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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이 나아갈 길

윤진섭

한국미술이 나아갈 


윤진섭 | 미술평론가


세계 미술의 현장에서 한국미술을 어떻게 자리 잡게 하고 해외의 미술애호가와 전문가들에게 이를 각인시킬까 하는 문제는 이제 구체적으로 검토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국력의 신장이다. ‘ASEM’과 ‘G20’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갖는 인지도와 발언권이 커지면서 비단 경제나 정치뿐만이 아니라 문화나 예술부문에 있어서도 역시 상대적으로 힘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령 최근 몇 년간 국제미술계에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가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상상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 뉴욕 타임스나 파이낸셜 타임스 등 서구의 주요 신문은 물론이고, 프리즈(Friez)나 아트 아시아 퍼시픽(ArtasiaPacific), 아트링크(Art Link), 타이페이의 전장(典藏, ARTCO) 등등, 세계적인 성가를 지닌 미술전문지들이 단색화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세계미술계에 한국의 주요 미술사조로 각인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단색화의 성공이 곧 한국미술 전체의 성공이라고는 단언하기 어렵다. 세계화와 관련하여 볼 때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는 단일 품목에서 오는 다양성의 결여일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국 현대미술의 본격적인 출범을 1950년대 말, 앵포르멜 미학을 추구한 현대미술가협회, 60년미술가협회, 벽동인 등등의 결성이 이루어진 시기로 잡을 때, 그 이후에 전개된 다양한 미술사조들에 대해 주체적 시각에서 조명한 경우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론적으로 조명하고 자리매김하는 주체들인 미학, 미술사, 예술학 관련자들의 편협한 시각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미술의 원류를 찾아 독자적인 미학이나 미술사를 정립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 가운데에는 서구 미학이론이나 미술사 방법론을 통해 견강부회식의 적용을 하고 있는 것도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일부 서구추종적인 의식을 지닌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들 중 거의 대다수는 해외유학파들이다)이 한국 현대미술을 서구의 문화적 틀이나 척도로 해석할 때 나타나는 폐해는 매우 크다. 가령, 미술사 서술에서 몇 개의 도상을 예시한 뒤 ‘김 아무개의 작품은 미국의 누구를 닮았고’ 하는 식의 무분별한 양식사적 비교 분석은 창작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범하는 사례이다. 



물론 여기서 나의 의도는 유학파 미술사학자들이나 미학자들의 학문적 공헌을 폠훼(貶毁)하려는 데 있지 않다. 나는 그들이 조국에 돌아와 선진 학문에서 배운 이론을 통해 한국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수준 높은 통찰과 혜안에 깊이 탄복하고 배울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이상적인 모델을 서구에 두고 한국의 미술은 마치 그것의 부본인 것처럼 자신의 우월적 선민의식을 투사하는 듯해 속상할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최악이다. 



지주를 대신한 마름은 때로 자기가 지주인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물론 이 경우 마름의 내면 밑바닥에는 소작농에 대한 은근한 멸시가 깔려있게 마련이다. 나는 너와 같은 무지렁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선민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민의식은 정작 지주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고양이 앞의 쥐가 되는 것이다. 정작 지주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하면서 애꿎은 소작농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정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작고한 수필가 김소운(1907-1981)은 한 글에서 “나의 어머니가 레프라(한센병 환자)라고 해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다”라고 썼다. 이 말을 한국 미술의 현장에 적용시켜 보자. 과연 한국미술은 구질구질하여 볼품이 없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추종의 일색이어서 그 속에서 보석을 찾는 일이 무의미한 일이란 말인가? 한국미술은 과연 레프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오래 전에 나는 한 세미나에서 “한 미국인 육종학자가 미국에서 참외를 먹고 출장 차 한국을 방문하여, 급한 나머지 농장의 콩밭에 볼일을 봤다. 몇 달 후에 개똥참외가 열렸으니 과연 이것이 미국참외인가, 한국 참외인가?”라는 요지의 농담성 짙은 발언을 했다. 그 순간 좌중은 박장대소를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비유는 기막힌 우리의 현실을 빗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선승(禪僧)의 선문답이 결코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이 60여 년 동안이나 고민해 온 역사적 현실이 그 안에 송두리째 응축돼 있다. 이른 바 씨(種)가 중요하냐, 열매(果)가 중요하냐는 논쟁인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195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화단을 점유했던 앵포르멜(Informel) 운동을 해석할 때, 이를 서구추종적 의식의 결과라고 진단하면 ‘씨’의 입장을 강조한 것이며, 씨는 받았으되 그것을 자라게 한 토양에 주목하면 ‘열매’에 초점을 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입장을 종합한 절충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퍼포먼스는 어떨까? 60년대의 해프닝은? 70년대의 이벤트는? 이태 전에 한국의 원로 행위예술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재미난 사실을 알았다. 이들 대다수가 영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서구의 해프닝과 관련된 사진 몇 장만 보고 해프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구의 해프닝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해프닝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퍼포먼스와 관련된 한 강연에서 이를 두고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았다”는 속된 표현으로 농을 쳐 한국 해프닝의 독창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이 한국의 김구림과 이승택을 초대한 적이 있는데, 독창성의 측면에서 볼 때 이와 무관치 않다. 이제 한국의 화단에 주목할 때이다. 미시적인 렌즈와 거시적인 렌즈 두 개를 다 갖춰놓고 개별적인 작가와 사조, 기왕에 있었던 미술운동들을 세계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히 전개돼야 할 때이다. 그래야 갑론을박 담론이 무성해진다. 그리고 그 길이 세계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인 것이다.

<미술과 비평, 2016 여름호>





사진설명 : 1.한국 최초의 해프닝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청년작가연립전, 국립중앙공보관, 1967년. 무동인 중심의 해프닝2. <한강변의 타살>,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한강백사장, 1968년3. 제4집단, <기성문화의 장례식>, 김구림, 정강자, 정찬승, 고호 등, 1970년, 사직공원-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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