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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과 해체-전광영의 작업

윤진섭


Ⅰ.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전광영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은 곧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과 직결된다. 시인 정현종이 <방운객>이란 시에서 읊었듯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며,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먼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전광영이란 한 인물의 작업을 통해 그의 신분의 배경이 되는 가족사적 의미는 물론, 보다 넓게는 그의 작업이 태동된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특히 후자는 서구를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를 위한 보다 쉬운 접근로를 터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하리라 판단된다. 
 최근 들어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 단색화(Dansaekhwa)의 경우, 그것이 국제무대에서 용인되고 보편적 이해의 지평으로 나아가게 된 이면에는 한국의 유구한 문화적 전통과 결부된 설득력 있는 해석적 틀을 제시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한국의 단색화를 단지 서구 모더니즘의 틀 안에서 해석했다면, 필경 그것은 서구 미니멀리즘의 한 아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전광영의 경우도 여기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알다시피 그는 60년대 중반 이후의 미술대학 수업과 창작 활동을 통해 서구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에게 독(毒)이 될 수도, 약(藥)이 될 수도 있다. 독의 경우는 만일 그가 서구 모더니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매몰됐을 때이며, 약은 그것을 극복함은 물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보편적 지평에로 나아갔을 경우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전광영은 단연 후자에 속한다. 여기서 “비평은 비평적 가치가 있을 때 유효하다.”는 누군가의 전언을 참고로 하자면, 전광영이 이룩한 50년의 화업은 의미의 다발로 점철돼 있고, 그것의 배경에는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유구한 문화적 전통이 버티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Ⅱ.
 전광영의 작품을 볼 때, 그것이 우리에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생활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작품이 비록 난해한 추상적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이 풍기는 분위기가 우리의 눈에 익숙한 그 무엇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러 혹자는 한약방의 천장에 매달린 약봉지를 연상시킨다고 정확히 출처를 밝히고 있지만, 비단 그뿐만이 아니더라도 전통 농가에서 갈무리할 농산물을 처마 밑이나 천장에 매단 풍경은 지금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전광영의 경우, 이를 그의 가족사적 측면과 결부시켜 보자면 강원도 홍천에서 한약방을 경영한 부친의 이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 그의 작품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삼각형 입체의 기본 단위는 그의 유년기의 추억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어지간한 시골의 한약방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한문으로 약 이름을 써넣은 목제 약장이 방 한켠에 놓여있고, 똑같은 크기의 흰 사각형 종이 위에 약재를 고르게 올려놓은 다음 정갈하게 싸는 장면은 흔하다. 이때 10첩이 1재에 해당하는데, 예컨대 10재면 곧 100첩, 즉 100개의포장지가 소요된다. 이것은 무엇을 이름인가? 이를 가령 미국의 미니멀리스트인 솔 르윗의 모듈 작업에 비유하자면, 우리의 선조들이 벌써 오래 전에 생활 속에서 모듈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그리고 다소 성급하게 단언하자면 전광영의 한지 입체 작업은 서구 미니멀리즘의 솔 르윗 식 모듈 작업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 미와 모듈에 그것의 미학적 내지는 구조적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이다. 


Ⅲ.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작업은 허약할 수 밖에 없다. 기댈 수 있는 미학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최근 들어 나날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전광영의 작가적 성공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90년대 중반의 어느날, 까맣게 잊고 있던 유년기의 추억이 전광석화처럼 되살아나 작업과 연결된 것은 그에게는 크나 큰 행운이었다. 어렸을 때 본, 흰 사각형 종이에 약재를 싸던 부친의 한약방 풍경이 문득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한문이 적힌 고서(古書)를 잘라 삼각형의 스치로폼을 싸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비록 나중에는 한문이 인쇄된 한지로 대체됐지만, 어쨌든 이 재료의 사용은 전광영의 작업을 굳건한 미학적 성취의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공헌하였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전광영의 작업이 국제화하는 발화점이었으며, 부조회화를 거쳐 입체와 설치를 향해 나아가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전광영의 회화적 족적을 살펴볼 때, 그의 회화가 모던한 언술행위에서 비롯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가령 추상화가 주류를 이루는 70년대 그의 그림들은 빛, 색, 형태 등 회화의 근본 요소에 제작의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활동 경력, 즉 60년대 중후반의 [신상전](1966-7),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1966-8), [국전](1968-9)에 비춰 볼 때,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해 볼 수 있지 않나 여겨진다. 그러나 1968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도미(渡美), 71년에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그의 경력을 염두에 두면 이 시기는 그의 작가적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임을 유추할 수 있다. 서구미술의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화적 유전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1971에서 77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광영이 미국에 터를 잡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주로 미국을 무대로 펼쳐졌다. 그러나 이 시기 전광영의 활동은 현대미술의 각축장인 뉴욕이 아니라 주로 필50여년에 이르는 장구한 족적을 보이고 있는 전광영의 작가적 이력은 치열한 실험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색채와 매제를 중심으로 전개돼온 그의 작가적 활동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과 재단들에 작품이 소장되고, 해외의 저명한 비평가들에 의해 작품세계가 다루어지면서 국제미술계에서 점진적으로 지명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안주할 단계가 아니다. 현대미술의 각축장인 저명한 비엔날레나 최고 수준의 아트페어를 통해 보다 깊숙이 국제미술계의 중심에 진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작가로서 전광영이 지닌 미덕은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왕성한 실험정신이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작업을 더 가열차게 몰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명실 공히 국제적 거장으로서의 전광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주석 
1) 오광수, <한지의 정서와 구조화의 작업-전광영의 근작>, [올해의 작가 2001-전광영]전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발행, 2001, 9-10쪽.

2)“어릴 때 고향(강원도 홍천) 한약방에서 봤던 약봉지가 인상깊게 남아 있었어요. 한지로 싼 약봉지를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풍경이야말로 그것 자체가 한국의 현대적 오브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이 박스문화라면 우리는 보자기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현대화시켜본 작업입니다.” 작가의 변, 정중헌, <‘화단의 이방인’ 전광영의 ‘My Way’, 앞의 책, 36쪽에서 재인용.  

3) 이 기간에 전광영이 참가한 대표적인 전시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National Forum of Professional Artists Show](1971-8), 시립미술관, 필라델피아, 미국
   [Earth ArtⅡ전](1973), 필라델피아 시립미술관, 필라델피아, 미국
   [오늘의 작가전], Derexei Unversity Museum, 필라델피아, 미국
   [현대작가초대전], 윌리엄 펜 기념미술관, 해리스버그, 필라델피아, 미국 
   참고로 이 시기에 전광영이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은 Holly Solomon 화랑(1972)과 Lotus 화랑(1975) 등 두 차례이다. 


4)  전광영은 부친이 한약방을 경영하여 일군 재력으로 인해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화가되기를 원치 않았던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미국유학 시절, 그는 부친의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가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갖가지 아르바이트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종래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Tm레기 통”을 뒤지기조차 했다고 한다. 정중헌, 앞의 글 참고.  


5) 이 시기에 전광영이 한국 화단에서 겪은 다양한 체험은 정중헌의 글에 잘 요약돼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정중헌은 ‘화단의 이방인’이라는 단어로 이 시기에 겪은 전광영의 체험을 압축하고 있다. 

6)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김연희의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김연희, <전광영-구축적 기범과 한지의 정서>, 앞의 도록 17-8쪽.

7) 물론 여기서 일루전을 이루는 분화구 형태의 채색화를 염두에 둔다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입체가 됐던 거대한 구조물로 이루어진 설치작품이 됐던 간에 전광영의 한지 입체작업은 대부분 단색조로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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