을 통해 드러난다.

고단하고 팍팍한 현실의 세계에서 몽상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기제가 필요할 것이다. 이우림의 그림에서 그것은 매우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가령 백마라든지 등장인물의 곁에서 초원이나 양귀비 꽃밭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들, 혹은 얼룩무늬의 달마시안 개로 구체화된다. 날렵하게 생긴 백마의 등위에 길게 누워있는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은 관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양귀비 꽃밭의 지평선 저 건너편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지향하는 바는 관객이 서 있는 이 쪽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저 건너편, 즉 이상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대부분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일까?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화려한 꽃무늬 옷을 걸친 여인들은 현실의 세계를 바라보기를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필시 인간이 지닌 소망 충족의 한 본능의 투사가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이우림의 작품세계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축은 이른바 관능성이다. 삶의 열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 미적 감정은 때로 그의 그림을 에로틱한 것으로 이끄는 요인이다. 가령 연두색 옷을 입을 한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라. 초점을 잃은 남자의 눈과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의 눈 사이에는 의당 있을 법한 시선의 교류가 없다. 역시 초점을 잃은 듯한 여자의 시선은 남자의 뒤편에 서 있는 세 명의 근육질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달마시안 개의 시선이 거꾸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조각품을 연상시키는 세 명의 남자들의 손과 얼굴은 발 아래를 향하고 있다. 창벽한 얼굴에 초점을 잃은 눈, 붉은 입술은 이우림의 인물상의 전형을 이루는 회화적 장치이지만, 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소통보다는 단절을 의미하는 상징들인 것이다.

단절이 있기에 소통을 희구한다는 것은 역설이라기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군중 속의 고독처럼 현대인의 파편화된 심리적 고립의 상태를 화려한 색채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려내는 이우림의 그림은 우리에게 꿈꿀 수 있는 권리에 대한 회복을 귀뜸해 주는 것 같다. 꿈과 현실을 잇는 가교로서의 그림, 이우림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행복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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