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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국의 또 다른 마티스 ,색채화가 임직순

김종근

1.임직순은 누구인가 ? 
아호를 잘 쓰지 않지만 운창 임직순(雲昌 任直淳, 1921-1996)은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1921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수안보가 고향인데 수안보는 과거에 행정구역이 괴산이었기 때문에 임 화백을 괴산 출신 화가로 부르는데 그러나 수안보는 한 때 중원군으로 지금은 충주시에 통합되어 충주 출신 화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임직순은 16살,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다닌 후 1940년 일본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일본 화단에 야수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진 하야시 다까시(林武)와 고야진실(高野眞實)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후 1942년까지 그는 동경을 중심으로 해서 활동했다.

비교적 일본 유학생이 적었던 일본미술학교 재학 중인 1940년,「정물(靜物)」을,  41년에는 제19회, 제20회 선전(鮮展-조선미술 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한국인 유학생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43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미술교육자와 화가로서 두 가지 일을 계속했다. 8·15 해방 후 서울여상·인천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6년에는 숙명여자중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6년 국전에서 작품 '화실'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 그 이듬해인 1957년에는 작품 앉아있는 소녀가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을 소재로 한 구상회화 '좌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대통령 수상작인 <좌상>은 그가 가진  예술의 인물상과  터치, 색채의 특색이 적절하게 표현된 걸작으로 당시의 구상회화의 화단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처럼 그는 꾸준한 노력과 성실한 작업 태도로 한 걸음씩 작품을 해나가는 아주 성실한 예술가의 모범적인 작가이기도 했다. 실제 필자가 자주 뵙고 장호원 작업실에서 뵌 인상과 기억으로는 성품도 아주 부드럽고 소박하며 겉치레가 없는 완전 충청도의 소박한 예술가였다. 


2. 임직순의 작품세계 
임직순 작가의 작품 세계는 보통 인물, 여인과 꽃 그리고 풍경으로 나눠지는데 작품의 모티브를 풀어내는 형식은 전형적인 인상파 화풍이다. 1961년 그의 나이 40세에 모든 예술 활동이 중앙으로 집결 되는 즈음 그는 반대로 서울을 떠나 광주의 조선대학교 교수로 몸담으면서 그의 화풍은 물론 화단활동, 주제와 소재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광주의 주변 무등산 풍경 등에서 그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던 임직순에게 광주는 한국의 인상파 화가라 불렸던 '오지호(吳之湖)-임직순 라인'으로 쌍벽을 이루는 조선대 미술 즉 '조대미술'의 뿌리가 되는 두산맥을 구축하였다. 실제 이 둘은 호남 서양화단의 정신적 지주로서 오랫동안 지금까지 영향력을 행사 했고 후학들도 호남 서양화단의 특징을 가질 수 있었다. 강연균 ,최쌍중 ,황영성,진원장 .오승우 등에서 그러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광주에서 그는 무등산을 주제로 하는 많은 풍경, 시골풍경 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제작 했는데 예향인 광주에서 그의 인물과 풍경이 꽃피었다. 한때 1972년 12월에 동경 교바시(京橋市)에 있는 시모무라 화랑(下村畵廊)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일본화단에서도 과감한 붓터치의 풍경인 <설경> 등 24점의 작품이 출품된 전시를 시작으로 한국 못지않게 일본에서도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화가 임직순의 국제적인 진출은 1973년 5월 프랑스로 가서 작가로 활동했으며 Monnet & Peterie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해외로의 진출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1974년, 14년간의 광주시대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 작업을 계속했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기념으로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이때의 작품은 전형적인 인물화로 흔히 보는 실내외 사물을 배경으로 한 소녀상이거나 여인상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한국적인 고유의 주제와 인상파적인 색채로 호평을 받았다.


3. 꽃과 여인 ,그리고 풍경
그의 주제는 크게 꽃과 여인 풍경인데 왜 그가 이런 작품을 하게 되었는지 밝힌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 젊은 여자와 꽃은 내 작품 속에 곧잘 등장하는 소재이다.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늘 강렬하게 지녀주는 까닭이다. '여성'이상의 무엇을, '꽃'이상의 무엇을 던져주는 미적 감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화가란 겉모양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아무 뜻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화가는 그 내용에 접근하기 마련이다. 화필을 들면 여자와 꽃은 그 형태를 떠나 정열과 고뇌와 사랑으로 다가온다. 여자와 꽃에 어울리는 모든 것도 통일된 이미지로서 나를 반긴다....... 이처럼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여자로부터 그의 특성과 꿈을 찾아내는 일은 험준하고도 어렵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갈등을 견디고 작품에 빠지는 일이야말로 작가로서는 바람직하다. 기쁨과 고뇌는 많을수록 좋으며 깊을수록 좋다...'(작가의 글 중에서)고 했다.

왜 그가 소녀와 여인을 만이 그렸는지 아마도 이 부분은 서울여상을 시작으로 인천여고와 숙명여고에서 총 14년간 근무를 하면서 소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발견한 탓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꽃과 소녀를 그리게 된 매우 실제적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꽃과 소녀는 내 작품 속에 곧잘 등장하는 소재다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소녀와 꽃이 대부 세계다 이미지를 따라 깊은 생명 속으로 진입하는 것을 찾아 꿈으로 변한다. 화가란 겉모양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 내면에 접근하기 마련이다 내가 화필을 들면 소녀와꽃 형태를 떠나 정렬과 보내 와 사랑으로 다가온다” 고 했다.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그린 그 소녀와 여인의 인물화에 공통된 특징은  빨강색과 검은색의 명암을 적절하게 대비 시키며 실내 풍경이 있는 소녀의 모습을 매력적인 구도로 표현했다. 특히 굵은 붓터치와 다소 시골스러운 한국적인  소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누이 같은 혹은 동생 같은 친근함을 줌으로서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임직순의 인물화는 언제나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과 꽃의 이미지를 어울리게 그린 것이 많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거나 책을 읽거나 또는 잠든 모습들이었다. 전체적으로 특정한 소재의 그림들이지만 세밀한 묘사 없이 다양한 표정과 제스처로 그만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낸 그림들이다. 한결같이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 시원하고 안정된 색면과 거침없는 붓질로 인물의 독창성을 화폭에서 구축해낸 훌륭한 작품들이다. 당연히 여인과 꽃은 가장 잘 다루는 소재였는데 집 뜨락에 석류나무와 장미, 수국, 맨드라미, 채송화 등 온갖 꽃이 피어 있었던 것에서 그의 화풍에 모티브들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대 시절 그의 작품에 모델이 되었던 여인 김모씨는  '임교수님은 성품이 원만하고 세심한 분이었다.'고 말했다.임 화백은 생전에 '내가 여자에 끌리고 꽃에 끌리는 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에 가린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에 끌리기 때문이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이런 발언으로 보아 임직순의 작품들은 단순히 외형으로 눈에 보이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겨놓은 것에 목적이 아니라 여인의 내면에 아름다움에 가려진 여성의 본질과 생명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인물과 더불어 정물화가 아주 많았는데 임직순의 정물화는 화병에 담긴 꽃, 그 중에서도 장미가 유독 많았다. 작업실에 가보면 임직순은 화병에 생화를 가득 꽂아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이것 역시  외형적인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객관적 형태를 그리기 위해서 보다 사물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유롭게 꽃들이 꽉 찬 구성으로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임직순은 일찍이 여성을 꽃과 비교하면서 꽃과 여인 모두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태가 저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이 꽃과 소녀 시리즈다. 좌상이며 턱을 받치고 있는 포즈는 작품의 구도를 완벽하게 잡아주어 아카데미적인 작품을 추구하였던 특성을 잘 드러낸다. 


초기부터 빛의 만남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색깔을 추구 했던 것이 임직순 작업이었는데 “ 색채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어느 순간의 색이 아니라 본질적인 색깔을 갖고 싶다. 이것은 '현장'으로부터 떠난 그림을 그리려는 변화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태양 아래서의 색이 아니라 내면의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눈으로 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충동으로 캔버스 앞에 앉곤 한다.' 는 작가의 고백에 비춰보면 임직순은 평면적인 사물의 묘사와 주저함이 없는 색채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를 지닌 꽃들에서 순수한 생명의 빛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던 작가였다.

그러면서도 80년대 초 '날이 갈수록 배워야 될 것이 늘어만 간다. 80년대에는 생애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작업의 방향을 화폭 속에서 하나의 면(面)을 추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소박한 인상파 작업에서 안주하지 않고 회화의 평면성을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평면성에 의지는 화폭에서 꽃을 그리거나 풍경을 그릴 때에도 면적인 분할이나 거친 먹선 으로 입체적인 표현을 시도 한 작품들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같은 대상을 표현의 차원을 달리한 작품들을 제작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풍경에서 그러한 작업이 많이 보였는데 바로 그러한 변화가 인상파풍의 색채주의 화풍에서 형태 및 형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이 부분을 즉 느끼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에 작업의 초점을 맞추어 방향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작품의 의욕을 보여준 것이다. 기법에서는 서양식을 따랐지만 대상이나 소재에 있어서는 한국적 스타일을 고집했다. 즉 풍부한 생명력과 정감 있는 풍경을 소재로 한 향토적 구상 그림으로 화단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광과 따사로운 햇빛이 그대로 전해진다. 빛과 색채가 때로는 견고하면서도 때로는 풀어헤치듯이 그리는 화가로서 한국화단에서 임직순이 없었다면 외로웠을 것이라는 평이 그런 풍경에 뛰어난 작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임직순의 광주지방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곧잘 등장하는 무등산 풍경은 물론 산, 바다, 들, 그리고 강이 대담한 생략과 수평적인 구도로 “풍만한 색채와 힘찬 붓 터치”가 특징으로 꼽혔다. 하늘 풍경 또한 단순한 형태의 자유로움으로 그만의 특성을 충분하게 살려내었다.


임직순이 즐겨 그린 소녀의 구성적인 특질을 보면 대부분 꽃들이나 다양한 표정을 지닌 실내 기물에 어울려 있지만 그 인물이 배경과 구별된 하나의 독립된 대상이나 사물로 있기 보다는 배경과 어울려 서로 조화를 이루는 흐름에서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이것은 모델 개인의 특징이나 개성보다는 화면 전체의 조화, 구성이나 어울림을 중요시한 이유이다. 전체적으로 소녀나 여인 , 정물 꽃과 같은 소재를 초기에는 빛과 색채의 효과에 두면서 작업했지만 동일한 주제와 소재라도 특징을 살려 임직순만의 화면구성으로 격조 있는 작품을 탄생하였기에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화풍으로 보아 임직순은 서정적 감성이 풍부한 프랑스 인상적인 보나르 같은 색채 화가로 분류된다. 모든 대상을 색채의 아름다움으로 간결한 구도와 생략된 필체로 오지호와는 다른 그만의  작품들을 살려냈다.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의 정취를 화실 안 다양한 소녀 모습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들을 특징적으로 그려 내 생동감 넘치는 여인과 꽃의 회화 세계를 보여줌으로서 오지호와 더불어 가장 인상파적인 작가로 크게 평가되었다.



4. 임직순의 평가 
이런 그에 대한 미술평론가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미술평론가 이구열씨는 '임직순의 독특한 유화 맛은 충실한 구도, 자유롭고 능란한 붓놀림에서 나온다' 면서 ' 그의 작품은 색채의 풍부함, 필치의 무게와 생동감 등이 충만하다'고 했고 국립현대미술관장이었던 이경성씨는 그를 두고 “미술사 속에 끼어서 평범하게 자라가지만 날이 갈수록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라며 “황소같이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내일의 영광이 보인다”고 극찬했다.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충북미술작가 발굴과 연구에 크게 기여한 쉐마미술관 김재관 관장은 “임 화백의 회화의 특징은 주제에 있기보다 색채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회화에서 신고전주의는 형태를 추구하였으며, 낭만주의는 색채의 자율성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임직순 회화의 역사적 배경은 색채가 회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보여 지는 예각된 터치, 독특한 색채를 머금고 있는 진득한 마티엘에서 우러나는 즉흥적인 분위기는 가히 압도적이다.”이라고 색채학적인 면에서 그를 평가했다. 다만 매우 한정적 소재만 다루기 때문에 소위 아카데미적이고 보수적인 작가로 비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담아내고자 했던 꽃과 인물, 그리고 풍경의 색채로 볼 때 한국의 마티스 같은 작가라고 본다. 특히 색채의 표현에서 말이다. 임직순 화백은 끝까지 장호원에서 활발한 작품 생활을 하였지만 76세에 심장마비로 운명하였고 고향을 지척에 둔 경기도 장호원 묘지에 묻혔다. 이상으로 임직순의 회화세계를 살펴보았다. 그는 인물 풍경 정물로 오지호와 더불어 한국적인 인상파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여 구상회화의 세계를 이룩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쉬움은 좀 더 그만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충북에서 태어났지만 이 지역미술을 향한 예술적 기여는 거의 전무하다. 예를 들면 김재관교수가 정창섭 화백과 함께 '재경충북작가회'를 창립하고 이 모임에 참여해줄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던 것도 그의 성격과 관계 되겠지만 지역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없었다는 것도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그의 작품을 보관한 미술관 하나 없는 것도 그러한 아쉬움이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조명이나 평가도 미온적인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임직순은 예술가로서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항상 일정한 시간을 정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훌륭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참고: 위 글은 서성록,박영택, 김재관 교수등의 글과 그 외 신문과 인터뷰 등을 참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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