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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와 행위, 그리고 사물로서의 그림

윤진섭

Yoon Jin Sup(art critic)
Ⅰ. 허경애의 그림은 하나의 신체이다. 이 단순한 명제로부터 글을 시작해 보자. 신체란 무엇인가? 순수한 한국어로 말하자면 ‘몸(Mom)’이다. 몸살이 난다, 몸이 붓는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앞서 간다 등등 몸과 관련된 다양한 어사(語辭)들은 모두 ‘몸’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을 기술한 것들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몸은 그 안에 내장된 여러 기관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피부를 총칭한다. 
이를 허경애의 그림에 빗대서 말하자면, 그림의 외피 속에 내장돼 있는 물감의 다채로운 층들이 곧 신체의 기관이요, 그것들을 벗기기 전의 상태가 바로 피부인 것이다. 이 특유의 신체성이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한국 단색화(Dansaekhwa)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정상화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는데, 허경애의 작업과 친연성이 느껴져 다소 길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사물의 사물성, 캔버스라고 하는 이 명징한 신체는 마치 하나의 피륙처럼 일정한 모듈 안에서 이리저리 갈라지고 튼 피부로 덮여 있다. 투명한 청색의, 깊숙이 가라앉은 흑색의, 혹은 윤기가 감도는 흰색의 이 피부들은 곧 살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피부를 가리켜 “살결이 유난히 곱다”고 말한다. 그것은 피부의 질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기에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도 돋보기로 보면 무수한 굴곡과 미세한 주름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부는 이처럼 무수한 굴곡과 미세한 주름의 집합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정상화의 단색화는 무수한 굴곡과 미세한 주름의 집합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인체가 살로 이루어진 반면에 정상화의 캔버스는 물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이 언어적 차원에서는 서로 만난다. 비유가 그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을 두고 ‘뱀 가죽을 연상시키는’, ‘어린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닮은’, ‘번들거리는 흑인의 피부와 같은’ 등등의 묘사가 가능하다면, 그것들은 곧 그의 단색화가 지닌 ‘몸성’을 표현하는 어사들이다.”
-침묵의 언어, 정상화론, 한국의 현대미술가 100인, 사문난적, 2009- 

40대와 80대라는 커다란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한국의 작가들인 정상화와 허경애 사이에 신체를 둘러싼 친연성이 존재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랜 역사를 두고 동일한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민족적 내지는 문화적 유전인자가 두 사람 사이에 면면히 흐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심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극과 극, 다시 말해서 단색(정상화)과 다색(허경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역(周易)의 관점에서 폭넓게 보면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것이니 동일한 문화적 유전인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다. 

Ⅱ. 나의 이러한 관점은 허경애의 그림이 한국의 유구한 문화와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작업은 미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수준 높은 보편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탈속한 한국 오방색의 새로운 범례를 보여준다. 한국의 색동이나 무속의 탱화,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이 연상시키는 고색창연한 미감이 아닌, 보다 세련되고 다채로운 우주 삼라만상의 색채를 수렴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허경애의 그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혼돈과 질서’의 양상을 그녀 특유의 해체적 기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시도하는 기법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허경애가 작성한 작업노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반엔 캔버스에 이미지가 있는 작품들을 긁었으나 해체의 개념을 두고 작업을 하면서 캔버스 안에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 마티에르를 올려 나가는 점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먼저, 모노톤으로 아크릴 물감층을 올리기도 하고 물감을 섞어서 그 두께를 올리기도 합니다. 캔버스마다 물감 올리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것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처럼 물감층이 두꺼워질 때까지 올려서 말린 다음에 긁어나갑니다. 물감층은 대략 30층에서 70층까지 올려지기도 합니다. 물감 바를 때 꼭 종이 위에 표시를 하고 물감을 올립니다. 물감 표시를 하지 않으면 어떤 색들이 밑에 깔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꼭 종이 팔레트에 표시를 하고 색감을 결정합니다. 물감을 올릴 때 아무렇게나 올리지 않고, 모든 색들을 다 계산하여 올립니다. <Trace> 흔적이 나올 때 그냥 우연히 나오는 물감 흔적들이 아닙니다. 지금은 의도하면서 물감층을 연구합니다. 초반에는 종이 위에 물감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몇 번의 경험을 거쳐, 지금까지 각 캔버스마다 종이 팔레트를 만들었습니다.”
-허경애, <작업노트> 중에서-

이 작업노트에 의하건대, 허경애의 그림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극도로 계산된 논리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한 기존의 다양한 색채추상 작품들과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반복과 중첩에 의해 축적된 캔버스 위의 물감층(살)을 긁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부정의 정신에 있다. 그녀의 작업은 초기에는 이미지를 긁음으로써 이미지에 대한 부정을 기도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미지가 아닌, 거듭해서 칠해 진 색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치밀한 계산 하에 하나의 색을 칠하고 이를 종이 위에 기록함으로써, 대략 30-70층에 이르는 중첩된 물감의 행적을 담은 차트를 만드는 행위는 종국에 이르러 이를 부정하기 위한 사전 단계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업에 있어서 물감의 행적을 기록한 차트는 완성된 그림의 참조물(reference) 혹은 지표(index)인 셈이다. 
그러나 허경애의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회화의 존재나 본질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즉 그림의 지표면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색채의 지층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른바 발굴의 행위와도 비견될 수 있는 그녀의 이러한 작화 방식은 고통스런 노동의 산물이다. 조각도를 비롯하여 외과수술용 메스, 심지어는 식칼을 사용하기까지 하는 그녀의 제작 방법은 필연적으로 소음을 발생시킨다. 

“아크릴 물감 성분이 마르게 되면 플라스틱 성격이라, 긁는데 정말 돌덩이를 긁는 느낌입니다. 캔버스가 완전히 다 마른 다음에 긁습니다. 덜 말랐을 때 긁어 내려가면, 다 벗겨지는 현상이 오기 때문에 제가 의도하는 <Trace>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동판화를 즐겨 작업을 많이 했던 지라 팔의 힘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육체적 힘을 가하면서 작품을 완성해 가는 게 쾌감이 느껴집니다. 작품 결과로는 화려한 색채의 <Trace> 흔적들이 보이지만, 작업 과정에서는 긁어 나갈 때 참을 수 없는 굉장한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특수 귀마개 없이는 못 긁어나갈 정도 입니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상상을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화려한 색채의 <Trace> 흔적이 주는 시각적 효과랑 잘 어울리지 않는가 봅니다. 한 번은 갤러리에서 긁어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놀라더군요. 심하게 나는 소리에 다들 의아해 하더라구요.”
-허경애, 작업노트 중에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캔버스의 표면에 대략 30내지는 70여 차례에 이르는 서로 다른 색의 아크릴 물감을 겹쳐 칠한 후, 이를 예리한 칼로 벗겨내는 작업은 심한 소음을 동반하는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허경애의 작업은 ‘과정으로서의 예술’, 즉 일종의 ‘회화적 퍼포먼스’로 규정할 수 있다. 그녀의 작업은 비록 다색을 다루고 있지만, 과정 중심의 회화적 수행( performance)이란 관점에서 보면 반복과 촉각성, 그리고 행위가 중심을 이루는 한국의 단색화와 유사한 특질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이 바로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한국 단색화의 대표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정상화와의 문화적 친연성을 언급한 이유인 것이다. 

Ⅲ. 다양한 색깔로 거듭 칠해진 캔버스의 표면을 예리한 칼로 긁을 때 아크릴 물감의 잔재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허경애는 이 찐득한 물감의 잔재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 다시 캔버스 위에 부착하는 세심한 작업을 수행한다. 몸과 관련시켜 보자면 그 잔재들은 인간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간 부분들이다. 두꺼운 각질이나 비듬, 수술하여 제거한 암 덩어리나 혹은 예리한 메스로 도려내진 각종 살덩어리와도 같다. 그것들은 가장 아름다운 회화의 표면 드러내기를 지향하는 허경애가 속살을 도려내듯이 제거한 행위의 잔재물들이다. 그리고 행위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을 그것들이 다시 캔버스 표면에 일종의 구성물로 덧붙여짐으로써, 종국에는 서로 다른 풍경들이 연출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작가가 아무리 사전에 색채의 구성을 치밀하게 계산해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올린다 하더라도 나타난 결과가 반드시 예상한 효과에 미친다는 보장은 없다. 우연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색을 칠한 후 예리한 칼로 표면을 도려내거나 긁을 때, 도려내진 물감의 단면까지 일일이 예측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우연성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경애의 그림은 필연과 우연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연이란 그녀가 차트를 만들 정도로 치밀한 계산이 의미하는 계획성을 말함이고, 우연이란 그러한 계획이나 계산이 침범할 수 없는 세계의 신비와도 같은 무엇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녀의 그림은 논리와 비논리 혹은 합리와 비합리의 양안(兩岸)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허경애의 그림은 매우 아름답다. 순색에 가까운 빨강색에서 파랑색, 녹색에서 형광빛 주황색, 흰색에서 검정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원색과 조합된 중간색들이 캔버스 위에 켜켜이 쌓여 굳혀진 후, 그 두꺼운 지층을 칼로 도려낼 때 드러나는 속살은 그것이 곧 환상적인 색채의 향연임을 보여준다. 그녀가 오랜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색채의 이랑들은 대개 캔버스 표면을 세로로 가로지른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들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초기 줄무늬 회화처럼 엄격하지 않고 캔버스의 위에서 밑을 향해 세로로 뻗어 내려가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의상인 색동옷의 색채 배열이나 들판에 난 밭이랑을 연상시킨다. 
허경애 작품의 다른 특징 가운에 하나는 여백이다. 그녀의 작품은 산수를 표현한 한국의 수묵화처럼 대상, 즉 색료의 층을 제외한 부분은 검정, 흰색, 빨강, 녹색 등 단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필시 여백의 개념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이 여백의 공간과 색료의 층이 차지하는 공간의 중간지대에 일종의 오브제로서 깎아낸 색의 파편들이 엉겨 붙어 있다. 두꺼운 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 중간지대는 행위의 결과물인 색료의 잔재들로 구성돼 결과적으로 허경애의 작품이 오브제 회화임을 입증해 준다. 

Ⅳ. 얼핏 화려한 색채의 스펙트럼처럼 보이는 허경애의 추상화가 기실 작가의 심상을 담아낸 ‘마음의 풍경’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감상의 즐거움에 빠질 수 있다. 가령, 한국의 녹차밭을 연상시키는 연록색의 그림은 그것에 대한 분석에 앞서 초원을 거니는 듯한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찬가지로 댓잎처럼 예리한 형체를 지닌 초록색 물감의 파편들이 엉겨 붙은 녹색의 그림은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쳐 서걱대는 듯한 환청을 가져다 줄 법도 하다. 이처럼 시각적 요소가 청각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허경애의 작품은 폭넓게 볼 때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허경애의 작품세계는 그것이 다름 아닌 물감을 통한 실제 사물의 제시라는 관점에서 ‘현존감(presence)’과 관련이 있으며, 회화를 이념(idea)의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수행(performance)’과도 연계된다. 노동집약적인 작업의 결과인 그녀의 작품들은 미의 세계를 지향하지만 그것은 또한 기존 질서의 파괴와 해체를 통해 획득 가능하다는 점에서 상호 모순율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이율배반의 세계가 향후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전개돼 나갈지 기대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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