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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환경에서 비엔날레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윤진섭

Ⅰ. 블록버스타 영화처럼 공룡과도 같이 비대해진 몸집을 지닌 비엔날레는 베니스비엔날레(1895-   )의 출범 이후 1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나칠 정도로 확장돼 왔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약 200여 개에 달하는 비엔날레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들면서 그 존립을 위협받고 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비엔날레 특유의 성격이 작용했다. 이른바 전위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춘 출품작들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대중을 소외시켜 왔던 것도 비엔날레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세계 어느 비엔날레를 가더라도 대중은 여전히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중의 소외현상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의 내용이다. 20세기 이후 전개된 현대미술의 사조와 역사에 연결돼 있는 오늘날 비엔날레의 대다수 출품작들은 미술의 형식과, 내용, 매체를 새롭게 갱신함으로써 점점 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술작품은 존재와 세계에 대해 각성을 유도하거나, 인간의 존재 자체를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철학적 반성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술의 힘이 바로 이런데 있다면 그러한 예술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연 그러한가? 우리의 질문은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질문은 대중에게 현대미술은 여전히 어렵고 난해할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오늘날 비엔날레 현장이나 현대미술을 다룬 미술관, 화랑 등에서 앵무새처럼 잘 훈련된 도슨트들이 관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거나, 전시장 한 구석에 해설서를 비치하는 관행은 미술작품을 보고 가슴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정답(도슨트의 설명이나 해설서의 내용)에 따라 이해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음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는 미술작품의 감상 모드는 물론 개념미술의 영향이다.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샘(Fountain)>(1917)에 가 닿는다.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망막(retina)에 의존한 미술품 감상 태도에 대한 거부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후 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감상 모드가 가슴이 아닌 머리, 즉 ‘이해’에 기반하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듯이, 현대미술은 가슴이 아닌 두뇌로 이해해야 하며 그 감상에는 지식과 지성이 필요하다. 
 대중의 미술품 감상과 관련시켜 볼 때, 현대미술이 지닌 또 하나의 맹점은 이른바 맥락(context)과 과도한 전략화이다. 그리고 비엔날레는 전위라는 미명하에 작가들의 이런 ‘전략을 위한 전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오늘날 비엔날레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대중의 불만이나 비난은 현대미술 작품이 나오게 된 맥락과 작가들이 구사하는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불청객으로서의 대중은 비엔날레를 비롯한 현대미술 관련의 전시회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있으며, 그러한 소외감은 부메랑이 돼 비엔날레 폐지론이나 무용론의 외피를 쓰고 끊임없이 출몰한다. 그것은 좀 더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내가 내는 세금이 내가 이해 못하는 일에 쓰여진다”는 불만감의 표출일 수도 있다. 


 작가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소외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서 미화하거나 포장하는 전술을 낳는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혁명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의 전략에 근거한 이 같은 현대 미술작가들의 전략은, 가끔씩 얼치기들을 양산하는 폐단도 낳았지만,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작가의 생존전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른바 대중의 속물근성을 자극해 작품을 구입하도록 하는, 혹은 잠재적인 고객으로 만들려고 하는 작가들의 영악한 심리가 그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러나 얼치기를 낳았든 아니면 미래를 통찰하는 명민한 천재작가를 낳았든 현대미술은 새로운 신화 만들기를 거듭하면서 아성을 더욱 굳혀가고 있다. 
 오늘날 비엔날레가 미술관, 상업화랑, 옥션 등 미술계의 다양한 제도들과 긴밀히 얽혀있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카셀이나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에서 주목을 받거나 상을 거머쥐면, 그 작가는 얼마 안 있어 미술관이나 영향력 있는 상업화랑의 헌팅 대상이 된다. 그런 일련의 제조 공정을 거쳐 작가는 스타로 등극하게 되고 작품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무소불위의 자본의 힘은 이제 비엔날레와 같은 제도 속으로 파고들어 황폐화시키고 있다.    

 Ⅱ. 그렇다면 여기서 비엔날레의 소통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할 필요가 있다. 관객 혹은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은 소통이란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비엔날레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하며 독백적이어서 그 자체 신비의 비밀에 싸여있다. 그것은 마치 암호와도 같아서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암호풀이 책이 필요할 정도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비엔날레 측이 마련하는 것이 바로 해설서라는 것인데, 그 안에 담긴 난해한 글은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골치를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 혹은 익명의 얼굴로 표현되는 대중이 늘상 바보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이를 예견한 사람은 롤랑 바르트와 조제프 보이스였다. 전자는 ‘저자의 죽음’을 후자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를 주장함으로써 관객이 예술의 주인으로 등극하는 시대를 예견했다. 저자의 죽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이른바 웹상에서의 하이퍼텍스트 글쓰기이다. 이는 수십만 명의 게이머가 국적을 초월하여 게임을 즐기는 머드 게임처럼, 여러 사람이 웹상에서 글을 쓰는 방식이다. 미술에서 이야기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독창성의 개념이 소멸된 배경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페러디나 인용(appropriation), 패스티쉬 등과 관련이 있다. 
 조제프 보이스의 ‘모든 사람이 예술가’는 대중의 창의성을 주목한 것이다. 그는 분업화,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서 죽어가는 대중의 창의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지식이나 기존의 교육에 의존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겪는 대중의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보이스의 자유국제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I.U.I)은 이의 산물로써, 카셀도큐멘타에서 행한 100일간의 자유국제대학 프로젝트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행한 토론 프로그램이었다. 

Ⅲ. 현대는 소셜 네트워킹(SNS)의 시대이다. 와이파이와 인터넷을 이용한 페이스북, 트위터 등 발달된 현대의 통신매체는 스마트폰과 함께 현대가 지구촌의 시대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 가공할 신문명의 기계 앞에서 이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제 대중은 인터넷 기반의 페이스북과 같은 통신망을 통해 언론인의 지위로 등극했다. 자신의 독자적인 블로그나 팬클럽, 페이스북의 계정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거나 편집함으로써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1인 언론사를 가질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또한 최근에 발명된 그림그리기 앱은 이제 누구나 스마트 폰 상에서 그림을 그려 실시간에 전파할 수 있다. 조제프 보이스의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디카와 포토샵의 발명으로 실현이 되었는데, 최근에는 스마트폰에 내장된 고 해상도의 카메라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편이다. 
 표면을 부드럽게 터치함으로써 조작되는 스마트폰은 마샬 맥루언이 말한 차가운 미디어(cool media)의 전범(典範)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해 2009년도에 한 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 속에서 “새로운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New creation comes out of the fingertips)라고 쓴 바 있다. 그 당시는 페이스북 가입자 수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서울의 지하철을 타면 10명 중에 4명은 책을 보고 3명은 모바일폰으로 게임을 하고 나머지는 잠을 잤다. 지금은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잠자는 사람을 빼고는 10명 중 거의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즐긴다. 


 현재 페이스북의 가입자 수는 11억 명 정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마트폰으로 상품을 주문하고, 사진을 찍고, 이메일을 보내고, 블로그에 올리고,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올리는 시대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국경을 초월하는 유목의 시대에 대표적인 아날로그 방식의 미술제도인 비엔날레를 생각하면 마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소설 동키호테 속의 라만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비엔날레는 관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물론 비엔날레에도 이른바 관객참여형 퍼포먼스가 등장한다거나 다양한 뉴 미디어 매체를 활용, 관객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렉티브 작업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회화나 오브제, 설치, 퍼포먼스 등 아날로그적인 성격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소셜 네트워킹이 지배하는 시대에 비엔날레는 기존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운영방식이나 제도, 그리고 관객을 대하는 태도 면에 있어서 새로운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관객이나 대중을 주체로 인정하는 데에서 출범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불청객이 아니라 창의성이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2015부산비엔날레 국제학술세미나 기조강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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