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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세계화를 위한 문화적 전략과 그 가능성에 대한 전술적 방안

윤진섭



Ⅰ.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팝아트를 둘러싼 용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팝아트라는 용어는 서구에서 발원한 것이다. 그 기원을 올라가면, 영국의 미술평론가인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와 만나게 된다. 그는 1954년에 대중문화적 성격이 뚜렷한 미술작품에 대해 ‘팝아트(Pop Art)’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962년에 순수미술의 맥락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작가들로 점차 그 적용 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 첫 작품으로 간주된 것이 바로 영국작가 리처드 해밀튼(Richard Hamilton)의 <대체 오늘의 가정을 그처럼 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다.  

 그러나 팝아트가 영국에서 발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이 뿌리를 내려 한 시대를 풍미한 미술사조로 번성한 곳은 미국이었다. 오늘날 팝아트의 거장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앤디 워홀을 비롯하여 로이 리히텐쉬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제임스 로젠키스트,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인디애나, 톰 베셀만 같은 팝아트의 거장들은 모두 미국의 작가들이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역사적 연계성을 고려한다면 팝아트가 유럽에서 발원하여 미국에서 번성한 사실은 서로 밀접한 친연성을 지닌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이 두 나라의 팝아트는 다다이스트들인 한나 헤흐나 라울 하우스만이 사용한 포토 몽타주 작품을 비롯하여,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변형시킨 뒤샹의 엽서작품<L.H.O.O.Q>, <메르츠 바우>을 제작한 쿠르트 쉬비터스의 콜라주 작업 등등 풍부한 역사적 선례를 지니고 있다.    



 미술사적 내지는 비평적 접근을 통해 이처럼 어떤 한 미술사조의 역사적 선례를 밝혀 옛 것과 오늘의 것 사이에 개재된 상호 연계성을 수립하는 일은 이 글의 주제와 관련시켜 볼 때,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팝아트에 대한 이해에는 서구미술의 추종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에 늘 따라붙는, 일종의 편견에 의해 오도된 부정적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서히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편견이 야기한 부정적 측면은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들은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업이 의미 있는 것이며, 자신의 행위가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에 이바지하는 일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더욱 창의적인 자세로 작업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한국 미술의 세계화라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시켜 볼 때, 사실 지금까지 이의 성공사례로 논의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최근 들어서 국내외적으로 부쩍 성가를 높이고 있는 단색화(Dansaekhwa)의 예를 들 수 있겠으나, 아직 완전한 성공을 논의하기에는 이르다. 따라서 이 글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한국팝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다음, 그것의 세계화에 따른 문화적 전략에 관한 나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Ⅱ. 

 한국의 팝아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기점에 대한 논의는 학자들 간에 아직 합의된 바가 없다. 팝아트라는 용어가 문헌상에 등장하는 선례로는 가령 미술평론가 이 일과 오광수의 경우를 들 수 있겠으나,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신전’의 멤버들이 발표한 작품들을 가리켜 엄밀한 의미에서 ‘팝아트’로 보기에는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팝아트의 탄생 배경이 되는 당시의 한국 사회가 소비중심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전후 앵포르멜을 가리켜 미군의 군화에 묻혀 들어온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던 것처럼, 6. 25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개된 한국팝의 징후란 무늬만의 팝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볼 때, ‘바캉스’라는 단어가 하나의 유행어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이른바 레저를 즐기는 계층이 등장한 것도 사실이나, 그러한 현상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경제적 상황은 오히려 칠성사이다를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이나 가야 맛볼 수 있을 만큼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팝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문화적 사치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야 어떻든 간에 [청년작가연립전]에 팝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등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핑크색으로 칠한 거대한 입술에 선글라스를 쓴 여인의 머리를 부착한 정강자의 <키스 미>를 비롯하여, UN표 팔각 성냥통을 크게 확대한 뒤 “담배 피우실 분은 이 성냥을 이용하십시오”라는 문구를 적어놓은 김영자의 <성냥111>, 인물이 그려진 판들을 여러 개 덧대거나 이어붙인 심선희의 <미니>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의 작품이 비록 본격적인 팝아트에 속하는 것은 아닐 지라도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담아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팝의 역사적 서술에서 맨 앞에 놓여야 할 것이다. 

 한국팝의 본격적인 전개는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앤디 워홀의 작품처럼 코카콜라 병을 여러 개 병치하여 극사실 기법으로 묘사한 고영훈의 <코카콜라>(161x130cm, 캔버스에 유채, 1974)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고영훈의 이 작품을 통해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다. 다음 글은 이 무렵의 정황을 잘 대변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한국의 팝아트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당시의 연쇄점이나 슈퍼, 혹은 백화점에 진열됐던 코카콜라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당대 현실을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비록 당시 한국의 소비형태가 미국처럼 ‘소비가 미덕’인 대중소비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60년대에 비해 눈에 띠게 진일보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1970년에 개통을 본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호남, 남해고속도로의 개통(1973년)이 있었으며, T.V, 냉장고, 승용차 등 15개 공산품의 값이 무려 12-54.4%가 인상돼 그만큼 사치품에 대한 소비가 증대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긴급조치 3호(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가 발효될 만큼 사회는 여전히 정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다.” 


  음료의 경우, 1960년대에 사이다가 소풍이나 가야 먹을 수 있는 귀한 식품이었던 반면, 불과 10년 뒤인 고영훈이 코카콜라 병을 그렸던 70년대 중반에는 대중적인 상품이 되었다. 연쇄점이나 슈퍼가 등장하여 재래식 구멍가게들이 위협을 느끼던 이 무렵에 등장한 대중적 기호품으로는 빙과류와 스낵류를 들 수 있다. ‘누가바’나 ‘부라보콘’을 필두로 ‘새우깡’이 출시되면서 서서히 대중 소비시대의 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Ⅲ.

 1970년대의 상황과 오늘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듯이, 우리가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한국의 경제적 부흥은 ‘새마을 운동’과 함께 비롯되었다. 이른바 70년대의 조국 근대화 운동과 관련시켜 볼 때, 인권의 탄압, 언론통제, 공작정치와 같은 군부통치하에 벌어진 정치권의 악습이 많은 사회적 폐단을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팝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근대화 정책에서 비롯된 경제적 풍요가 이 땅에 팝을 뿌리내리게 하고 번성을 가져다줬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현대사의 전개에서 비롯한 이 같은 사실은 분명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 손에는 전갈의 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달콤한 꿀을 쥐었던 한국 사회의 두 얼굴은 팝의 입장에서 봐도 그 양상이 극명하게 갈린다. 이른바 ‘순응적 팝’과 ‘저항적 팝’의 구분은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적 특수성을 지닌다. 이른바 분단현실이 낳은 한국팝의 이러한 미적 정체성은 이 글의 주제와 관련시켜 볼 때 하나의 특수한 국면을 낳는다. 다음의 인용은 80년대 당시 민중미술의 등장과 관련하여 ‘저항적 팝’의 내용을 보여준다.




 “한국의 팝아트와 관련해서 볼 때, 민중미술의 단초가 된 초창기 <현실과 발언> 그룹의 멤버 중 민정기, 주재환, 오윤의 일부 작품들이 주목된다. 미술은 가능한 한 대중이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전제하에 ‘최대한의 소통’을 주장한 이 그룹은 대체로 구상적 화풍을 견지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민정기는 소위 ‘이발소 그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화풍으로 현실을 풍자하였다. 특유의 키치(kitsch) 풍으로 그린 그의 작품들은 의도적인 조야함을 통해 한편으로는 모더니즘 미술의 고급 취향을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 접근을 꾀하는 이중적 전략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중 <풍요의 거리>(91x73cm, 1981)에는 팝의 고전이 된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대체 오늘의 가정을 그처럼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에 나오는 근육질의 남자를 패러디한 모습이 보여 이채롭다. 주재환의 <몬드리앙 호텔>(100x130cm, 1980)은 몬드리안의 격자형 도상을 차용하여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는 몬드리앙의 작품에 대한 패러디를 통해 당대의 사회현실을 풍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몬드리앙의 그림에 나오는 격자들 속에 호텔에서 벌어질 법한 일상적 풍경을 단순한 필치로 묘사한 이 작품의 제작 의도가 과연 대중에게 얼마나 전달됐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림을 통한 모던한 언술행위의 대명사가 돼 버린 패러디, 콜라주, 인용과 같은 기법들이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이라는 양분된 진영의 구분을 떠나 한국의 팝아트에 공통적으로 등장한 것 또한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기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박불똥이다. 그는 “잡지나 화보에서 오려낸 코카콜라 병, 성조기, 햄버거 등등 대표적인 팝적 이미지의 콜라주를 통해 80년대 당시의 한국 사회가 처한 정치 현실을 풍자”해서 문제작가로 떠올랐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정치적 격변기의 한국에서 팝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의 양상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때 매우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조국 분단의 상황이 낳은 정치적 긴장은 기지촌 문화를 태동시켰는데 이러한 특징은 기지촌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김용태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팝아트에 대한 서술에서 ‘Pop Art'의 저자 루시 리파드(Lucy R. Lippard)는 미국팝의 원조로 성조기를 그린 무명씨의 <깃발문>(1870, 조각되어 채색한 나무, 142x102cm)을 예로 들었는데, 조선시대와 구한말의 민화나 현재 명맥이 거의 끊어져 가고 있는 혁필화 같은 것은 한국팝의 원조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에는 이러한 민화에 근거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다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팝적인 소재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 중에서 이 범주(전통/현대화-민화의 재해석과 전통 산수의 현대화: 필자 주)에 속하는 작가들이 수적으로는 가장 많다. 이 작가들의 전공이 대부분 한국화라는 점에서 봤을 때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작가들은 전통의 극복과 함께 한국화를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한국 팝의 지평에서 볼 때 민화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특히 민족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볼 때 누군가는 계승하여 새로운 창조로 이어가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과도 연관돼 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현재 20대에서 50대까지 고르게 분포돼 있는 작가들의 층은 전통의 계승과 창조라는 과제에 대한 작가들의 열정이 뜨겁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팝은 어떻게 보면 이미지 자체를 대중이 중심이 되는 사회적 맥락 속에 전치시키는 일과 관련된다. 이 일은 전통을 현실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여 사유화(신선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서구 팝의 아이콘을 비트는 일(이길우)이기도 하며, 전통의 형식을 현실에 맞게 사적인 문맥에서 상징화하는 일(홍지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와 구한말 민초들이 즐겼던 ‘생활의 미술(민화)’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재창조하는 문제는 자연이 현대의 생활 감정을 전통과 연계된 형식 속에서 녹여내고 담아내는 작업과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민화의 전통적 형식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김지혜, 김근중)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며, 전통 산수화를 설치작업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어 제시하는 작업(임택)도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또한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되 전통의 문제에서 떠나 현대의 소외와 단절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하용주의 작업도 눈길을 끈다. 


   

 민화의 재해석과 함께 전통 산수화를 어떻게 현대화하느냐 하는 문제를 화두로 삼아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그 중에는 이이남처럼 아예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전통 산수를 번안, 현대적인 버전으로 보여주는 작가도 있다. 이는 전통은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해석될 때 생명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작업이다. 한편, 개자원화전과 같은 동양화의 고전을 오늘의 맥락에서 새롭게 번역하는 일(임동승)도 시선을 끌고 있으며, 민화를 현대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계승하는 일(김용철)도 누군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이른바 신세대 팝과 관련된 것이다. 한국에서의 신세대 팝은 8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포스트 모던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른바 압구정 문화로 통칭되는 소비문화의 등장이 신세대 팝이 출현하게 되는 문화적 토양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른바 대중소비사회로의 진입은 그 이전의 한국 사회를 점유해 온 흑백 이분법에 의한 경직된 논리를 해체하면서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게 된다. 신세대 문화는 이러한 문화적 토양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새로운 문화였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자 드디어 한국 사회는 대중 소비사회로 진입을 하게 된다. 백화점에는 질 좋은 상품이 넘쳐났고, 쇼 윈도우를 장식하는 디스플레이 기술도 선진국 수준을 능가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브생로랑, 루이뷔통, 베르사체, 샤넬과 같은 외제 상표는 이제 부의 상징이자 사회적 신분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신세대에 의한 팝의 등장은 드디어 한국 사회가 고도의 대중소비사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적 사건이었다. 1987년 ‘뮤지엄’그룹의 등장은 과거의 모더니즘 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미감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최정화와 이불과 같은 뮤지엄 멤버를 비롯하여 아토마우스의 이동기와 문신 작업으로 뚜렷한 개성을 보여준 김준 등 이 무렵의 한국 화단은 신세대의 등장으로 인해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시켜 볼 때, 한국팝의 국제화에 따른 문화적 전략을 논함에 있어서 그 모델을 모색하는 과정은 매우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나는 앞서 박불똥, 오윤, 주재환, 민정기, 김용태 등등 민중작가들의 작품과 김용철, 이길우, 신선미, 이이남, 김지혜, 홍지연 등등 민화를 재해석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들어 이 글의 주제가 되는 한국팝의 세계화 내지는 국제화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또한 김동유, 홍경택, 이이남, 이동기, 김준으로 대변되는, 이미 어느 정도의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작가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국제화의 전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진돼야 할지 하는 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Ⅳ. 

 어떤 한 나라 혹은 한 문명권의 미술사조가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나라 혹은 문명권에 소개될 때 파생되는 문제는 때로 복잡한 양상을 띤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이 주체의 인식작용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한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행위가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재창조인 점은 분명해 진다. 


 “해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재창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재창조는 선행하는 창조적 행위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각 사람들이 그가 발견한 의미에 조응하여 재현시켜야 하는, 창조된 예술작품의 요구에 따른다.” 


 가다머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한국에서 보는 팝아트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준다. 주지하듯이 한국팝의 특징적 양상 가운데 하나는 서구적 아이콘의 변형인 것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이다. 마릴린 먼로의 한국 버전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창작방법론 중 하나인 인용(appropriation)의 전략을 구사하는 이 작가들은 바로 원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예술의 재창조를 기하는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적인 양상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연 이러한 방법론들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예컨대 최정화의 경우는 과연 어떠한가? 비엔날레나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관 전시에 초대를 받고 있는 최정화의 경우 과연 세계의 유명 미술관이나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는 가운데 명실 공히 국제적인 작가로 확고히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논의는 구체적인 문화 전략과 전술이 따라주지 않는 한, 그 방법의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난항을 겪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미술 사조를 해외에 소개하고 국제화시키는 일이란 말이 쉽지 관민이 총력을 경주하여 사업에 임하지 않는 한, 그 목적의 달성은 지난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팝의 국제화와 관련하여 한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 바 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길지만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작명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최근 우리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는 지금 일종의 트랜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소위 말하는 ‘한국적 팝(Korean Pop)’입니다. 이는 한국의 독특한 미감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소비문화를 풍자하는 동시에 미술의 대중화를 이끄는 화풍을 일컫는 용어인데, 대표적인 작가로는 권기수, 김동유, 김준, 데비한, 이동기, 이동재, 이이남, 홍경택, 홍지연, 홍지윤 등등입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기술할 때 마땅한 비평적 용어가 없어 막연히 ‘한국적 팝’이라고 불렀던 것이 어느덧 관례가 된 것 같은데, 저는 이 자리에서 ‘대중화(Daejunghwa)’라는 브랜드 명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팝(Pop)’이라고 하는 용어는 60년대 미국의 팝아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기적으로 안 맞을뿐더러 자칫하면 스스로 문화식민지화를 용인하는 꼴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단색화(Dansaekhwa)’와 함께 보다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입니다만, 이름이란 것이 자꾸 부르다보면 관례적으로 인정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지미술(Hanji Art)’도 국제적 브랜드화에 적합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자료집, 24쪽.     


 명칭에 대한 논의는 신중할수록 좋지만 ‘Dansaekhwa’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나친 신중은 일의 진척을 더디게 하거나 효과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용어를 2천년도의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도록을 통해 처음 제기한 이래 15년이 경과한 지금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이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국제적인 용어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팝의 경우, ‘Dansaekhwa’처럼 국제적인 호응도가 높을 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한국팝의 실체적 내용이 단색화처럼 한국 고유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소비사회의 단면을 작품에 반영함으로써, 현대의 일상적 삶에서 배태된 현대인의 평균적인 정서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민중미술 작가들이나 민화에 기반을 둔 작가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대중소비사회적 미감에 바탕을 둔 작가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으나, 문화전략이 치밀하게 뒷받침되지 못 한다면 이의 실현 또한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Ⅴ.

 그렇다면 한국의 팝아트를 세계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문화전략을 과연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우선 이 문제에 대한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필요한 것은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구호나 실천만으로는 부족하다. 말 그대로 민간과 해당 정부부처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그렇게 해서 도출된 구체적 방안들을 문화예술의 현장에 적용하여 효율적으로 실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비근한 예로 어느 정도 국제화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단색화조차 영어로 된 학술도서가 거의 없는 편인데, 세계적인 배급망을 갖춘 유명 출판사에서 서적으로 출판하는 일은 매우 시급하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들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출판하는 방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는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서적의 출판이란 상업적 이익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국내의 출판사에게서 이의 자발적인 출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세계적인 배급망을 갖춘 해외의 미술 전문도서 출판사가 한국의 미술에 관한 서적을 자비 출판해주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물론 수요가 많으면 공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법이니 이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단색화나 팝아트 역시 지금처럼 계속 뻗어나가서 해외의 미술관이나 갤러리, 옥션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가 된다면 해외의 유명 출판사에서 출판을 기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미술 전문 서적의 출판은 국제화에 요구되는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미술사조에 대한 미술사나 비평 등 학술적인 접근을 통해 이론적 토대를 확고히 하는 일은 우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미술사가와 미술평론가, 미학자들에 의한 활발한 저술과 함께 번역 또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미술도서를 출판하는 사업은 낚시에 비유하자면 떡밥을 주는 일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저변을 확대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배급망을 갖춘 해외의 유명 출판사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자본을 투자하여 한국의 미술 서적 출판을 발주하는 사업은 정부와 문화재단이 이끌어갈 수 있는 사업이다.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해당 분야에 권위를 갖춘 인사를 필자로 위촉하거나, 공모를 통해 필자를 정하는 방법이 적절할 것이다. 

 



Ⅵ. 

 출판사업과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은 비평활성화에 대한 지원사업의 확장이다. 수년 전부터 문화예술위원회가 개설한 비평활성화지원사업은 연구 여건이 열악한 비평분야 출판사업에 가뭄의 단비같은 역할을 하였으나, 최근들어 기금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어 이에 대한 재고를 촉구한다. 비평분야의 활성화와 함께 미술사 역시 그 역할과 기능이 강조되어야 할 분야이다. 비평이나 미술사에 대한 지원을 통해 학술적 성과를 견인해 내고, 이는 다시 해외의 저명 출판사를 통해 출판과 연계된다면 한국미술의 국제화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한국미술의 국제화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상업갤러리의 역할이다. 그 중에서도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국내의 역량있는 갤러리의 역할이 국제화에 매우 중요하다. 특히 바젤이나 프리즈와 같은 해외의 유명 아트페어에 참가할 자격을 갖춘 국내 갤러리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점이다. 한국의 단색화가 국제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갤러리의 해외 네트워크와 과감한 투자가 있었다. 해외의 유명 아트페어에의 지속적인 참가가 세계적인 미술관이나 컬렉션과 연결되어 한국의 미술작품이 소장되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비평가나 미술사가 등 이론가들은 너무 자본을 경원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국제화는 미술시장과 같이 가는 것이다. 해외에서 잘 팔리지 않는 국제적 작가란 없다. 한국의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되려면 해외의 옥션이나 아트페어를 통해 유명 미술관이나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역할을 하는 주체가 바로 갤러리들이다. 한 때 홍콩 아트페어를 통해 상업적으로 부상되었던 H와 K작가의 경우 미술관과 연결되지 못 했다. 네트워킹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다. 한국의 유명한 갤러리가 할 몫은 바로 그런 네트워킹을 통해 미술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일이다. 신뢰감 있는 동반자 관계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술의 한 사조나 경향이 국제화되려면 국내외적으로 빈번히 노출되어야 한다. 국내외의 언론과 미술현장에서 꾸준히 거론되고 호출이 될 때 비로소 그 미술사조나 경향, 작가는 세계화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고 할 수 있다. 한국팝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팝에 대한 전시가 어떤 형태로든 빈번히 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전시와 함께 가능한 한 학술행사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평과 미술사적 입장에서 한국팝에 대한 이론적 학술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미술사에서의 자리매김과 국제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권위 있는 미술관 전시는 국제화에 필수적인 과정 가운데 하나이다. 

 



Ⅶ. 

 팝이란 무엇인가?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외연을 넓힐 수 있는 다소 모호한 개념이 바로 팝이다. ‘대중가요’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이 좋아하면 ‘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의 경우에 팝은 미술 고유의 형식과 매체가 지닌 특유의 낯선 기법적 특성으로 인하여 음악의 경우처럼 선뜻 다가가기에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대중의 눈에 익숙한 도상을 사용할 경우 우선 ‘팝적’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은 작품의 경우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팝의 개념적 적용에 관해 논란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팝의 외연은 넓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팝을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과거 60-70년대와는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 현재 우리는 블로그를 비롯하여 유튜브,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제화가 바로 우리의 곁에서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실제로 우리는 이메일과 페이스북, 카카오톡과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하루에도 수없이 통신을 하는 전자유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한 미술사조를 국제화한다는 문제는 아날로그 시대와는 현격히 다른 문화적 조건을 활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한국의 팝아트에 대한 선명한 정체성과 미적 특질을 정립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선행되지 못한다면 한국팝의 국제화란 단지 미망에 불과하다. 

 한국팝의 세계화를 위한 전략적 접근은 필요하지만 전술적으로 볼 때 ‘선택과 집중’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러한 전략은 성공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가능성이 큰 재능 있는 팝 작가를 선정하고, 과감한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 가령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어준다든지 하는 과감한 정책이 필수적으로 따라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업갤러리는 ‘선택과 집중’의 대상이 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의 아트페어나 옥션에 소개, 해외의 유명 미술관이나 컬렉션에 소장되도록 힘을 써야 한다. 정부는 이들이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세제의 혜택을 비로한 적극적인 장려책을 개발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서 소재를 발굴하여 현대화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다양한 신화와 전통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일군 마라카미 다카시의 경우에서 보듯이, 국제화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의 곁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문화적 뿌리가 있는 작업을 할 때 비로소 국제 경쟁력이 갖춰지게 될 것이다.  


  

<팝아트에 관한 참고문헌>

윤진섭,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미진사, 1997

윤진섭, 《몸의 언어》, 터치아트, 2009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신현준 외, 《한국 팝의 고고학1960》, 한길사, 2005

신현준 외, 《한국 팝의 고고학1970》, 한길사, 2005

강병남, 《새 외식산업실무론》, 지구문화사, 2001

《개항백년연표자료집》, 《신동아》, 1976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도시, 문화, 사람》, 서울문화포럼, 2007

《팝아트》, 루시 R. 리파드 외 저, 전경희 역, 미진사, 1998

아시아 미술교류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 자료집, 한국화랑협회, 2009

《창작과 인용》, 무역센터 현대미술관, 1992

《현대미술 40년의 얼굴》, 중앙일보사, 1994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계간미술》, 1979

《한만영 화집》, 코리아아트, 2005

《김정명 화집》, 신동문화, 1990

《Made in Korea》, Sub Club, 1991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7-1995》, 미술문화, 1995

《전환과 역동의 시대 1965-1975》, 국립현대미술관, 삶과 꿈, 2001

《팝아트의 세계 POP N POP》, 성남아트센터, 2008

《또 하나의 일상, 극사실 회화의 어제와 오늘》, 성남아트센터, 2009

Edward Lucie-Smith, Pop Art, Concepts of Modern Art, 2nd Edition, edited by Nikos Stangos, Thames and Hudson, 1981, 

Art of the 20th Century, Taschen, 2000 

Gao Minglu ‘Toward A Traditional Modernity:An Overview of The Exhibition-Inside Out’ an Essay/www.chinese art.com/volume.5

John Clark, Chinese Art at the End of The Millennium, Chinese-art.com, 2000

Pual Taylor, Post-Pop Art, The MIT press



필자 소개


윤진섭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에서 미술사와 미술비평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 1.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인도트리엔날레 커미셔너, 포천아시아미술제 조직위원장 겸 전시총감독, 타이페이 현대미술관(MOCA) 주최 [K-P.O.P/Progress/Otherness/Play]전의 총감독을 역임하였다. 또한 <한국의 단색화전>(2012, 국립현대미술관), <단색화의 예술전>(2014, 국제갤러리)을 기획하였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겸 AICA KOREA 2014 조직위원장,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또한 그는 최근 호주에서 발행하는 미술전문지 ‘Artink’ 한국특집의 공동에디터를 역임했다.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Yoon, Jin Sup holds B.A. in the Western painting and has M.A. in Aesthetics at Hongik University. He received a doctorate in Philosophy at University of Western Sydney in Australia. He was appointed as curator of the 1st and 3rd Gwangju Biennale Special Exhibition, general artistic director of the 3rd International Media Art Biennale of Seoul, commissioner of Sāo Paulo Biennale, committee head-cum-general artistic director of Pocheon Asian Art Festival, artistic director of K-P.O.P at Taipei MOCA and president of Korean Art Critics Association and also he curated <Dansaekhwa : Korean Monochrome Painting>(2012,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of Korea) and <The Art of Dansaekhwa>(2014, Kukje gallery), He is currently Vice President of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rt Critics(AICA) and President of AICA KOREA 2014 and honorary professor of Sydney College of the Arts. Also he is the consulting editor on 'Korea : Contemporary Art' of Australian Art Magazine Artlink. He has written numerous books including <Body Speaks>, <A Study of Korean Modernism>, <Performance Art : Its Theory and Reality>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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