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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코딩의 신비한 세계 : 가상과 실제의 경계에서

윤진섭

Ⅰ. 
 박종규는 평면은 물론이요 입체, 설치, 판화, 사진, 미디어 아트,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20여 년에 이르는 그의 경력은 그가 한 자리에 머무는 안주형(安住型)의 작가가 아니라, 새로운 소재와 매체를 찾아 행동의 반경을 넓히고 융합을 이루는 전방위적 성격의 작가임을 말해준다. 


 박종규가 자신의 예술에 기울이는 이러한 실험의식은 오늘날 보는 것처럼 그를 문제작가로 만들었다. 화단이 주목하는 문제작가로서의 박종규는 그러한 평가에 상응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장차 국제적인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초석을 쌓았다. 이번에 경북 영천에 위치한 시안미술관이 개관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마련한 ‘2015 제1회 시안미술관 중진작가 특별전시 프로젝트’ 작가로 그를 선정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평가가 반영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박종규는 이번에 시안미술관에서 가진 초대전을 통해 지난 20여 년간에 걸친 화단활동을 중간 결산하는 동시에 자신이 지닌 전 역량을 전시에 투입함으로써, 작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한국의 미술계에 확실히 알리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가 한낱 경북 대구 지역에 국한된 지역작가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지명도를 획득함으로써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유망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음을 의미한다. 



Ⅱ.   
 앞에서 나는 박종규가 매체의 융합에 능한 전방위 작가임을 밝혔다. 이는 그만큼 그가 매체의 활용에 유연한 의식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평면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을 결과물로 산출하되 그 과정에서는 컴퓨터를 활용하는 등 자신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최근 몇 년 간 그가 회화작품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점(dot)과 선(line)의 세계는 컴퓨터에 의한 지극히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이루진 것으로 거기에는 인간적인 어떤 감정도 배제돼 있다. 박종규가 시도하는 이러한 회화적 방법론은 기존 회화의 개념과 지평을 넓히는 것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코딩(Encoding)’이라고 명명된 이번 시안미술관 초대전의 제목은 박종규의 컴퓨터를 활용한 작업의 요체를 설명해주는 표제어이다. 흔히 ‘암호화하다 혹은 암호로 고쳐 쓰다’는 의미를 지닌 ‘인코딩’이란 단어는 실제의 세계를 기호의 세계로 변환하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얼핏 점자를 연상시키는 박종규의 점의 회화는 정작 점자와는 관계가 없으며, 실제의 세계를 암호로 전환한 기호의 세계이다. 그것은 의미의 세계가 아니라 단지 기호의 세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코드를 연상시키는 박종규의 선의 회화는 경제적 교환 기호체계로서의 바코드와는 관계가 없고 컴퓨터상의 픽셀(pixel)의 조합이 이루는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컴퓨터상에서 이미지의 기본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이 픽셀을 가리켜 ‘점(dot)’ 또는 ‘화소’라고 하는데 박종규의 작업은 가령 특정한 대상을 찍은 사진이나 심지어는 음악조차 ‘코드화’하여 이미지로 출력한다. 따라서 박종규의 점이나 선 그림들은 지극히 기계적인 성격의 회화인 것이다. 이처럼 박종규가 시도하는 새로운 회화적 방법론은 작가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순수한 기계적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박종규의 작업실에는 2.4미터 폭의 시트지를 출력할 수 있는 대형 기계가 놓여있다. 컴퓨터와 연결된 이 기계로부터 디지털 코드, 즉 픽셀로 변환된 이미지들이 시트지 위에 새겨져 출력된다. 이 시트지는 다시 캔버스 위에 부착되며 점이나 선만 남고 나머지들은 화면에서 제거된다. 제작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시트지에서 점을 떼어낸 상태에서 아크릴 물감 칠을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시트지에서 바로 떼어내는 방법이다. 
 
Ⅲ.
 그렇다면 박종규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지점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그의 출신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6년 생인 박종규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일찍이 섬유산업이 발달한 대구는 그로 인해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이 되었는데, 현대미술이 이곳에서 번성한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모더니즘이 유독 대구에서 뿌리를 내린 이면에는 수화랑을 비롯하여 댓갤러리, 인공갤러리, 신라갤러리, 시공갤러리, 리안갤러리, 우손갤러리 등등 미니멀 중심의 모더니즘을 선호한 갤러리들의 노력이 깔려있다.   


 대구의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박종규가 계명대학교 회화과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미니멀한 성격의 미적 감수성과 취향이 형성하게 되었다. 대학시절의 은사인 정점식, 유병수 교수의 지도와 이강소, 최병소, 이교준, 남춘모, 권오봉 등등 미니멀한 경향의 작업 스타일을 견지한 선배들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박종규는 자신을 가리켜 ‘대구 미니멀의 마지막 세대’라고 부를 만큼 미니멀의 적자로서의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대구는 일찍이 일본 모노파(Monoha)와의 교류를 통해 ‘물(物)’을 중심으로 한 미술의 방법론이 정착된 곳이다. 박종규는 일본 모노파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대표작가 중의 한 사람인 스가 기시오(管 木志雄)와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스가는 박종규의 작품을 평하는 글에서 그를 가리켜 “소재에 예민한 아티스트”라고 부를 만큼 정확히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박종규가 즐겨 사용하는 투명비닐이나 트레이싱 페이퍼, 각목, 테이프, 실리콘 등등과 같은 중성적인 성격의 물질감을 드러내는 사물들의 등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유독 중성적 성질을 지닌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인 것과 일찍이 90년대 초반에 탈(脫)평면을 지향, 오브제와 설치로 방향을 잡은 것과는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1991년부터 1996년까지 프랑스 파리 체류시절에 형성된 쉬포르 쉬르파스의 영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파리국립미술학교 출신인 박종규는 대학시절의 은사인 쉬포르 쉬르파스의 대가 끌로드 비알라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캔버스에서 프레임을 벗겨냄으로써 물질의 중성적 성격을 강조하고 오브제 자체에 주목한 이 미술사조는 그에게 미술의 다양한 표현 방법론에 눈뜨게 했다. 박종규가 90년대 초반에 파라핀을 비롯하여 고무판, 솜, 비닐, 나무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러한 물질들의 중성적 성격이 자신의 미적 취향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후반이후 박종규는 각목, 투명비닐, 트레이싱 페이퍼, 투명 아크릴, 철판, 돌 등 중성적인 성격이 짙은 사물들을 전시장에 끌어들임으로써,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사물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즉 작가의 주관의 개입을 억제하고 사물 자체에 시선을 돌리게 하는 지각 방법론에 빠지게 된다. 쉬포르 쉬르파스가 가져다 준 미쟝센과 모노하의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전시장 연출법, 그리고 일찍부터 형성된 대구 현대미술 특유의 미니멀한 감수성이 결합돼 박종규의 미술관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박종규의 작품세계에서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사진이다. 중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에 매료돼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중학시절 사진반 활동을 통해 사진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1986) 전시장 벽에 철로를 찍어 확대한 사진을 부착하고 그 앞에 실제의 철로를 설치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사진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매체로 자리잡게 된다. 



Ⅳ.
 거칠게 분류할 때 박종규의 작품세계를 관류하는 방법론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는 회화, 둘째는 소위 설치와 오브제로 대변되는 풍경, 셋째는 컴퓨터 기반의 뉴미디어의 세계이다. 이번 시안미술관의 전시는 이 세 개의 경향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화는 시안미술관 별관에 집중적으로 전시되었다. ‘점(dot)’과 ‘선(line)’ 시리즈 150호 캔버스 17점과 1백호짜리 작품 1점이 걸린 전시장은 박종규 회화의 최근 성과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배열되었다. 박종규의 이 컴퓨터 회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의 의도가 배제된 것으로 특정한 대상을 찍은 사진이 컴퓨터상에서 픽셀로 전환된 결과를 점과 선으로 기호화(encoding)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픽셀이라는 이미지의 기본 단위가 컴퓨터에서 연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noise)’을 회화 구성의 한 요소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회화나 조각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가운데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회화를 형성한 미니멀 아트나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에 미니멀 아트처럼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미니멀 아트가 번창하던 7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니멀 아트와 컴퓨터의 상호관련성은 생각할 수 없으나, 박종규의 경우 컴퓨터로 대변되는 디지털의 시대에 컴퓨터에 의한 기계적 회화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점의 다양한 배열과 선의 변형된 양태를 보이는 박종규의 그림들은 기실 결과물일 뿐, 실제로는 컴퓨터에서 시트지 기계를 통한 출력, 그리고 매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교한 캔버스 수(手) 작업에 이르는 과정(process)으로서, 기계와 인간의 합작이라는 예술적 특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기계와 인간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매개로 화합을 이룬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계관, 새로운 인간관을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열어주고 있다는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풍경’으로서의 작업은 이른바 사물의 중성적 성격을 잘 드러낸 것이다. 설치작업이 지닌 미쟝센의 특성을 잘 드러내면서 사물이 지닌 심미적 특성의 현시와 그것으로부터 받는 관람객의 감흥을 고려한 것이 박종규 풍경 작업의 특징이다. 얼핏 이우환의 철판 작업을 연상시키는,  일부가 절단된 철판의 묵직한 양괴를 정방형의 철 프레임에, 역시 정방형의 두꺼운 철판을 잘라 프레임에 일치시켜 관계의 조응을 꾀한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갤러리 신라 개인전 출품작, 2009). 또한 두꺼운 정방형 캔버스를 베이지색 접착지로 싸서 이 양괴들을 정방형 철제 플레임 위에 얹어놓은 설치작업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작업이다. 거리 풍경을 찍은 사진 위에 건물의 일부를 투명종이로 덮은 이미지와 실제를 대비시킨 작업, 구글 어쓰(Google Earth)에서 검색하여 얻은 사진 이미지의 일부를 투명 플라스틱 시트로 덮은 작업, 벽에 여러 개의 사선을 그어 원근감을 나타낸 다음 그 위에 여러 겹의 투명 플라스틱 시트를 덮은 작업 등등 또한 ‘풍경’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시안미술관 전시에 출품된 설치작업은 ‘풍경’ 계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블랙라이트를 장치하여 방 전체를 푸른색으로 조성하고, 벽에는 직경 15센티짜리 원형 거울 수 백 개를 부착, 회화에서의 점(dot)을 입체로 구현하였다. 바닥에는 긴 형광등을 수 십 개 설치한 뒤 그 중 상당수는 발로 밟아 으깨놓았다. 이는 노이즈에 의해 변형된 회화의 선(line) 작품을 역시 입체로 구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시각적 이미지에 불과한 허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입체와 설치작업으로 만든 것으로써, 이미지로서의 점과 선이 실제의 세계에서는 일정한 부피와 크기를 지닌 입체일 수밖에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 
 컴퓨터에 의한 디지털 미디어 작품은 박종규의 실험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분야이다. 특별히 개발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동영상으로 촬영한 거리 풍경이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양태로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준 영상작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경이 지닌 고유의 색을 컴퓨터를 통해 코드화하여 풍경의 암호화를 시도한 이 작품은 4대의 서로 다른 모니터에 담긴 4개의 풍경이 시간이 지나면서 노이즈가 생기듯 변형되고 종국에는 일련의 숫자나 기호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종규의 이 뉴미디어 매체를 통한 실험이 가장 빛을 발하는 압권은 높이 4미터에 폭 2.5미터에 이르는 대형 스크린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점들과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선들의 연속적인 폭발적 이미지들이다. 폭포의 굉음을 연상시키는 소음이 귀를 울리는 가운데 폭포처럼 쏟아지는 점들이 물결을 이루는 장쾌한 장면은 컴퓨터를 이용한 박종규의 동영상 회화가 올린 시청각적 성과일 것이다. 기타 무작위로 추출한 전화번호를 코드화하여 4각형의 모듈로 이루어진 평면 위에 기하학적 도형을 그려나가는 동영상 작품 등 박종규의 끊임없는 실험의식은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0과 1의 조합이 이루어내는 디지털 미디어의 눈부신 미학적 성과는 예술의 새로운 경계를 확장하면서 미적 체험의 감각적 지평을 넓히는데 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박종규라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대단한 호기심과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 있다. 


Ⅴ. 
 독창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한 지역의 작가를 발굴하여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기 위해 제정한 시안미술관의 중진작가 특별전시 프로젝트는 첫 출발부터 매우 성공적인 것 같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유능한 작가는 많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해 왔는데, 시안미술관과 같이 뚜렷한 사명감과 목적의식을 지닌 사립미술관이 존재하다는 것은 그 자체 위안이 됨은 물론 작가들에게는 큰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예술과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동과 서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상호 호혜의 정신이 새로운 미덕으로 자리 잡아 나가는 이 때, 시안미술관이 벌이는 이 특별전시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전개돼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해 주길 간절히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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