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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소통의 장(場)으로서의 퍼포먼스

윤진섭

민주적 소통의 장(場)으로서의 퍼포먼스  


                                          윤진섭(미술평론가)


 작가가 마음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체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특히 작가가 멀티 플레이어가 돼 가고 있는 현대의 예술적 상황에서 특정의 매체만 고집한다면 결코 유능한 작가라고 할 수 없다. 특히 관객의 참여를 비롯하여 작가와 작품, 관객 간의 ‘상호작용적 (interactive)’ 특징이 두드러진 현대의 예술적 상황은 작가들로 하여금 보다 다각적이며 민주적인 매체를 사용할 수 있는 창의성을 강요하고 있다. 

 비너스 (Venus Lukic)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의 젊은 작가이다. 대전에 거주하면서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수유(授乳)와 관련된 일화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크기의 얇은 만화책을 발행하거나,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모습이 희화적으로 그려진 작은 스티커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는 것도 작업의 일환이다. 이번에 스페이스 씨 레지던시(Space SSEE Residency) 입주작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녀가 구상한 작업은 ‘모유 회화 프로젝트 (Breast Milk Painting Project)’이다. 이 작업은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한국에서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사는 주부/작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회의 단면을 담고 있다. 어느 사회건 여성들이 아이에게 수유(授乳)시 겪는 심리적 불편함을 젠더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응, 왜냐하면 난 할 수 있으니까 (Yes, Because I can)” 라는 제목의, 비너스 자신이 직접 그린 만화책을 통해 그녀는 퍼포먼스 기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어떻게 소화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지문을 통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만화는 두 사람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작가 자신이며 다른 사람은 그녀의 친구 혹은 관객이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  

 만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게 진짜 모유냐? 너는 왜 그걸 사용하려 하는데?”

“응, 왜냐하면 난 할 수 있거든.” 이 지문은 <모유 회화 프로젝트>의 사건 전개를 암시한다. 즉, 그녀는 다른 회화의 재료가 아닌, 바로 모유로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젖을 주고도) 모유가 남으니까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퍼포먼스 기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그로 인해 신체(body)가 개입된 퍼포먼스의 주제와 관련하여 모유를 생각한 것은 비너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작업 속에 자연스럽게 가정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수유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문제(issue)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풀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남성 중심의 사회제도는 숭고한 여성의 수유 행위마저 특정한 공간에서 치르도록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관공서를 비롯한 지하철 역, 마켓, 등등의 공적 공간이나 직장에 마련된 수유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곳은 밀폐된 곳으로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돼 있다. 오직 아이에게 젖을 물릴 여성만을 위해 마련된 공간인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여성에 대한 배려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자연을 거역하는 제도인 것이다. 근대적 사회의 소산인 수유실은 남성의 시선을 차단함으로써 자연의 성스러운 모성성을 억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너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돼 가는 모유를 의식하며 작업을 한다. 변해서 쉬어버린 우유는 버릴 수밖에 없다. 그녀는 공공장소에서 유축기를 사용, 모유를 짠 장소를 기록한 수십 개의 우유병을 벽에 부착하거나 모은 젖이 담긴 용기를 전시장에 설치한다. 전동 유축기와 수동 유축기로 젖을 짤 때 나는 소리가 지원자들의 나레이션과 함께 오디오 기기를 통해 들리기도 한다. 

 만화, 스티커, 글, 회화, 설치, 웹사이트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비너스는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주입하는 고전적인 예술의 관점에서 떠나 민주적인 소통을 기하고자 한다. 비너스는 구상적 추상화를 그리는 한편, 다양한 컨셉의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적 예술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대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상호작용적인 개념의 작업들이다. 비너스는 이제 관객의 참여가 없이는 작업의 완성이 어려운 말 그대로 사회적 퍼포먼스의 장에 성큼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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