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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현실의 세계-돌에서 유토피아의 도자기

김종근


고영훈의 작품에 돌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경이다. 작가는 당시 캔버스 위에 이 당시의 군사문화를 상징하는 현실적인 군화나 자연적인 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오브제로 돌을 선택 하였다. 그 돌은 극사실 기법으로 캔버스 위에 정밀하게 표현 되었고 그 재현의 형식은 고영훈이 가지고 있는 극사실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정착되었다.

하나의 회화적 오브제로 간주되었던 그의 돌들은 1980년대부터는 정교하게 배치 된 책 위에 놓여져 극명하게 노출됨으로서 현실과 이상이라는 일치될 수 없는 공유의 공간속에 자리 매김했다.

「이것은 돌이다」라는 명제로 시작된 이러한 고영훈의 선언적인 발언은 다분히 70년대적인 논리와 개념에 의한 해석적 사고에서 출발 된 것이다.

그가 평면 위에 책을 치밀하게 붙여놓고 마치 그린 것처럼 제시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눈속임이었다. 또한 도심의 주변에서 주워온 돌들을 똑같이 그려 마치 진짜 돌처럼 착각하게 하는 행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를 알아보라는 완벽한 속임수에 불과 했다. 그리하여 돌과 종이 하나하나에 음영을 베푼다고 했을 때, 고영훈의 미술 논법과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눈이 일으키는 착시의 현상을 담보로 하고 있다.

원래 그림이란 트롱프 뢰이유 trompe-loeil (눈속임이라는 뜻의 불어)라는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는 미술이라는 개념과 화가라는 직능에 가장 충실한 작가인 것이다.

고영훈의 이러한 작업은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곧 일류젼이란 개념으로 이해되고 평가되었다. 돌과 책이란 전혀 이질적인 사물들을 결합시킴으로 시각적인 충격을 주었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는 돌의 세계를 접고 최근 3-4년간 집중적으로 작업 했던 꽃과 도자기, 그리고 목동자상을 화면의 새로운 데마로 잡았다.

그러나 기법적인 면에서 여전히 그는 기존의 하이퍼 리얼리즘의 테크닉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화면 구성상의 방법으로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낯선 것들의 충돌로 신선한 데페이즈망 기법은 구사하지 않는다.
데페이즈망 기법과 하이퍼 리얼리즘은 고영훈이 가지고 있는 평면회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 이었다.


이제 도자기나 목동자상을 그리면서 그는 더 이상 (현재로서는) 돌을 그리지 않는다. 그가 더 이상 돌을 그리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적인 하이퍼의 기법을 포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돌과 꽃과 도자기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것이 단순히 화가의 오브제라고 말하고 있다. - 그에게 애초에 돌이라는 개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나 오브제로서의 정신적 가치가 얼마나 있는가 중요 하겠지만 그는 그다지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았던 점을 상기 할 수 있다.

돌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행위는 그것이 마치 진짜 돌처럼 보이게 하는 강력한 일루젼(illusion)의 대상이라는 점에 그가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작에서 보이는 그의 작업태도는 이전의 오브제로서의 돌 보다 훨씬 철학적이며 사유적인 뉘앙스의 시각들을 화면구성에서 보여준다.

그는 꽃을 그리기 위해 꽃을 냉장고에 놓아두고 그리며 , 호박꽃을 그리기 위해 호박을 기르고 그 식물 들 안에서 삶의 다양한 흔적을 발견한다. 호박꽃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가 하면, 호박꽃의 생태와 성장구조에 철저히 입각하여 꽃을 묘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까지 그는 호박꽃과 책의 이질적인 만남을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시각적 충격을 지속하고 있다.

물론 그가 이전에 돌을 그리기 전에 돌과 대화를 나누며 그렸듯이 , 그는 국보급 도자기를 화실에 놓아두고 한없이 백자가 만들어 지기까지의 도공의 심미안과 그들의 철학을 철저하게 교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복제와 재현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갖기 힘든 기술로서의 사진과 회화의 가능성을 평면에 실현하고 있음을 증명 해 보인다.

그러므로 화면 위의 백자 도자기와 용문양 들은 결코 그에게 가상의 허구나 환영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그림이 이전보다 다른 형식을 보이고 있는 부분은 배경처리이다. 그는 근작에서 철저하게 배경을 무시하고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떠 있는 달처럼 표현된 도자기를 표현한다.

그 도자기들은 너무 리얼하여 그것이 하나의 가상의 이미지나 일류전이 아니라 실재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대상의 리얼리티에 정직하게 접근한다. 이전의 작품들이 비현실적인 장면들의 충돌로 장치되었다면, 근작들은 보다 현실성을 부여하면서 실재가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남기며 존재의 이미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근작에서 발견되는 가장 혁신적인 변화의 특징은 그가 고집스럽게 다루고 있는 오브제에서 일탈하여 전통적 혹은 한국적인 오브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새로운 오브제를 선택하면서 “돌과 도자기는 제게 이상향이자 우주” 라고 정의하는 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일상적인 오브제 냄비나 깃털 마스크 등등의 문명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에서 그는 그가 그다지 눈길 주지 않았던 전통 도자기 속에서 어떤 미적 가치와 고고함의 상징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러한 변화는 모방의 미술이란 차원에서 바로 정신적인 눈속임의 미술로 이행을 말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3차원적인 물체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그리기 위해 시각적 환영인 주 무기인 눈속임의 기술로 책이나 돌을 중심적인 오브제로 사용했던 것과는 시대와는 상이하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발견되는 열려있는 다른 시각은 꽃과 호박 넝쿨이 가지는 생명력이다. 이들은 모두 생명을 가진 것들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명이 있는 것들이다. 도자 항아리나 목동자상 들은 이미 그것만으로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들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들이 생명과 영혼의 숨결은 물론 분명하게 우리의 전통적인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 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고영훈의 회화에서 위치전이의 충격과 새로움은 만나기 어려울 것임을 예견 해주고 있다.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을 이야기하거나 상상하는 로트레아몽 류의 데페이즈망(위치전이)의 현상이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영훈은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혼과 생명의 메시지를 전해줌으로써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것이 고영훈 회화의 숨겨진 힘이다.

이것은 사물의 하나하나에 작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두고자 하는 작가의 시각이다. 이러한 사물의 철학과 의미 속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말 한갓 굴러다니는 둘들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도자기까지 그의 세계관은 열려있다. 여전히 많은 감상자들은 그가 돌과 책을 떠나 그림의 배경 까지도 없앤 이유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주목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철저하게 현실의 세계에 문명적이기를 그렸던 현실과 이상적인 것의 사이에서 커다란 변모를 보여준다.

그는 지금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이상적인 정신세계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과정이다. 새 깃털과 칼을 얹은 승리에서, 그는 비현실적인 사물들이 만나 연출해내는 초현실 화법의 충격을 주었고, <목련>에서는 피할 수 없이 돌아오는 자연의 질서나 생의 본질을 탐색하고 있음을 증거 해 주었다. <호박 꽃의 덩굴>에서 그가 가장 자연의 순리에 따라가는 철학을 배워온 것이다.

어쩌면 그는 도자기라는 현실 ,나무 조각상이라는 오브제의 존재 자체에서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떠나 이 시대에 존재하는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철학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 싶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분명 전통 도자기나 목동자상 들에 그것을 재현 해냄으로서 그는 돌에서 자유로워 졌다. 그러한 일류전만의 의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이번 기회에 열어 보임으로 한국적 하이퍼 리얼리즘의 흐름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 기여란 도자기의 외양을 묘사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자기를 보듬어 안으며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기여이다. 그는 지금의 작업들이 그에게는 돌이나 도자기나 특별히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오브제 즉 대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대상을 똑같이 드러내는 형식으로 `눈속임이란 환영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실재가 어쩌면 허구일지 모른다. `없는 듯 하나 있는 세계`를 그는 희망하고 있다.

“도자기가 꿈틀대더라. 라는 그의 체험적 발언은 자신과 도자기와의 교감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그의 그림의 목적이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그의 예술적 목표는 도자기나 호박꽃이나 옥동자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추상화가처럼 하나의 사물에 그 자신을 던져버림으로서 생명과 영혼을 불러오겠다는 결의를 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도자기나 호박꽃 그리고 목동자상의 사진처럼 치밀함과 정밀함에 경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면서 그곳에 정말 영혼을 우리는 감동의 표정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일이다 . 그러한 가장 명확한 증거를 나는 그의 용문양의 도자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캔버스의 화면을 통하여 다양하게 도자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리얼함의 정점에서 세 개의 각기 다른 이미지, 사진처럼 묘사 되어 형태를 명확하게 인지 할 수 있는 도자기. 흐릿하게 형태를 인식 할 수 있는 어슴푸레한 분위기의 도자기. 마지막으로 전혀 인지 할 수 없는 불투명한 도자기의 이미지 . 이것은 인간이 어쩌면 그 모든 상황에 놓일 수 있는 현실이다. 그 어떤 시각적인 메시지가 영혼을 가진 도자기에서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즉 한 예술가의 현실과 이상의 모습인 동시에 고영훈의 현실이다. ‘현실’과 ‘이상’의 끊임없는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 ,이것이 바로 한 리얼리스트의 아우라를 가진 투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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