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윤진섭


Ⅰ. 단색화와 미적 모더니티의 발현 

 최근 들어 국내외 미술계에 급격히 부상되고 있는 ‘단색화(Dansaekhwa)’는 기실 그 연륜을 따지면 무려 40년을 넘어선다. 이는 불과 3년 전만해도 꺼져가는 불씨에 불과했으나, 가까스로 기사회생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는 중에 있다. 
 그렇다면 단색화는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가? 거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의 단색화가 지닌 고유의 특질을 들 수 있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미니멀 아트와는 현격히 다른 어떤 ‘질’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집필 목적이다. 서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질’, 예컨대 한국 고유의 정서와 역사, 그리고 사유체계에서 비롯된 미적 특질이 그 안에 내재돼 있다고 상정하고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색화가 태동된 1970년대의 미술계를 둘러싼 제반 여건과 상황을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 시대였다. ‘희망’이란 근대화 정책을 통해 한국이 전례 없이 눈부신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요, ‘절망’이란 그러한 경제적 도약의 이면에 목표 달성을 위한 인권의 탄압이 상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색화는 이처럼 희망과 절망이 혼재하던 시기에 탄생한 ‘이념의 독자(獨子)’였다. 서구에서 발원한 다양한 미술사조들의 범람 속에서 독자적인 ‘미적 가능성’을 잉태한 그것은 당대의 미술제도에 힘입어 70년대를 통해 번창해 나갔다. 그것은 당시의 미술계 상황에서 ‘전위’ 혹은 ‘현대미술’의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고답적인 [국전]의 위세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그 무렵, 단색화는 생소한 회화적 개념과 문법으로 인해 대중은 물론 심지어는 미술인들마저도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사조로 치부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평면성’의 개념이었다. 검거나 희게 칠해진 캔버스 앞에서 관객들은 낯선 표현술에 어리둥절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전시장에 들른 대부분의 관객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단색화 작품들이 집단적으로 내걸린 70년대 중반의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 등등의 전시장에서 이러한 광경을 목도하기란 흔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혀 대중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말의 이면에는 대중에게는 낯선 어떤 회화적 장치가 그 안에 숨겨져 있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회화를 회화이게끔 하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면 ‘평면성의 용인’이었다. 평면을 평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 다시 말해서 평면성을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미적 모더니티(aesthetic modernity)’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이 ‘미적 모더니티’의 발현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단색화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것을 동시대 관객의 인식 수준에서 알아차리기란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평면성의 개념을 둘러싼 문법이 매우 생소하고 난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근대의 소산이었다. 서구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미적 모더니티’란 근대사회의 긴 역사적 터널을 통과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근(斤)’이나 ‘척(尺)’과 같은 전통적 도량형의 잔재가 채 가시지 않은 당대의 의식 수준으로선 이해가 난망한 일이었다. 이른바 근대가 체질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의 내면화란 기대 자체가 성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단색화를 포함, 당시에 유행한 하이퍼리얼리즘, 개념미술, 이벤트, 오브제, 설치, 비디오 아트 등등이 ‘서구적 아류’로 치부, 비판된 데에는 이러한 당대의 문화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데 기인한다.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과 상황에 대한 섬세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그것을 단순히 ‘서구적 아류’로 치부할 때, 거기에는 부친살해의 ‘이디퍼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존재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예술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단색화 발흥의 이면에는 일종의 화단정치적 복선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전후(戰後)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피에르 부르디에(Pierre Bourdieu)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 즉 ‘취향’의 문제가 개재돼 있었다. 1956년, 동방문화회관에서 열린 [4인전]의 작가들, 즉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에 의한 ‘반(反)국전 선언’은 그것이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구태의연하고 고루한 ‘국전풍’에 대한 ‘취향’의 문제가 깔려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이태 뒤인 1958년의 제4회 [현대]전에 이르러서 이다. 이른바 ‘비정형(Informel)’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가 전면적으로 부상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정형 회화는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미의 전투부대’라고 부른 현대미협의 멤버들, 즉 김서봉, 김창렬, 김청관,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조동훈, 하인두 등등에 의해 반(半) 구상화풍에서 완전한 추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 전시를 본 방근택은 ‘한국 최초의 소위 앵포르멜의 집단적 출현’을 맞이하게 되었다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Ⅱ. 앵포르멜의 쇠퇴와 ‘A.G' 그룹의 대두
 그러나 50년대 후반의 화단을 뜨겁게 달궜던 앵포르멜의 열기도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점차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양식의 포화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를 치고 들어온 것이 바로 ‘무’, ‘신전’, ‘오리진’으로 대변되는 [청년작가연립]전(1967) 세대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당시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탈(脫)평면’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앵포르멜 세대가 그러했듯이 서양에서 유입된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과 같은, 선배세대에게는 다소 생소한 사조들이었다. 이른바 팝아트, 네오다다, 구체음악, 해프닝 등으로 대변되는 서구사조는 당시 신세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것들은 평면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10여년간 화단을 점령했던 앵포르멜 세대들이 미학적 지향점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제4집단’, ‘S.T’, ‘A.G’, ‘신체제’ 등등의 전위적 그룹들이 전열을 갖추기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의 한국 사회는 1963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제3공화국’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양성우 시인이 ‘겨울공화국’이라고 부른 이 시기는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과 수출 100억불 달성(1977)이 상징하듯, 경제성장이란 절대 가치를 위해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억압되던 시절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계몽적 성격의 대중가요가 유행을 하고, 산업의 발전을 홍보하기 위한 ‘팔도강산’(김희갑, 황정순 주연) 시리즈가 국영 KBS TV의 흑백 브라운관을 타던 이 무렵의 화두는 새마을운동으로 대변되는 ‘조국근대화’였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이행은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거환경과 문화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따라서 앵포르멜 세대에 의한 단색화의 발흥이 이 시기와 겹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A.G(Avant-garde의 약칭)’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실패한 예술운동이었다. 앵포르멜의 뒤를 이어 전위미술 운동의 적통을 계승한 ‘A.G'그룹은 애초에는 참신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출범을 했다. “전위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표방한 이 단체는 그러나 불과 다섯 해를 못 넘기고 자진 해체되기에 이른다. 
 1970년대 초반,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이론적 지지를 받은 이 단체는 오브제와 설치 중심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경향을 띠었다. 곽훈, 김구림, 김동규, 김차섭, 김청정, 김한, 박종배, 박석원, 서승원, 송번수,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조성묵, 최명영, 하종현 등등의 면모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A.G’는 당대 화단 최고의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70대 중반에서 80대 중반에 이르는 연령의 분포를 보이는 이 멤버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화단의 원로이자 동시에 현역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김한이나 이승조 등 작고작가의 경우도 생전에 이미 화업의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A.G’는 1972년까지 모두 세 차례의 테마전을 가졌다. [확산과 환원의 역학](1970), [현실과 실현](1971), [탈관념의 세계](1972)가 그것이다. 이들은 ‘A.G’라는 동명의 회지를 발간하여 미술잡지가 희귀하던 당시의 미술계에 최신의 서구 미술이론을 공급,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했다.
 197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비엔날레]는 “전위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강령으로 삼은 이 단체가 내세운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이일을 선정위원으로 위촉, 국제전을 지향하겠다고 약속한 이 행사는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차례에 그치고 만다. 더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 단체는 이듬해에 정기전을 열었으나 이 전시에 참가한 회원은 회장인 하종현을 포함, 김한, 신학철, 이건용 등 단 4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박서보를 비롯한 ‘전쟁세대(앵포르멜)’에 대한 ‘4.19세대(A.G)’의 투항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술의 이념이나 그룹의 입장 차이가 아니라, 국제전 참가를 비롯한 여러 이권을 둘러싼, 화단 정치에 의해서 파생된 교묘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초반, 한국 화단에서 전위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왕성한 실험을 전개했던 ‘A.G’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Ⅲ. 1970년대 단색화의 정착과 확산
 한국의 단색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과 함께 당시 화단의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다소 장황할 정도로 ‘A.G’의 활동상에 대해 기술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단색화를 가리켜 ‘앵포르멜 세대의 귀환’이라고 쓴 바 있다. ‘귀환’이란 ‘되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자면, 군사적인 용어로 ‘탈환’이라 해도 무방하다. ‘고지의 탈환’이란 군사적 용어만큼 예술의 사회사를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이것이 바로 본디 군사용어였던 ‘아방가르드(전위)’가 문화적으로 전성된 이유인 것이다. 삶의 치열성이 곧 예술의 치열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고지’의 점령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예술분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못 된다. 어느 것이든 그것이 곧 삶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A.G’가 야심차게 [서울비엔날레]를 연 이듬해인 1975년에 박서보가 주도한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이 창립, ‘A.G’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흡수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수의 작가들이 백색 단색화로 전환, ‘단색파’의 획일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국제전 참가를 위한 작가 선정을 목적으로 창설된 [앙데팡당]은 1972년에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가진 이래,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자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열렸다. 1972년의 제1회 [앙데팡당]전은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했다. 그것은 당시 미협 국제분과위원장 겸 부이사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박서보에 의해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여러 국제전에 참가할 작가를 선발할 목적으로 창설된 무심사 독립전이었다. 제1회전의 심사위원으로는 재일화가인 이우환이 초청되었다. 그는 훗날 한국의 단색화와 관련, 역사적인 전시로 평가되는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이 열리는 일본 동경 소재 동경화랑의 주인인 야마모토 다카시와 함께 전람회장을 둘러보고 이동엽과 허황의 흰색 계통의 그림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살면서 조선의 백자에 심취했던 야마모토 다카시는 이 두 사람의 흰색 작품들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이는 훗날 자신의 화랑에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단색화가 언제 맨 처음 발화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돼 있지 않다. 그러나 1969년에 발행된 ‘A.G’ 잡지의 표지에 서승원의 기하학적 작품 <동시성>이 소개된 적이 있으며, 이반의 제19회 국전 입선작인 <Instant 폐문 백>, 권영우의 <70-21>(제19회 국전, 1970), 정창섭의 <원ㆍ원>(제19회 국전, 1970), 김형대의 <백의민족>(제18회 국전, 1969) 등등의 작품에서 흰색이 주조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72년 9월, 명동화랑에서 개최된 [5인의 백색전](김주영, 이원화, 이종남, 엄희옥, 여명구)은 검정색 단색화를 그린 김주영을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모두 흰색 계통의 작품을 출품, 처음으로 흰색이 집단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선례들은 70년대 단색화가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아니라 6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탄생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5인의 백색전]은 최초의 집단적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Ⅳ. 단색화의 미적 특질과 구조
 한국의 단색화는 ‘마음의 예술’이다. 그것은 물감이란 물질을 매개로 화가의 마음이 캔버스에 스며들면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축적의 결과물이다. 그 과정에서 단색화 특유의 ‘발효의 미학’이 탄생한다. 한국의 단색화 가운데서도 특히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동엽, 정상화, 정창섭, 최병소 등의 작품은 오랜 시간 동안 국물을 고는 가운데 특유의 맛을 자아내는 한국의 독특한 ‘탕(湯)’ 문화를 연상시킨다. 설렁탕과 곰탕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탕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성인데, 이는 같은 행위의 무수한 반복을 통해 특유의 화면 질감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의 투여가 이 작가들 작업의 제작적 특징이라는 사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한지를 20여 차례에 걸쳐 캔버스에 바른 뒤 다시 그 위에 검정색 물감을 바르거나 스프레이로 도포(塗布)하는 김기린의 행위, 엷은 톤의 회색이나 베이지 색 물감을 바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일정한 형태의 빗금을 긋는 박서보의 행위, 묽게 희석시킨 다색과 청색 물감을 캔버스의 아사 천에 반복적으로 칠해 스미게 하는 윤형근의 행위, 캔버스에 흰색을 칠한 뒤 반복적으로 붓질을 가해 회색 톤의 아련한 자취를 드러내는 이동엽의 행위, 캔버스에 격자를 만든 뒤 물감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유사한 색의 물감을 채워 넣는 정상화의 반복적인 행위, 물에 푼 닥(楮)을 눕혀진 캔버스 위에 놓고 손으로 자작자작 매만져 추상적 형태를 만드는 정창섭의 행위, 신문지에 볼펜으로 무수한 선을 긋고 그 위에 다시 연필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종이를 새카맣게 만드는 최병소의 행위 등에서 시간성은 절대적인 요소이다. 대부분의 한국의 탕 음식이 시간과 불의 세기 조절에 따라 성패가 갈리듯이, 단색화 역시 시간의 투여 내지는 작가의 행위와 호흡의 조절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드는 이의 마음이다. 유교의 근본정신인 성실함, 즉 ‘성(誠)’이 주요한 덕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설렁탕의 국물을 고을 때 완성의 타이밍은 만드는 이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경험의 총화이다. 오로지 경험에 의지하여 ‘마음’으로 끝낼 시점을 읽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을 통해 이루어지되, 궁극적으로는 물질을 초월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단색화를 정신 작용의 결과로 보는 이유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서구의 모노크롬 작가들, 즉 캐시미르 말레비치를 비롯하여 이브 클랭, 그리고 애드 라인하르트 등이 동양에서 영향을 받아 그들 나름의 정신성을 강조한 것은 매우 일리 있는 일이다. 이는 로버트 모리스를 비롯하여 도널드 저드, 솔 르윗, 칼 안드레와 같은 미니멀리즘 작가들이나 아그네스 마틴과 같은 미니멀 아트 작가들이 격자 구조를 통해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합리적 이성의 세계관을 보여준 것과 대조된다. 

 한국의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탕(湯)을 중심으로 한 한국 음식문화의 특징과 유사한 사례로는 한국 고유의 축성술(築城術)을 들 수 있다. 한국 고유의 성 쌓기의 특징은 자연석을 연상시키는 돌의 형태와 그 사용에 있다. 그것은 서양의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의 축적 및 배열이나 일본의 견치석축(犬齒石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서로 맞물린, 일종의 모듈에 근거하여 성을 쌓는 기법은 이성적이며 기계론적 사고의 반영물이다. 그것은 일이 끝나는 시점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이는 마치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가 붓이 지나가는 지점을 정확히 획정(劃定)함으로써 작품의 끝나는 시점(時點)이 예측가능한 것과 유사하다. 즉, 프랭크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에서 양쪽 줄 사이의 공간은 단지 붓이 지나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성벽쌓기는 자연석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공사장의 장인(匠人)은 적당한 크기와 형태의 돌을 골라 최소한으로 가공, 이를 서로 잇대서 성을 쌓는다. 일하는 과정에서 장인은 돌과 한 마음이 된다. 장인은 방금 놓은 돌의 모양에 알맞은 다른 돌을 골라 전체적인 형태를 고려하면서 성을 쌓는다. 조선시대의 성 중에서 어떤 부분은 배불뚝이처럼 튀어나와 굽었으면서도 오랜 세월을 버틴 것은 장인의 정성과 마음이 성 쌓는 일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성벽을 접한 한 서양인의 소회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파이드로스가 한국에서 보았던 성벽은 기술 공학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이는 노련한 지적 기획 때문도 아니었고, 작업에 대한 과학적 관리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 성벽을 ‘멋들어지게’ 하기 위해 과외로 지출한 경비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초월적인 상태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하도록 자신들을 유도하는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전기(1세대) 한국의 단색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자기초월성은 서양의 합리적인 이분법적 구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서양 미니멀리즘을 낳은 합리적 세계관의 요체는 시선을 통한 타자화(他者化)이다. 그것은 원근법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서양의 제국주의를 추동한 요인이었다.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골자로 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즉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주의 정신은 원근법과 함께 ‘근대성(modernity)’의 개념을 낳아 신이 지배하던 중세와는 다른 신문명의 패러다임을 열었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유럽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라는 레젝 콜라콥스키의 말처럼, 근대는 확실성에 토대를 둔 이성의 시대였다. 서양의 미니멀리즘은 이러한 이성의 자식이자 합리주의 정신의 열매이다. 반면에 한국의 단색화는 양자를 아우르는 감성의 자식이자 한국적 자연관의 열매인 것이다. 한국의 단색화가들이 70년대 초에 평면성의 개념, 즉 ‘미적 모더니티(aesthetic modernity)’를 수용하여 여기에 ‘자기초월의 미학’을 덧붙이는 가운데 특유의 단색 미학을 펼쳐나갔던 것은 곧 이의 구체적인 발현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 현대미술에서 ‘질’의 문제를 작품 제작의 요체로 삼았던 사조는 단색화가 유일하다. 사실주의 회화, 가령 하이퍼리얼리즘은 화면 속에 담긴 내용이 실제 대상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유사성의 문제를 과제로 삼았고,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작품에서 개념의 문제를 화두로 삼았던 반면, 단색화는 오로지 작품의 질을 문제시했다. 당시 단색화 작가들의 이러한 사고의 이면에는 작품의 성패를 오직 ‘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어떤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측면에서 보면 모더니스트 페인팅(Modernist Painting)의 비평적 기준(critical criteria)을 질에서 구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입장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추구해마지 않았던 회화적 질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추사 김정희의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등 1세대 단색화의 작품에서 검출되는 미학적 특징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내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Ⅵ. 단색화의 정신적 가치
 2014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단색화의 예술]전 서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한국의 단색화는 타자적 시선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는 내가 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 상태에서 남이 먼저 나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70년대에 한국의 단색화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한 측은 일본인들이었다. 1975년, 일본의 정상급 화랑인 동경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 사장과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가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동경화랑에서 열렸는데, 초대작가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등 5인이었다. 전시서문에서 나카하라 유스케는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 반(反) 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회화에의 관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미술평론가 이일 역시 서문에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이다......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미술평론가 이일의 발언은 매우 암시적이다. 그가 백색을 가리켜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으로 본 것이나 ‘하나의 우주’로 파악한 것은 백색이 지닌 정신적 근원성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견해는 백색이 지닌 민족적 상징성을 염두에 둘 때 매우 타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른바 ‘백의민족’으로서의 한국적 이미지는 근대 초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의 눈에 비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물결과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양인 기자의 눈에 비친 흰색 또한 타자적 시선이란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른바 ‘백의민족’의 표상으로서 한국의 백색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은 장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배태된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다양한 문화적 자료체를 통해 수렴된다. 가령, 우리의 조상들이 입었던 흰옷을 비롯하여 “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백자, 백일이나 돌 등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 때 상에 놓이는 백설기, 문방사우에 속하는 화선지와 각종 빛깔의 한지” 등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에 반드시 백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기린의 경우에 보듯이 검정색이나 청색, 노랑색, 빨강색, 녹색 등 오방색이 있으며 다갈색의 흙벽을 연상시키는 하종현의 배압법에 의한 단색화도 있다.” 
 이른바 흑ㆍ백 단색화라고 할 때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정신적 초월성’이다. 그것은 빛을 100% 빨아들이는 흑색과 빛을 100% 반사하는 백색의 물리적 성질을 초월해 있다. 미술평론가 이일이 백색을 가리켜 ‘단순한 빛깔 이상의 것’으로 본 이유이다. 
   

 “나는 흘리고, 번지며, 스며드는 수용성을 통하여 재료와 나, 물(物)과 아(我)와의 일원적 일체감을 소중히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60년대에 나는 서구적 앵포르멜을 동양적 미의식의 논리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면서 ’70년대에 오면서는 더욱 동양적 시공 속에서 어떻게 ‘그림’이 자연스러운 내재적 운율을 지닐 수 있을까에 더 주안하였던 것이다.”
   정창섭의 이 같은 발언 속에는 대상을 타자로 보는 입장이 아니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 미의식이 담겨있어 주목된다. 대상과 내가 한 몸이 되는 합일의 관계를 통해 자기초월적 지평으로 나아가고자 한 정신작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서구적 합리, 곧 과학적 시점이나 형식주의적 접근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나의 작업은 현존의 형태, 양식 그리고 탄탄한 논리를 완전히 제거한 때야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는 정창섭의 발언은 자신의 작업이 논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비롯됨을 말해준다. 정창섭이 표명한 탈(脫) 논리화 작업은 정상화, 박서보, 윤형근 등 다른 단색화 작가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들의 작업은 다같이 자기초월적이며 명상적, 정신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작업은 정신, 촉각, 그리고 반복적 행위를 통해 ‘마음의 영역’을 탐색한다. 


 나는 2000년도에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열린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의 도록 영문판에서 한국의 단색화를 가리켜 ‘Dansaekhwa’로 처음 표기하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 단색화라는 용어는 모노크롬 회화, 단색조 회화, 단색 평면회화, 모노톤 회화, 단색회화 등등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의 등장과 국내외적 확산을 둘러싼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이미 여러 글에서 소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거니와,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세계화에 상당히 성공한 편이다. 그것의 단초가 된 것이 바로 2012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이다. 나는 지금도 초빙 큐레이터 자격으로 이 역사적인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이 전시를 계기로 비로소 한국 단색화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단색화는 국제화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영국에서 발행되는 미술잡지 ‘Frize’는 단색화 특집을 게재한 바 있으며, 대만에서 발행되는 ‘전장(典藏), 금 예술(今 藝術(Artco))은 단색화에 관한 나의 글을 한문으로 번역 수록하였고, 2013년에 미국에서 발행되는 ‘Art  Asia Pacific’은 한국의 단색화를 특집으로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해외 미술잡지들의 단색화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내의 화랑들이 단색화를 단순히 상업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의 단색화가 국제화내지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술적, 비평적 작업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작금의 상황에서 화랑을 통해 단색화 작품이 해외의 미술관 및 컬렉션에 소장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학술적 접근과 작품 소장, 이 두 가지가 함께 병행되지 않으면 모처럼 찾아온 단색화 조명의 열기가 꺼질 위험이 있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단색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아트북스, 2015>
             

윤진섭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에서 미술사와 미술비평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 1.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2012)과 국제갤러리 주최 [단색화의 예술전](2014) 초빙 큐레이터, 타이페이 현대미술관(MOCA) 주최 [K-P.O.P/Progress/Otherness/Play]전의 총감독,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AICA KOREA 2014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있으며,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