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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울

윤진섭

성능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197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돼 있다. 왜냐하면 70년대 이후 근 40여 년에 이르는 그의 미술상의 족적과 행로를 하나의 잣대로 분석하기에는 다층적인 구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층적이라고 함은 어느덧 한국 사회의 고질이 된 이념과 파벌에서 그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70년대 초반 <S.T> 그룹에 발을 담그면서 비롯된 그의 미술활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간에 바뀐 미술의 지형 변화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에게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을 주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간에 바뀐 미술의 지형변화’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벌어진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이란 양대 세력 간의 기세(氣勢) 다툼을 일컫는다. 이른바 70년대를 점유한 모더니즘의 실험기에 그가 작품을 시작한 것은 그의 작업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볼 때, 그 안에 이미 어떤 논쟁의 불씨를 내장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의 문제작 가운데 하나인 <1974. 6. 1일 이후>를 보자. 이 작품은 제3회 <S.T>전을 위해 출품한 것이다. 그것은 전시가 열린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전시실 벽에 8면짜리 4장의 하루치 일간지를 부착한 뒤 신문기사를 오리는 행위를 반복한 이벤트였다. 이 이벤트란 용어는 이듬해인 1975년에 백록화랑에서 열린 [오늘의 방법]전에서 이건용이 최초로 사용하였지만, 성능경은 자신의 행위가 이벤트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위를 한 것이다. 성능경은 전시 기간 중 매일 신문을 신간으로 갈아치우고 기사를 오리는 지루한 행위를 반복하였다. 그는 읽고 오려낸 기사는 청색 아크릴 박스 속에, 다 오려져 뼈대만 남은 신문용지는 투명 아크릴 박스 속에 분리수거를 했다. 이 작품은 신문기사를 오리는 과정을 보여준 뒤 그 결과물을 오브제와 설치 형식을 빌려 제시한 것이었지만, 전시가 열리는 기간 동안 동일한 행위를 반복했다는 점에서 그가 의식을 했든 못했든 분명한 ‘이벤트’였다. 


 성능경이 신문을 통한 일련의 행위작업을 벌일 당시는 제3공화국의 엄혹한 공안통치하 였다. 무자비한 언론의 검열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국에서 언론을 풍자하는 작품을 선보인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간담이 서늘할 일이었겠으나, 개념적 성격이 강한 그의 작품은 그것이 지닌 난해성으로 인해 용케 피해갈 수가 있었다. 


 성능경이 신문을 이용한 이벤트 작품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한국의 미술계에는 개념미술이란 용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S.T미술학회>는 개념미술의 발신지로서 여러 차례에 걸친 세미나를 통해 이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1969년 12월 창립기념세미나의 일환으로 연 ‘의식의 공간화와 조형방법론’(연사:김복영)을 필두로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적 서술’(이일 역), 1974년 1월 13일에 행한 ‘분석철학과 현대미술(철학이후의 미술(Art after Philosophy : 죠제프 코주스, 장화진 역)’, 1976년의 ‘개념예술과 예술의 개념’(나카하라 유스케, 최효주 역) 등이 그것이다. <S.T> 그룹의 회원들은 그 외에도 현상학,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아방가르드 등에 대한 공부를 통해 예술에 있어서 개념의 문제에 접근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러한 공부가 어느 정도로 깊은 수준의 개념미술에 대한 체화에 이르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시 이들이 공부한 죠제프 코주스와 나카하라 유스케 류의 개념예술과 관련된 단편적인 몇 편의 글을 통해 개념예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본질에 접근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성능경은 신문을 이용한 설치와 신문을 읽는 행위를 통해 언론 매체의 속성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훗날 “역사 앞에서 솔직하자.”는 심정으로 신문을 소재로 등장시켰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개념미술의 요체인 정보에 대한 문제를, 다름 아닌 그 정보의 전달매체인 신문을 다룸으로써 정공법을 택한다. 언론매체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선은 그의 진술에 의하면 군대에 가기 전에 접한 참여문학과 실천문학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었다. 

 성능경의 70년대 초기작업은 <신문>(1974), <S씨의 반평생>(1977, 제5회 [앙데팡당]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처럼 자전적이거나, <현장1-35>(1979-89)이나 신문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인물사진의 눈 부위를 예의 옅은 노랑색 띠로 가린 작품처럼 사회비판적인 계열, <사진첩>(1975), <액자>(1975), <자>(1975), <사과>(1976)처럼 사진이미지를 통한 동어반복적 혹은 행위의 과정(사과)을 보여주는 계열, <위치>(1976), <손>(1976), <검지>(1976)처럼 신체의 문제를 다룬 이벤트 계열 등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성능경의 초기 작업은 크게 순수한 개념미술적 경향과 개념적인 동시에 사회비판적이며 현실참여적인 경향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성향은 훗날 정체성을 의심받게 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여기서도(모더니즘 진영 : 필자 주) 불러주는 사람이 없고, 저기서도(민중미술 진영 : 필자 주)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작가로서는 참혹한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이력서에는 “1982-1984년까지 자의반 타의반 미술활동 공백”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이 시기의 무력했던 정신적 공황에 대한 심경을 밝힌 서술이다. 
 이 글의 모두에서 나는 성능경 개인에 대한 이해는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결부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특정한 시기의 한국 현대미술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한 작가 개인의 활동이 우리 인식의 지평 위에 다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계인 혹은 주변인으로 평생을 살아 온 그의 삶에 대한 올바른 평가이자 온당한 대우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다양한 이념 간의 갈등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듯한 그의 삶은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 간의 분열과 파열의 시기에 급기야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는 사태로까지 치달았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훈을 떠올리게 하는,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상징되는 ‘밀실’과 사회적 공적 영역으로 대변되는 ‘광장’ 사이의 길항관계에서 표류한 그에게 예술이란 유토피아는 과연 어디인가? 세월이 지나 정신적 치유를 겪은 후에 그가 한 퍼포먼스 중에 인상깊은 대목이 있다. 탁구공에 손수 적은 문구를 읽은 후에 마지막 대목에 이르자 목청껏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는 가사의 대목이다. “희--망의 나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성능경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난장’의 진혼굿이다. 그의 굿은 영을 부르는 초혼(招魂)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제문을 쓴 부채(이 때 제문의 내용은 퍼포먼스의 성격에 따라 다 다르다.)를 손에 들고 천천히 낭독을 한 다음, 부채에 불을 붙이고 다 타들어갈 때까지 천천히 부친다. 그 뒤에 벌어지는 다채로운 난장--서양의 피에로 분장을 비롯하여 신체 아크로바트를 연상시키는 체조와 줄넘기, 훌라후프 돌리기, 심지어는 1000cc 짜리 생맥주 잔에 소변을 즉석에서 받아 마시는 애브젝트 미학, 도깨비 방망이를 연상시키는 솜뭉치로 관객을 치며 “돈 받아라!”라는 외침에 이르기까지 산만하고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은 길면 한 시간도 넉근히 넘는 장편 버라이어티 퍼포먼스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저기에서 그러모은 촌철살인의 경구 속에 가려진 예리한 지성이 빛을 발하는가 하면, 동시에 시골 장터의 품바 공연에서나 볼 수 있는 싸구려 밑바닥 미학이 터져 나오기도 하여 보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면서도 일면 당혹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퍼포먼스에는 흔히 고차원적인 상징의 언어와 저급한 취미가 혼재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그의 퍼포먼스에는 지난 시절 신산한 그의 삶과 예술과 일상을 구분지려 하지 않는 ‘경계인’의 미학, 변두리의 철학이 녹아 있다. 


 이번에 성능경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위치한 오위장 벼슬을 한 김춘영 가옥에서 작업을 한다. 그는 이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그 한옥에 살았던 주인의 삶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사색당파(四色黨派)’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지난 시절 자신이 겪은 이념과 체제 간 갈등의 역사적 진원지인 그것에서 어렵지 않게 분열이란 단어를 추출해 낸다. 그리고 묻는다. “행복한 다성(多聲)은 불가능하기만 하였을까?”고.  


 “그들은 모두 동고동통(同苦同痛)을 무릅쓰고 동거동통(同居同通)을 도모하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 동과 서에서 남과 북으로, 늙은이와 젊은이로 일성(一聲)을 하려다 다성(多聲)으로 분열한 모양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그는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분열과 분단, 이산 등 고질적인 아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제목은 ‘특정인과 관련 없음’. 1977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번 버전은 과연 어떤 것인가? 


 옛날 작품은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신문에서 채집한 인물사진을 사진기로 촬영하고 인화한 다음 노란색 실크 스크린으로 눈 부위를 덮었었다. 이번에도 방식은 대략 유사하다. 신문에서 400명의 인물사진을 채집, 촬영, 인화한 뒤, 각 정당의 색을 상징하는 빨강, 파랑, 보라, 녹색을 사용, 각 색마다 111명씩 배정, 컴퓨터 작업으로 눈 부위에 해당하는 색의 띠를 덮을 것이다. 사색당파란 바로 이 색들의 조합을 의미하며, 그것은 화합은커녕 갈등과 분열만을 조장하는 오늘날 정당정치의 폐해에 대한 비판이자 통렬한 풍자인 것이다.   


 이상 대략 살펴본 것처럼 성능경 작업의 근원은 우리의 굴절된 역사와 신산한 삶에 뿌리박고 있다. 간헐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그러나 그 이면에 삶에 대한 우수와 인간적인 연민을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사진과 신체를 매개로 역사에서 소외된 자, 전체라는 집단 속에 매몰된 개인, 관념화되거나 상투화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벌여온 그는 이제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김춘영이란 인물의 혼을 이 땅에 다시 불러내려 한다. <S씨의 반평생>(1977)에서 자신을 과거로부터 불어내어 현재화시켰듯이, 조선시대 오위장 벼슬을 한 김춘영을 오늘에 다시 호출함으로써, 우리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행복한 다성(多聲)’이 과연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역사의 거울 앞에 우리를 세워 놓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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