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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움의 비움(Revealing the Void) 조용익의 회화세계

윤진섭



Ⅰ. 
 조용익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의 단색화가 점차 국제적인 성가(聲價)를 얻어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볼 때, 그리 간단치만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 지난 10여 년간 단색화 작가로서 그의 위상이 그가 맹렬히 활동하던 60-80년대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잊혀진 작가였던 셈이다. 이는 그와 동세대인 한국 단색화의 1세대 작가들, 예컨대 권영우, 김기린, 박서보, 이우환, 윤형근, 정창섭, 정상화, 하종현 등 현재 단색화 부상(浮上)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에 비하면, 그는 자의든 타의든 그 중심권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조용익이 2천년대 중반이후 화단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사정에 기인한다. 1974년에 신생 예술전문대학인 추계예술학교(1997년 추계예술대학교로 개명)의 교수로 임용, 1992년 사직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한 그는 이후 주로 지방에 거주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화가로서 그의 지난 이력을 살펴보면 비록 2천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면서 입지가 좁아지긴 했지만, 국내의 중요한 미술관 기획 전시에 꾸준히 초대를 받음으로써, 앵포르멜과 단색화 분야의 비중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단절의 시기를 보낸 2천년대 중반 이후의 약 10여 년에 걸친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사적 평가의 사정거리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70-80년대에 한국 단색화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었지만, 2천년대 중반 이후 약 10여 년간에 걸친 활동의 공백으로 인하여 단색화 작가로서의 위상이 현저히 약화된 조용익의 작품 세계에 대해 주로 단색화를 중심으로 기술될 것이다.   

Ⅱ. 
 조용익은 전후(戰後)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에 있어서 비중이 매우 큰 작가였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태동기에 나타난 첫 집단적 미술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을 이끈 현대미술가협회(약칭:현대미협)의 창립 회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미술이 나타난 1958년 제4회 [현대전]에 참가함으로써, 이 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이는 그가 동(同) 협회의 대표위원(1959-61)을 역임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조용익은 1961년에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의 연립전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1962년부터 1965년까지 악뛰엘 그룹에 참여하는 등 앵포르멜 미술이 양식의 포화로 인하여 소멸되는 시기까지 한국 추상미술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1959년부터 1969년까지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을 비롯하여 서울대 출신 작가들의 그룹인 [서울 70], 명동화랑 주최 [한국현대미술 1957-1972:추상-상황, 조형과 반조형전], 한국미술-오늘의 방법전] 등 중요한 전시에 빠짐없이 참여한 바 있다.  이 시기 그의 앵포르멜 추상회화는 오방색에 기초하여 무속적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김창열, 박서보, 윤명로, 정상화 등 앵포르멜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두터운 나이프 자국이 선명하고 물질감이 강한 검정회화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삼각형이나 마름모꼴, 원 등 기하학적 형태를 바탕으로 넓적한 붓을 사용하여 생(生)의 원형성을 추구하는 면모를 보였다. 

Ⅲ.
 195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조용익의 작가적 생애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시기였다.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 참가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1967), 제1회 카뉴국제회화제(1969) 등 각종 국제전의 참가는 해외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미협 부이사장을 역임함으로써 화단 행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기간은 국전 중심의 화단 판도에서 국제전 중심의 판도로 이행해 가는 시기로써, 국제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희박하였으나 현대미술 진영의 작가들은 국제전의 참가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1967년과 69년, 두 차례에 걸쳐 파리비엔날레 전권대표로 국내화단에서 부상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조용익은 기하학적 추상을 모색하였는데 이는 산업사회에 진입한 당시의 국내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사각형과 곡선의 띠를 모티브로 한 기하학적 추상 시기, 조용익의 작품은 앵포르멜 추상의 뒤를 이어서 오방색이 중심이 된다. 이는 한국적 미의 원형성을 추구한 그의 기본적 자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단색화의 기본이 이 양대 시기(앵포르멜과 기하학적 추상)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Ⅳ.
 ‘지움의 비움’의 미학으로 대변되는 조용익의 단색화적 경향은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동엽, 정상화, 정창섭, 최병소, 하종현 등 대다수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의 경우처럼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부정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감을 칠하고 지우는 그의 반복적 행위는 마치 무명의 도공이 옹기에 유약을 바르고 손가락으로 선을 긋는 지두문(指頭紋)을 연상시킨다. 엷게 색이 칠해진 캔버스 위에 손가락이나 나이프, 넓적한 붓을 사용하여 유사한 형태의 흔적을 남기는 조용익의 제작 방법은 시기별로 다양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다. 

1. 제1기(1974-1980년대 초반) : 점화(點畵)의 시기
캔버스의 바탕을 백, 청, 황, 베이지, 갈색 등 주로 연한 중성색으로 칠한 뒤, 그 위에 손가락이나 나이프로 작은 점이나 쐐기(∇) 형태의 패턴을 반복적으로 그어 상하좌우로 질서정연하게 배열한 작품을 제작한 시기를 말한다. 캔버스의 밑으로부터 부드러운 물감의 흔적이 남으면서 패턴과 동화되는 느낌을 주며 때로는 그림자와 같은 진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특징이다. 
 조용익이 점화를 맨 처음 시작한 것은 1974년이었다. 처음에는 유성 물감으로 시작하였으나 딱딱한 느낌이 들어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게 된다. 신라토기와 조선 백자에 관한 화집을 뒤적이던 중 영감이 떠올라 종이에 싸인펜으로 끄적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가 유성 물감에서 아크릴 칼라로  전환하게 된 것은 ‘물기가 감도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였다.  
 폭이 넓은 평필로 묽게 갠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 전면에 고르게 칠한 다음, 페인팅 나이프로 질서정연하게, 마치 음악에서의 스타카토 기법처럼 똑똑 끊어서 지워나간다.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바르고 이번에는 손가락이나 페인팅 나이프로 반복해서 지워나간다. 조용익은 동세대의 단색화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우는 동시에 비우는’ 반복적 행위를 무려 7-8년간이나 지속했다. 그는 화면이 지나치게 밝다 싶으면 어두운 색을 사용하고, 다시 너무 어둡다 싶으면 밝은 색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마치 깊은 밤에서 박명(薄明)을 거쳐 밝은 대낮이 찾아오는 것처럼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닮았다. 그러한 순환은 단기간에 걸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3년의 시차를 두고 전개되었다. 그가 그러한 행위를 통해 화면에서 바라는 것은 “소박하고 말이 없는 침묵의 결과”였다. 
 조용익이 화면에 남긴 손가락이나 페인팅 나이프의 흔적에 주목한 사람은 미술평론가 이일이었다. 그는 <공간>지가 마련한 한 특집에서 그를 색면적 경향의 화가로 꼽았으나 약간 개념상의 애매함이 없지 않다고 전제한 뒤, “색면보다는 오히려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배열된, 일종의 기호와 같은 붓 자국이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평가하였다.  
    
 “물감을 머금은 화필이 캔버스에 와 닿는 강약에 따라 화면에 다양한 리듬이 태어나며, 그 리듬이 화면 전체의 특이한 공간을 형성한다. 따라서 조용익의 경우, 붓 자국에 의한 리드미컬한 공간이 곧 화면을 이루며 동시에 붓 자국의 흔적들이 대개의 경우 바탕의 평면 속에 고루 통합되어 균일 색면의 효과를 낳고 있다.”
 
 조용익의 점화 연작 화면에 나타난 이 리드미컬한 요소는 다음에 전개되는 물결 연작에서도 역시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제2기(1980년대 초반-1980년대 후반) : 물결(Wave)의 시기
이 시기에 이르면 제1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다양한 색의 사용이 사라지면서 베이지, 갈색, 연한 노란색, 다갈색 등 전반적으로 난색계열의 중성색이 자리를 잡게 되며, 운필의 폭이 커지게 된다. 형태는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형국이거나, 마치 넓은 옥수수 잎이 너울대는 것과 같이 리드미컬하게 반복적인 물결의 모습을 보인다. 단색화의 특징인 반복의 행위가 두드러지면서 지움으로써 화면을 비우는 ‘지움과 비움’의 미학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물결 연작에서 두드러진 요소는 호흡이다. 단 한 번의 개칠도 용납되지 않는 일획의 정수(精髓)가 화면에 안착해야 작품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점화에서 보여주었던 스타카토식의 짧은 단타(短打)의 리듬이 장폭의 리듬으로 바뀌면서 화면은 더욱 드라마틱해 진다. 
 
 “우리의 눈은 우선 파도 물결 같은 모티브가 제각기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 하나는 완전한 독립적인 것인 동시에 전체 그림을 형성하는 한 요소로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요소의 독립성은 하나의 완전한 형체로서 선, 면, 힘, 율동, 공간성 등이 개입된 조형이며 수도승의 정신과 같은 청명한 힘의 집중을 엿보게 하여 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필력의 한결같은 표출이 정신정화 상태를 또한 시사해 준다. 이 상태를 입증해 주는 것은 그 운필에 가필이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뿐만이 아니라 그 독립적인 형상은 또 다른 형상으로 전위되어 필운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낸다. 조용익은 자신의 작품을 집약하되 '숨을 쉬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라고 한다. 이 말이 가장 적절한 작품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임영방, 생동적(生動的) 표상형식(表象形式)의 리듬 -조용익(趙容翊)의 작품세계, 1984년 신세계갤러리 개인전 서문 중에서-

 조용익의 <무제(Work)> 연작에 대한 미술평론가 임영방의 해석은 작가가 작업을 할 때 내뿜고 들이마시는 호흡과 필운(筆運)의 관계 및 부분과 전체의 관련성이 선, 면, 힘, 율동, 공간성 등 조형의 기본요소에 의해 파생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매개하는 ‘청명한 힘의 집중’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때 힘의 집중이 가져다주는 것은 붓을 쥔 손이 한껏 위를 향해 올려치면서 연이은 파상(波狀)의 곡선을 낳은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속적인 반복적 행위는 그 자신을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의 경지로 몰아넣는다. ‘숨을 쉬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는 그림을 그리는 동작과 그 결과가 혼연일체가 돼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는 상태를 이름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놀이정신이 파생된다. 이른바 호흡의 춤이다.  
 
제3기(1990년대 초반 이후-2000년대 초반 까지) : 무심(無心)의 시기
이 시기의 특징은 대나무를 모티브로 한 무심한 경지이다. 이는 마치 사군자 중의 하나인 대나무를 마음에 품고 무심하게 붓을 놀리듯 기교가 사라지며 약간 서툰 듯한, 노자가 말한 것처럼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커다란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이는 경지가 나타난다. 캔버스의 바탕색은 회색을 비롯하여 갈색, 베이지 등 중성색으로 제한되며 표현성은 극도로 자제되는 것이 특징이다. 제2기에 해당하는 ‘물결’의 기세가 잦아들면서 광포(狂暴)한 바다의 포말이 점차 사라진 형국이다.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작품(Work)> 연작에 이르면 색은 다시 무채색 계열로 바뀌게 된다. 회색, 연한 검정, 황토색 등 차분히 가라앉은 바탕색에 툭툭 치듯 무심히 그은 선들이 눈길을 끈다. 넓은 평필로 갓 칠한 캔버스 표면 위를 손가락으로 그은 선묘들은 대나무나 혹은 잡초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 시기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닐 불(不)’자 연작은 그것이 한편으로는 대나무 잎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不’자로 보이기도 하여 형상과 기호의 중의성을 내포하고 있다.  
 
 “먼 옛날 태고 시절에는 무법(無法)이었다. 태고에는 순박함이 흩어져 있지 않다가, 한번 흩어짐에 법(法)이 생겼다. 법은 어떻게 세워 졌는가? 일획(一劃)에서 비롯되었다. 일획이란 온 무리의 밑바탕이요, 만 가지 형상의 뿌리이다. 그 작용이 신에게만 드러나고 인간에게는 숨겨지니,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일획의 법은 자기 스스로 세워진 것이다. 일획의 법이 세워짐으로써 무법이 유법(有法)을 낳고, 유법이 많은 법과 통하게 된다. 무릇 획이란 마음에 따르는 것이다.”
 석도(石濤)의 저서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에 나오는 이 첫 문장에서 일획론의 요체는 ‘일획의 법은 자기 스스로 세워진 것’에 있다. 그것은 석도 스스로 그러했듯이 남이 한 것을 따라하지 않는 것, 즉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나온다. 작가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뜨거운 긍정을 통해 전인미답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 촉매가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용익의 단색화에서 일획은 ‘점화(點畵)의 시기’를 필두로 ‘물결의 시기’를 거쳐 ‘무심(無心)의 시기’를 관류하는 제작 방법이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시기는 맨 마지막인 ‘무심의 시기’, 곧 예의 대나무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Work)> 연작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아크릴 물감으로 동양의 전통적인 사군자의 느낌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Ⅴ. 
이 시기를 끝으로 조용익은 건강과 일신상의 이유로 긴 침묵의 기간으로 접아든다. 그 기간이 무려 십여 년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 그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면서 비록 80대의 노경에 이르렀지만 재기를 위해 왕성하게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이는 작가로서 그가 생애의 마지막에 불태우는 투혼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타날지,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갖게 되는 이번 회고전의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이다. 
 끝으로 이번 조용익의 회고전에 즈음하여 필자가 오래 전에 써놓은 단상이 있어 여기에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달항아리 혹은 오지 질그릇은 늘 미완(未完)의 대기(大器)이다. 조선의 그릇은 늘 그렇게 비움의 미학을 통해 전수돼 왔다. 
 그것은 채워질 날을 기대하지만 그 채움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가득함, 즉 충만은 비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주석 

1) 조용익이 참가한 비중있는 미술관 기획전시로는 [60년대의 한국현대미술, 앵포르멜과 그 주변전], 1984, 워커힐미술관, [현대미술 40년전], 1985,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미술, 원류를 찾아서], 1990, 토탈미술관, [한국 현대미술 50년전], 1994,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 격정과 표현전], 2000, 호암갤러리, [사유와 감성의 시대전], 2002,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개관기념전], 2004, 리움미술관, [고난 속에 피어난 추상전], 2004, 문예진흥원/ MIA미술관 등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 사람의 화가로서 조용익의 화려했던 과거 활동을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조용익을 70-8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복원을 시도하는 판단 근거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기인한다.    


2)‘반(反)국전’을 내걸고 20대 후반의 청년작가들이 세를 규합하여 결성한 이 단체의 창립년도는 1957년이다. 창립회원은 김서봉, 김영환, 김종휘, 김창열, 김청관, 김충선, 나병재, 문우식, 이철, 장성순, 조동훈, 조용민, 하인두이다. 조용익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해는 1958년인데, 그는 이 해 11월 28일부터 12월 8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제4회 [현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현대미술가협회전](제1회:1957. 5. 1-9, U.S.I.S(미공보원)이 ‘현대전’이란 명칭으로 개명된 것은 화신화랑에서 열린 제3회전(1958. 5. 15-22)에서 비롯된다. 

-한국미술단체 100년, 320-1쪽,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3.  


3) 공식명칭은 [연립전(聯立展)]으로 1961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렸다. 참여작가는 다음과 같다. 김용선, 김창열,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이용환, 장성순, 정상화, 조용익, 하인두, 김봉태, 권영숙, 손찬성, 김종학, 김대우, 유영렬, 정영섭, 최관도, 박 곤, 윤명로.   


4) 창립회원은 김대우, 김봉태, 김종학, 김창열, 박서보, 손찬성, 윤명로, 이양노, 장성순, 전상수, 정상화, 조용익, 하인두 등. 창립전은 1962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다.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통합돼 결성된 단체로 전위를 표방하며 출범하였다. 한국미술단체100년, 188쪽. 


5)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신축개관기념전으로 열린 전시를 말한다(1979. 5. 21-6. 0)회화와 조각을 망라하여 초대한 이 전시에는 당시 화단의 중요한 작가들이 초대를 받았다. 


6)조용익, <공간> 1980년 8월호 특집 기사 “화면 속의 선묘와 색면” 작가노트. 


7) 조용익, 작가노트, 앞의 책. 


8) 조용익, 작가노트, 앞의 책. 

 

9) 이 일, <空間> 1980년 8월호 특집 기사, 1980년, 한국현대미술의 상황(狀況)-“평면 속의 선묘와 색면” 


10) 이 일, 앞의 책. 


11) 이태호, 화가는 첫 붓에 예술혼을 적신다, 석도(石濤),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의 일획론(一劃論), http://sambolove.blog.me/220410985854


12) 여기에서 일획론의 '긋는다'는 획(劃)은 '그린다'는 화(畵)와 어원이 같다. '畵'자를 '그림 화'라 읽기도 하지만 '그을 획'으로도 읽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석도도 획과 화를 구분 없이 모두 '畵'로 썼다. 획(劃)자는 '畵'자에 '칼 도(刀)'변을 더하여, 자르거나 긋는다는 의미를 강조한 글자이다. '畵'의 본 글자로 상형문자에서 딴 전서체는 '画'이다. '밭 전(田)'의 사방에 획을 그어 만든 글자인 셈이다. 이를 볼 때 '그림 화'자나 '그을 획'자는 농경문화에서 밭을 일구는 일과 그 밭의 소유를 나타내는 경계 표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태호, 앞의 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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