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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초상, 문화적 퍼포먼스로서의 사건들

윤진섭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을 중심으로-


Ⅰ.
 2014년 1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미얀마의 네피도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비무장지대(DMZ)를 세계생태평화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이는 야생동식물 불법거래 퇴치에 관한 EAS의 선언문 채택을 지지하면서 나온 것으로써 ‘남북한이 하나의 생태계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통로를 만들도록 추진’할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아세안 10개국 정상 외에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등 18개국 정상이 참석해 한결 무게감이 실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특별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이루어진 박대통령의 비무장지대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 제안은 비무장지대에 관한 국내외의 관심을 증폭시킨 가운데 세계 초유의 아젠다로 발돋움했다.
 이처럼 비무장지대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주지하듯이 그것이 세계 유일의 자연 생태계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의 비극이 낳은 상처를 극복하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으로 제시된 이 제안이 실현되면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킴은 물론, 장차 이 공원이 인류 평화를 위한 지구촌의 상징적 랜드마크가 될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이 공원의 조성이 가져다 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익 또한 막대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비무장지대 세계생태평화공원의 실현을 위해 남북한이 다각적인 접촉을 통해 상호호혜의 정신으로 임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불명예스런 유산인 남북분단의 상황을 극복하는 일은 이제 한시도 미룰 수 없는 남북한의 공동 과업이 되고 말았다. 이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를 바라보는 세계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며, 나아가서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에 관한 세계적 아젠다가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통일을 둘러싼 한민족의 여망을 문화적 입장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1990년대에 한국에서 전개된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을 살펴볼 목적으로 기술된 것임을 밝혀둔다.     


Ⅱ.
 예기치 않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 한 인간의 인생을 바꿔 놓듯이, 민족이나 국가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 타자에 의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인 두 사람이 그은 단  하나의 선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 스틸 대령(주한 미군사령관 역임)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인 딘 러스크 중령(케네디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은 작전국의 사무실 벽에 걸린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점령계획안을 기초했다. 이 안이 미국 합참과 제3부 조정위원회를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이는 다시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비밀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문서번호 ‘319-ABC File 1942-1948, No. 387’은 한반도의 운명이 기존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얄타회담에서 결정된 것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한반도의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앞의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 결정은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치였다. 소련도 미국의 이러한 결정에 동조, 38선에서 더 이상 남으로 진군하지 않았다.


 아마 그 당시만 해도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 두 사람이 지도 위에 그은 한 줄의 선이 무려 70여 년 간이나 한 민족 구성원의 운명과 삶을 그토록 바꿔놓을 줄 짐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지도 위에 황급히 그은 한 줄의 선은 실제로는 200여km에 달하며, 그 줄은 한국 전쟁이 멈춘 후에 그어진 군사분계선 155마일(248km x 4km)과 비슷한 길이이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과 북에 진군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군정이 시작되었다.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을 겪은 후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었고, 북한에는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다.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을 국호로 정한 이 양대 세력에 의한 한반도 분할은 비단 국토의 분할뿐만이 아니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동란은 미국과 소련을 위한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이 전쟁으로 인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수백만의 인명 살상이 있었으며, 남북한 간에 무려 천만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휴전이 성립된 이래 비무장지대(D.M.Z : Demilitarized Zone)는 60여 년 동안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천혜의 생태보존지역으로 남았다. 오늘날 비무장지대는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이 비무장지대를 천연상태로 보존하자는 문화운동이 199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일어났다. 화가이자 교육자인 이반 교수에 의해 주도된 이 문화운동에 연인원 수 백 명에 달하는 작가들을 비롯하여 학계, 정치계, 문화계, 종교계 등 약 천 여 명의 인사들이 동참했다. 

 여기서 우리는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이 일어난 1990년대의 상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 전시가 해방 이후 좌우로 갈려 이념적 갈등과 사회적, 정치적 분열을 겪어 온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촉발된 냉전 상황의 소산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으로 대변되는, 문학에서의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테마와 유사하게 미술에서도 70-80년대를 통해 소위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이라는 양분된 구조가 나타났다. 이른바 ‘순수’와 ‘참여’ 논쟁이 그것이다. 단순화가 가져올 문제를 무릅쓰고 도식화하자면 ‘순수’에는 소위 말하는 모더니즘 작가들이, ‘참여’에는 민중미술 작가들이 중심을 이룬다. 8. 15 해방 이후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한국사회에서 중립을 허용치 않는 고질적인 병폐를 낳았다. 중용 혹은 중립적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비단 이데올로기 문제뿐만 아니라 처세나 신상,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조차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영남과 호남, 신구세대 간의 갈등이 뿌리 깊게 얽혀 형성된 흑백논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따라서 고착된 분단 상황이 낳은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초중반 3회에 걸쳐 열린 비무장지대전은 미술계에 고착된 좌우의 이념적 대립, 참여와 순수 논쟁을 극복, 그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 움직임으로써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그것은 넓게는 비무장지대의 자연과 생태를 보존하고자 한 비정치적인 문화운동이었으며, 좁게는 화단의 내적 통합을 기하고자 한 첫 시도였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비무장지대 문화운동과 함께 ‘이산(Diaspora)’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1983년,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인 KBS T.V가 실황으로 중계한 ‘이산가족찾기’는 애끓는 사연으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린 장기 프로그램이다. 한국동란으로 촉발된 남북한 간의 이산가족은 그 숫자가 무려 천만 명에 달하여 비무장지대 문화운동과 함께 사회적/문화적 퍼포먼스로 다루어볼 필요가 있는 소재이다.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성의 파탄과 인명의 살상, 한국 특유의 분단 상황은 예술에 다양한 소재를 제공해준바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탈북민들과 다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외국계 이주민들 역시 예술의 다양성을 낳는 요인들로서 이에 대한 비평적 분석이 요청된다 하겠다. 

Ⅲ.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은 일종의 제안 프로젝트였다. 1991년, 한국사회가 아직 군사문화의 그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던 당시 일부 뜻있는 미술인들이 자발적으로 행한 이 문화운동은 애초에는 소박한 전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시의 형태로 전개되기 이전부터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통일 논의와 맞물려 비무장지대의 가치라든지 활용 방안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민족공원’ 내지는 ‘자연공원’의 성격을 지닌 비무장지대에 대한 제안이 여러 언론에 실리면서 관심을 끌었다. 뿐만 아니라 학계와 문화예술계의 이러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정치권으로 옮겨가 1988년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 ‘민족공원’, ‘통일운동장’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노태우 대통령은 유엔 본회의의 연설을 통해 평화시(市) 건설안에 대한 구상을 밝힌 바 있다. 1989년에는 국토통일원이 비무장지대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조사연구보고서를 발표,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주지하듯이,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고 있는 248x4km의 광활한 땅은 한국동란의 산물이다. 미소 냉전체제의 결과물인 DMZ은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의 중심인물인 이반의 표현을 빌면, “고통의 땅, 치욕의 역사, 침묵의 공간”이다. 그것은 남북으로 갈린 이산가족들에게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는 땅으로 여겨지면서 가슴 속에 숱한 한을 남겼다. 한국동란 이후 남북으로 흩어진 천만 명의 가족들은 대부분이 생사를 모른 채 오늘도 서로 다른 체제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은 비무장지대가 지닌 가치를 부각시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냉전체제의 종식과 맞물려 전개된 이 움직임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시재 교수는 DMZ를 가리켜 “고통과 치욕, 침묵의 땅에서 생명, 평화, 창조, 희망의 상징”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으로 해석,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비무장지대는 ‘무장된 평화’를 위한 냉전의 산물이다. 또 약 1천만 평방미터(248kmx4km)에 이르는 이 땅은 그 밖의 모든 지역이 무장지역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고발해 주고 있다. 비무장지대는 우리가 군사화, 무장화, 그리고 요새화된 공간속에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비무장지대’가 지탱하려고 했던 한반도의 평화는 무력에 뒷받침되었던 평화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장악하고 자기의 법과 질서를 세우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같은 것이었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군비증강, 경쟁에 이기기 위한 경제성장, 전시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 및 사회 통합 등, 비무장지대가 뒷받침했던 요새화된 한반도는 ‘평화’를 위한 전쟁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DMZ가 지닌 상징성에 한국 사회가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건축종합잡지 ‘공간’이 비무장지대가 지닌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공간’은 비무장지대의 기념공원화와 자연생태계의 보전을 집중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에 대한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Ⅳ. 
 1990년, 제주도와 한라산 백록담에서 벌어진 이반 교수의 퍼포먼스 <한라백두수토통합제(水土統合祭)>는 통일을 염원하는 한민족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민족정기가 서린 백두산 천지연 물을 한라산 백록담에 쏟아 부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그는 남북의 한민족이 다시 만나게 될 통일의 그 날을 상징화하였다. 그는 일단의 무용수들과 함께 백두산 천지연을 찾아가 한바탕 흐드러진 춤을 추는 등 일련의 제의적 퍼포먼스를 벌인 뒤, 그곳의 물을 담아와 한라산에 올라 춤을 춘 뒤에 백록담에 쏟아 붓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민족정기가 서린, 성스러운 두 산의 물을 합침으로써 남북통일을 기원한 이 의식은 일종의 ‘남북통혼제(南北通魂祭)’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남북이 한 자리에서 만나길 기원하는 이 메시지는 당시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됨으로써 이산가족은 물론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1980년대를 통틀어 한국의 미술계를 풍미한 민중미술 작가들에게도 남북통일은 중요한 테마였다. 휴전 이후 남북 분단이 야기한 정치적 상황은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빈번히 회자되었다. 특히 남한의 민주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 등 각기 정치체제가 다른 데서 빚어진 이념적 갈등은 공안통치 하에서 숱한 희생을 야기했다.   
 1980년대의 강압적인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연이은 시위에 단골로 등장한 걸개그림은 효과적인 미술매체였다. 이 무렵, 목판화와 탱화를 결합한 걸개그림의 독특한 양식을 통해 형상화된 ‘통일염원도’가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제작되었다. 이처럼 통일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모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민중미술 등 유파나 이념을 초월하여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비무장지대전]이었던 것이다. 
 80년대의 화단을 점유했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이분법적 구도가 허물어진 계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동구권의 몰락,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이다. 게다가 80년대 후반에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덮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현상은 극단적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극단적인 이념대립이 점차 소멸되는 가운데 형성된 화해 무드는 90년대 들어서자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미술집단 운동의 점진적 쇠퇴를 불러왔다. 특히 강남의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비문화와 이념 따위에 관심이 없는 신세대의 등장은 미술의 판도 변화를 예고하는 변수로 떠올랐다.    
 

Ⅴ.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약칭:비무장지대전)]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열렸다. 애초 이 운동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당시 덕성여대 미술과 교수인 이반과 그의 친구 박태순(소설가)이 임진강 일대를 답사하면서 비무장지대의 앞날에 대해 논의를 한 것이 시발이 되었다. 비무장지대 작업일지에 따르면, 이 답사 이후 이반은 같은 해 7월 7일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홍가이 교수를 만나 DMZ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는가 하면, 로이드신 화랑으로부터 의뢰받은 ’88 서울올림픽 포스터의 주제를 ‘비무장지대를 민족대공원으로 만들자, 세계인을 위한 올림피스(Olympeace) 공원으로 만들자’로 정하는 등 비무장지대 예술문화 운동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 이유에 대해 이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은 강대국의 대리전을 치르면서 얼마나 많은 동족을 살상했는가. 서울올림픽에서는 한반도를 분단시킨 국가들이 모두 모여 이른바 평화적 축제를 벌인다. 나는 마땅히 이 땅의 화가로서 과거와 현실의 절박한 문제를 한 장에 불과한 포스터일지라도 이것을 통하여 온 세계에 ‘그 모순된 축제의 현실’을 고발하고 싶었다.” 

 1972년 당시, 건설부장관이 건축가 김수근 교수와 농업경제학 전공의 김성훈 교수에게 의뢰한 ‘금강산 설악산 지역 관광도로 구상 계획안’은 DMZ지역의 활성화를 위한 첫 시도였다. 그 뒤 1980년도에 ‘공간’지는 잇단 지상세미를 통해 답보상태에 빠진 비무장지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촉구했다. ‘DMZ는 살아 움직인다’는 제하의 이 캠페인에 철학자 소흥열 교수가 ‘DMZ를 기념자연공원으로’를 기고하는 것을 비롯하여, 건축가 김원석이 ‘DMZ 기념공원을 위한 스케치-민통선 지역개발 구상도’, 도시계획전문건축가인 박병주 교수의 ‘금강산, 설악산 공원구역 설정 구상도’ 등이 잡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DMZ 문화운동에 대한 이반의 이론적 개념 틀이 서서히 형성돼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는 서울 부암동 자택에 ‘비무장지대 미술운동연구소’를 설립하고,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308-3번지에 ‘비무장지대작업연구소’ 부지를 마련하는 등 비무장지대예술문화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Ⅵ.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은 비단 전시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생태학, 환경, 건축, 정치학 등 학제적(interdisciplinary)인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진취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 이유는 전시를 통해 비무장지대의 존재를 알리는 소극적인 접근이 아니라, 장차 그곳을 생태보존지역으로 만들려는 분명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전과 목표는 이 운동의 창설자인 이반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45년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무장지대의 (620리x10리=3억평) 생태계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피로 물들었던 땅이 이제는 이끼 낀 철조망과 녹색의 덩어리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아롱진 원혼들이 뒤엉킨 녹색의 장원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합니다. 드디어 비탄의 역사를 영광의 땅으로 가꾸는 계기가 온 것입니다. 이 DMZ의 자연생태계와 그 환경보존은 통일과 맞물린 과제로써 남과 북이 깨끗한 마음으로 무릎을 맞대고 논의할 때만이 모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과 북의 당국자는 DMZ내의 자연생태 연구를 위하여 전 세계의 관련학자가 참여하도록 온 세계에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DMZ내에 유네스코의 협조를 받아 세계적인 자연환경공동연구단지를 조성해야 합니다. 판문점을 연구소로 전환해야 합니다. 남북의 지도자는 DMZ의 환경보존을 위한 국가선언에 합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쪽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반은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을 통해 여러 차례의 심포지엄을 여는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5년 8월 11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1995 비무장지대의 생태환경 보존을 위한 국제토론마당’은 이의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소흥열 교수의 사회로 열린 이 국제학술 심포지엄은 발표자의 면모만 봐도 그 전문성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김계중 미국 펜실베니아대 교수는 한국의 자연경관과 생태계가 “동식물의 급속한 손실 때문에 심각하게 시련”을 받고 있다면서 비무장지대가 한반도 통일의 과정에서 드러날 한국의 평화적 생물 보존계로서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오늘날 한국은 더 이상 ‘금수강산’이 아니며, 모든 한국인들에게 즉시 부과되는 임무는 경관과 생태계를 복원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금수강산’을 세우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서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비무장지대가 자연보존의 포괄적인 네트워크의 핵심임을 인식하여 우리 민족 모두가 다 함께 후손을 위해  이 뜻 깊은 사업을 추진해 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 야생화연구소 소장인 김태정은 심포지엄의 발제문을 통해 휴전이후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설정된 비무장지대는 전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황폐화된 곳이지만, 그 후 약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인간의 간섭이 배제돼 오히려 자연 생태계의 보전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면서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무장지대를 자연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법적 근거를 논의한 이장희 한국외대 법대교수(국제법)는 발제문을 통해 비무장지대의 “완충지대화는 남북한 간에 통일 지향적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있는 만큼, “비무장지대의 자연공원화는 이러한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비무장지대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의 전개를 통해 이 학술 심포지엄은 당시 학계와 문화예술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Ⅶ.
 탁월한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축제와 제의의 본질에 해당하는 ‘리미널(liminal)'한 순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일상공간과 신성공간의 경계, 즉 ‘문턱(threshold)’에서 벌어지는 환희와 거룩의 임재, 그것은 곧 ‘잠재력과 가능성이 충만한 상태’를 일컫는다. 우리 모두가 통일을 염원한다면 우리는 그 잠재력과 가능성이 충만한 미래의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말만으로는 안 되고 구체적인 실천이 따를 때 현실화될 수 있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여 내지는 당리당략을 위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서 진정으로 세계평화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초석을 쌓는다는 각오로 임할 때, 비무장지대는 한반도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비무장지대 문화운동에는 통일을 희구하는 한국인의 염원이 담겨있다. 그것은 인종과 성별, 이념을 초월하여 지구촌의 한편에 위치하고 있는 한반도에 전세계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져줄 것을 희망한다. 그것은 하나의 도도한 역사이자 커다란 문화적 퍼포먼스이며, 험난한 과정(process) 그 자체이다.  한때 서울의 일각에서 소수의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비롯된 이 운동은 그러나 지금은 매우 아쉽게도 중단된 상태에 있다. 모두에 언급한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비무장지대를 ‘세계생태평화공원’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 이 시점에서 이 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이 절실해서 철 지난 원고를 새롭게 손봐 여기에 제시한다. 이 운동의 창설자인 이반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단어는 가장 신뢰성 없는 상투어로 변질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바램은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분쟁을 저질러 서로를 살상하고 개척이라는 명분아래 자연을 파괴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그것이 더 이상 인류문명의 발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국민이 진실로 이 땅의 평화를 원한다면 DMZ의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한 적극적 방안을 경쟁적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세계인이 우러러 볼 한민족의 공동체적 미래와 삶의 바탕이 될 비무장지대의 녹지공간의 보존을 위한 민족적 국민적 의식의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그것은 진실한 통일의 열기에 불을 댕기고 지구를 구할 값진 세계사적 선구의 ‘한반도 선언’이 탄생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이 땅에서 끊임없는 살상과 증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민족정신의 불분명 때문입니다.” 
 
                                   <박래경 선생 팔순 기념 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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