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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질’을 향하여

윤진섭

제3의 ‘질’을 향하여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바야흐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가 세계 미술계에 입성을 했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Frieze’지는 필자를 포함, 미시건 대학의 조앤기 교수, 작년에 단색화전을 기획한 바 있는 뉴욕 소재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의 공동 큐레이터인 샘과 틸(Sam & Till)의 논고가 실린 라운드 테이블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발행되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미술잡지 ‘전장(典藏:ARTCO)’은 단색화에 대한 필자의 글을 싣고 곁들여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했다. 이 일련의 보도는 작년 미국에서 발행되는 ‘ArtAsiaPacific’지의 단색화 특집에 이은 것이어서 단색화에 대한 해외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외 미술언론의 이처럼 높은 관심과 열띤 취재 경쟁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색화에 관한 국내 미술계의 태도이다. 단언하자면 현재 몇몇 화랑들이 주도하고 있는 단색화 붐은 그 초점이 주로 판매에만 국한되고 있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는 일본의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파인 ‘구타이 그룹’과 ‘모노파’가 세계미술사에 등재된 사실에 비쳐볼 때, 한국의 단색화는 그 전파가 용의주도하게 이루지지 않는다면 등재 자체가 자칫 좌초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단색화에 대한 이론적 조명과 판매가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단색화의 조명이 김기린, 권영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창섭, 하종현 등 주로 전기 단색화 작가들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국내의 메이저 화랑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이러한 최근의 편향적 움직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색화의 행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즉, 현재 한국의 미술계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활동에 대한 무관심은 모처럼 찾아온 단색화 열풍이 말 그대로 한때의 열풍으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계승과 심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화랑계의 관심과 더불어 단색화에 대한 비평계와 미술사학계의 학문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아닌가 한다. 

 

Ⅱ.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남춘모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 중에서 대표적인 작가이다. 필자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글을 쓴 바 있기 때문에 이번 논고에서는 그의 줄 이랑 작품의 의미를  소개하고 글의 후반부에서 작업의 방향을 대폭 전환한 근작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남춘모는 70년대 단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나가는 작가이다. 특히 그의 작업은 입체회화 내지는 부조회화라는 측면에서 방법적으로 여타의 작가들과 차별화된다. ‘ㄷ’자 형태의 나무틀에 천을 감싸 마치 주조하듯이 제작되는 남춘모의 작품은 가히 ‘부조 회화’라고 부를만 하다. 그것은 일정한 패턴과 골격을 지닌다. 캔버스의 프레임에 평행을 이루는 작품의 세로형 이랑들은 캔버스의 표면으로부터 도드라짐으로써 그림자를 생성한다. 2차원 평면을 부정하고 삼차원 공간으로 촉수를 뻗는 이러한 형태의 작업의 선례는 프랭크 스텔라의 릴리프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남춘모의 경우는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몸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집중적인 미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변형 캔버스 작품이 캔버스의 프레임을 따라 일정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나간 반면(‘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Frank Stella)), 남춘모는 그러한 회화적 관례와는 별개의 선상에서 유미적(aesthetic)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인과 동양인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 관습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국립현대미술관)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한 ‘Art in America’의 편집장인 리차드 바인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당시 발제에 나선 리차드 바인은 ‘한국의 단색화 작품들이 왜 이렇게 한결같이 아름다운가’고 질문을 던진 뒤, 이는 실험을 중시하는 서구의 아방가르드 전통에 비춰볼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견자들 간의 상이한 견해의 차이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화해를 이룰 것인가? 

 필자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단색화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바로 이러한 화해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도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선(禪 )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의 저자인 로버트 M. 피어시그의 관점을 주목해 보고 싶다. 동양의 ‘미학적 요소(낭만적 유형)’와 서양의 ‘이론적 요소(고전적 유형)’, 소위 ‘합리적 이성’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극복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제3의 ‘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중요한 논의의 근거로 과거에 한국에서 본 성벽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본 성벽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것이 기술공학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벽을 쌓은 사람들의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즉, 한국인들의 ‘자기 초월의 마음의 상태’와 그것을 유도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그 원인으로 ‘자신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남춘모의 부조회화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 사이의 차이점도 바로 이러한 동서양 간의 사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곧 삶의 태도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작화(作畵)를 둘러싼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남춘모의 캔버스 속 이랑들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논리적이거나 치밀하게 분석적이지 않다. 남춘모 작품의 날 선 이랑들은 마치 한국의 성벽을 구성하는 돌들이 푸근한 느낌을 주듯이, 천의 보푸라기들이 느껴질 만치 불규칙적이며 푸근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 작품에서 느껴지는 보편적 특징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한국의 단색화에 내재된 어떤 특수한 ‘미적 질’이다. 

 

Ⅲ. 남춘모의 부조회화에는 한국인의 핏줄 속에 면면히 흐르는 문화적 유전인자가 깃들어 있다. 비록 형식은 현대적인 방법론을 취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동양 특유의 정서가 스며 있다. 가령 연한 베이지 색을 띠고 있는 그의 대형 부조회화는 한국의 전통가옥을 구성하는 방문의 창호지를 투과하는 은은한 빛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중성지대이다. 빛이 아주 강하지도 않고 완전히 빛을 차단한 것도 아닌, 은은하게 투과돼 한풀 꺾인 빛의 느낌이다. 거기에는 한국의 보편적 정서인 중용(中庸)의 미학이 담겨있다. 이 중용의 처세술은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의 국가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특히 자연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산하(山河)는 험준하지 않으며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 산은 마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중첩된 능선들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서 강이 천천히 흐르는 게 한국 산하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산하의 모습을 보고 자란 남춘모가 이러한 자연 풍경에서 영감을 받고 그 느낌을 작품에 투사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검정색과 베이지색, 흰색 등 극도로 제한된 색채를 사용한 남춘모의 근작들은 기존의 작품보다 스케일이 큰 것이 특징이다. 물론 적, 청, 황, 녹 등등 원색의 화려한 색감을 드러낸 작품들도 있으나 전체적인 느낌은 제한된 중성색이 강하다. 

 굴곡진 이랑의 폭도 대폭 넓어졌는데, 이는 장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또한 기존의 작품들이 세로로 시원하게 죽죽 뻗은 형태감을 보여주었던 반면, 근작들은 ‘ㄷ’자 형태와 함께 ‘ㅅ'자 형태를 병행하고 있다. 즉, 연속적인 ‘ㄷ’자와 ‘ㅅ’자 형태의 반복을 통해 리드미컬한 조형적 형태를 창출하고 있다. ‘ㄷ’자 형태는 주로 베이지색 작품에, ‘ㅅ’자는 검정색 작품에 적용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벽에 기대놓은 베이지색의 대작이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이 작품들은 천장에서부터 바닥에 이르는 대작들이다.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일종의 오브제 회화라 부를만한 것이다. 형태에 있어서는 벽에 걸었을 때 바깥을 향해 ‘˂’ 모습으로 꺾인 것이 있는가 하면, 갈매기(˄) 모양의 형태를 띤 것도 있어 형태의 다변화를 꾀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남춘모는 근작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죽죽 뻗은 기존의 골 이랑의 흐름을 다른 각도에서 흐르는 골 이랑으로 막아 지그재그 형태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서로 엇갈려 경사를 이루는 골 이랑의 다변화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남춘모 작품의 화면을 변화무쌍하게 이끄는 요인이다.  


Ⅲ. 남춘모의 이 작업이 끝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서양의 미니멀 작가들, 가령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는 끝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작도된 선을 따라 물감이 묻은 붓으로 칠할 때 칠을 다하면 끝이 난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남춘모의 작업의 끝은 물질과 마음이 맞닿게 될 시간의 어느 지점이다. 작가는 그 시간의 끝을 미리 예측할 수 없고 일과 정신이 만족할만한 합일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또한 이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의 보편적 특징이기도 하다.

 얼핏보면 남춘모의 작업은 한국 고유의 ‘대충주의’ 내지는 ‘적당주의’의 산물처럼 보인다. 한국인 특유의 독자적인 심성을 배태한 이 특유의 행동에는 그러나 그 속에 자연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남춘모는 왜 작품의 끝을 매끄러운 기계적 선으로 마감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이것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가 일어났다고 본다. 합리적 이성과 동양적 직관 사이의 갈등을 넘어 양자를 통합하려는 미학적 의지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댔다고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피어스그가 언급한 것처럼 ‘자기초월의 마음의 상태’가 질료에 육화돼 나타난 모습 그대로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춘모의 작업에서 미래 한국 미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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